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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44장 1-17절

 창세기 44장 1-17절 


찬송가 522장 ‘웬일인가 내 형제여’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던 것은 자신의 혈육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넘어 자신이 과거에 형들로부터 겪었던 어려움을 베냐민도 여전히 겪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지나며 하나님께서는 형들의 마음을 만지셔서 배다른 막내 동생을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놓을 만큼 끈끈한 가족애를 갖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직 자신의 형들에 전하고자 하였던 메시지를 온전히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이 의도적으로 만드는 상황을 통하여 자신의 형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상황이나 비유로,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은 성경에 종종 나타나는 방식으로, 이후에 다윗의 잘못을 지적하였던 나단 선지자가 취한 방식이었고, 그 외에도 하나님의 여러 선지자들이 죄를 깨닫기 바라는 대상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할 때 사용하였던 방법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의 입장에서는 애굽의 총리를 만난 오늘은 자신들이 애굽에 다시 오면서 예상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운수좋은날’이었습니다. 가족 중 그 누구의 몸도 상하지 않았고, 온 세상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허덕이는데,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와 함께 풍족한 식사를 하였으며, 화려한 애굽의 문화를 편안하게 누린 꿈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긴장이 풀어진 이때가 형들을 향한 요셉의 시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보더라도, 가장 어려운 시험은 갑자기 치루는 쪽지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간 자신의 인생에서 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사람들을 경험하며, 결국 사람은 긴장이 풀어지는 순간 그 사람의 본심이 나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셉이 주는 시험 (1-3절)

(1-3)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 아침이 밝을 때에 사람들과 그들의 나귀들을 보내니라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요구한 시험 문제는 이러했습니다. 형들과는 다른 어머니로부터 나온 아들, 베냐민의 자루에 양식을 구입하기 위해 가져 온 돈과 요셉이 쓰는 은잔을 넣어 이 형제들을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들의 반응을 통해, 과거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이 이제는 어떻게 행동하는 가를 확인하고, 이를 통하여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요셉이 아직까지 형들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형들에 대한 복수가 목적이라면, 요셉은 이렇게 긴 시간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며, 이와 같은 일을 꾸미고 상황을 이와 같이 만들어 형제들을 속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무엇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것은 이후 요셉의 고백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처럼 이 모든 상황을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자신의 형들에게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십여년전 그날 요셉의 형들은 순진하고, 의심 없이 자신의 형들을 따라 온 동생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이후 긴 세월동안 형들은 이 무서운 비밀을 감추며 살아왔습니다. 이 비밀은 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인생에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수치스럽고, 괴로운 기억이기에, 이들은 이 일을 억지로 잊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나, 막내 동생 베냐민, 그리고 이 형들의 처와 자식들도 모르던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이들의 과거 잘못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고 계셨습니다. 긴 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요셉은 지금 자신과 형들을 가로막고 있는 큰 죄악의 벽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을 만난 형제들 (4-13절)

(4-5) 그들이 성읍에서 나가 멀리 가기 전에 요셉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이 가지고 마시며 늘 점치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 하라

요셉이 사람들을 보내어 자신의 형들에게 전하고자 하였던 말은 분명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너희가 이같이 하니 악하도다’라는 메시지입니다. 모든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이 땅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순간부터, 놀랍게도 많은 선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선한 것들을 악하게 쓰는 우리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자녀들을 대하는 아버지 야곱의 태도에 흠이 있었지만, 요셉을 먼 곳에 있는 형들에게 보낸 건, 형들을 향한 야곱의 사랑이자, 형들을 향한 요셉의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형들은 아버지와 동생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이 은잔사건과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형들이 자신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잘못을 꺼내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 은혜를 구하는 자들의 악한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이후 말씀을 따르는 자들을 선으로 바꿔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후일에 모든 일이 다 마무리가 될 때 쯤, 요셉은 형들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50:20a)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이제 우리는 다음 구절을 통하여 요셉이 전하는 상황과 메시지를 받는 형들의 반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6-9) 청지기가 그들에게 따라 가서 그대로 말하니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요셉의 형들은 은잔 사건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습니다. 형들의 입장에서는 당장은 크게 억울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맹세코, 애굽의 그 어떠한 것도 훔친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형들의 이러한 항변도 과거 이들이 요셉에게 했던 잘못과 함께 놓고 보면 틀린 변명이 됩니다. 비록 이 형들이 애굽의 돈을 훔치지는 않았으나, 노예상들로부터 요셉의 몸값을 돈으로 받아 훔쳤습니다. 비록 이 형들이 요셉의 은잔은 훔치지 않았을지 모르나, 요셉의 색동옷과 요셉의 가족, 요셉의 인생과 시간, 그 모든 것을 훔친 것은 이 형들이었습니다.
추후에 언제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우리의 모습도 이와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장은 하나님 앞에서 큰 잘못이 없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르나, 온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불꽃과 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무죄를 항변할 영혼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의로움은 오직 우리의 악함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았을 때, 형들의 변명에 대한 요셉이 보낸 청지기의 반응은 단호하며, 그의 대답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10)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이 청지기는 은잔이 발견된 사람만 잡아갈 것이고, 은잔이 발견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줄 것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요셉의 형들은 이 청지기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뒤의 상황은 이들이 생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11-13) 그들이 각각 급히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자루를 각기 푸니 그가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나이 적은 자에게까지 조사하매 그 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된지라 그들이 옷을 찢고 각기 짐을 나귀에 싣고 성으로 돌아 가니라

형들의 호언장담과 다르게 나이순대로 풀며 자루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하필 아버지 야곱과의 약속을 통하여 꼭 지켜야 하는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순간 형들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이들은 당장이고, 청지기의 약속을 근거삼아 베냐민만 잡아가고, 자신들은 놓아달라고 외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보인 행동은 자신들의 옷을 찢는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성경 속 인물이 자신의 옷을 찢는 장면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큰 슬픔과 분노, 큰 두려움과 같은 감당하기 힘든 자신의 상황을 표현할 때 취하던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인생을 훤히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한 형들의 진실한 반응이었습니다. 또한 긴 시간 자신들을 눌러왔었던, 죄에 대한 죄책감과 그것에 대한 슬픔과 울분이 폭발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은 자신이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하여, 자신이 지금 보다 자유로워지고, 지금 보다, 자신이 더 만족스러워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정반대되는 잘못된 인식입니다. 우리는 죄를 통하여,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죄의 속박을 경험하게 되며, 우리는 죄를 통하여 더 큰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결핍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을 누르던 이 죄악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면 사람은 보통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큰 슬픔과 고통, 분노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로마서 7장24절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로마서 4: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또 이와 같은 경험을 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이사야 6: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이러한 모습과 같이 지금 요셉의 형들은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과거의 죄를 돌아오며, 옷을 찢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이 형들은 더 이상 청지기 앞에서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들은 베냐민을 버리지 않고, 온 형제가 함께 요셉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만난 요셉 (14-17)

(14-15)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 아직 그 곳에 있는지라 그의 앞에서 땅에 엎드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행하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잘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느냐

14절 초반에 요셉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 형들을 표현할 때,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라고 표현하는 부분은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하는 표현입니다. 이 부분을 원어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유다가 이르니,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렀다’가 됩니다. 이는 자신들의 죄를 추궁받기 위해 요셉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유다가 가장 적극적으로 먼저 요셉의 집으로 들어갔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구덩이에 던져버린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자고 형제들에게 먼저 제안한 사람은 유다였습니다. 아마도 유다는 요셉을 노예로 판 사건이 마음속에 가장 큰 짐으로 작용하였던 사람 중 한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은 더 큰 고통과 어려움이 그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사람은 한번 죄를 지으면, 더욱 더 그 죄에 집착하며, 계속해서 죄를 더 키우는 경향을 보입니다. 유다 역시 자신의 과거 죄악을 시작으로, 다시 죄를 지으면서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망가뜨려, 자신의 며느리 다말과의 범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자신이 죄를 지어서 마음이 힘들고 괴로우면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가서 해결을 받으려 하지 않고, 다시 죄에게로 돌아가 더 큰 죄악으로 자신의 허전한 마음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우둔함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기 위해 어둠을 헤매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 그 사람들이, 지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라는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는 자신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어줄 빛된 생명의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크고 작은 영역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고, 죄악과 잘못된 방법으로 해결을 받고,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둔한 행동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와 같이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의 품으로 앞장서 달려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하나님께로 달려온 유다의 고백입니다.

(16-17)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요셉이 이르되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내 종이 되고 너희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로 도로 올라갈 것이니라

유다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죄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유다와 같은 동일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악을 찾아내셨다.’ 오늘 함께 이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죄악을 찾아 우리 각자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 물음에 대해 솔직히, 그리고 진솔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물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하나님께서 나의 죄악을 찾아내셨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찾아 알려주시는 죄악을 내려놓고 이제는 그 죄악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기쁨과 능력, 참 생명과 위로의 자리로 나아가시는 우리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죄악을 찾아 물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죄를 떠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삶의 참된 능력이자, 위로, 기쁨이자, 지혜라고 고백하면서도,
그간 겉만 달콤해 보이는 죄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찾아 보여주시는 죄악 앞에서
이제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께로 달려가,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소망하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그 결과 우리의 평생을 누르고 있던 큰 고통과 분노, 슬픔과 두려움을 벗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안식의 삶을 누리게 해 주옵소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죄를 지으며,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나,
삶의 언어로 빛 되신 주님을 전하는 삶 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형들을 추궁하는 요셉의 마음을 어떠했을까요?
2. 만일 나의 자루에 은잔이 들어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3. 요셉의 형들과 같이 긴 시간, 덮어두었던 죄악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4. 죄악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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