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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44장 18-34절

 창세기 44장 18-34절 


찬송가 369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오늘 말씀은 야곱의 아들들이 집으로 가던 도중에 되돌아와서, 요셉에게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유다가 계속해서 나서서 요셉에게 간청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과 그 아들들이 처한 상황을, 유다가 자기의 관점으로 진술하는 것입니다. 그 유다가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으며, 왜 이 유다의 간청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죽겠나이다(18-21)

(18)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주의 종에게 노하지 마소서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 앞에 죄인처럼 엎드려, 그의 말 한마디에 생사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다는 이런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고, 형제들을 뒤로하고 요셉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높은 자리에 앉아있고 유다는 바닥에 엎드려서 머리를 조아렸을 것입니다. 유다는 계속해서 ‘주’라고 부르며 요셉을 높이고 자신은 낮춥니다. 심지어 요셉을 바로와 같다고 하며 그를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표현합니다. 유다는 이렇게 그의 생각을 요셉에게 말할 기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나서는 것은 그의 마음에 선 결단을 실행하려는 것입니다. 유다는 먼저 지금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요셉에게 설명합니다.

(19-20) 이전에 내 주께서 종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유다는 아버지 야곱과 라헬이 낳은 두 아들과 얽힌 가족사를 이야기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라헬을 얻기 위해 품삯 없이 낯선 땅에서 14년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얻은 아내 라헬은 임신이 잘 안 돼 뒤늦게 남아 아들을 둘을 낳았는데, 둘째를 낳다 죽었습니다. 이 둘 중 큰 아들은 잃어버리고, 아들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 남은 아들인 막내가 야곱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많은 아들들이 있지만, 사랑한 아내가 남긴 하나 남은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지금은 유다가 이렇게 말하며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과거에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요셉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우를 미워해 형제들과 함께 그를 노예로 팔아버렸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유다는 2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을 빼앗았다는 죄책감과, 그래서 나머지 아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머지 아들을 애굽의 총리가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베냐민이 함께 온 것이, 요셉에게는 작은 일일 수도 있지만, 유다에게는 아버지의 생명과 가족의 운명이 걸린 일입니다. 만일, 막내 베냐민 마저 잃는다면 아버지 야곱은 죽을 것입니다. 유다는 과거처럼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우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의 삶을 동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형제들이 아버지에게서 막내를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애굽의 총리인 요셉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23-24) 주께서 또 주의 종들에게 말씀하시되 너희 막내 아우가 너희와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시기로 우리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로 도로 올라가서 내 주의 말씀을 그에게 아뢰었나이다

요셉은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출애굽기 10:28에서 바로가 모세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은 만일 네가 내 얼굴을 다시 보는 날에는 ‘내가 너를 죽이겠다’는 강한 협박의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결국, 과거에 요셉을 미워해 노예로 팔아버림으로 지금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베냐민을 데려와 아버지를 잃든지, 아니면 베냐민을 두고 와 자신들의 목숨을 잃게 되든지, 두 개 중에 하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얍복강가에서의 아버지 야곱처럼, 야곱의 아들들도 과거에 자신들이 뿌린 삶의 결과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형 에서가 장정 400명을 이끌고 야곱에게로 오고 있을 때, 그 상황을 야곱의 아들들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20년 동안 숨기고 있던 자신들의 죄를 요셉이 다시 직면하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에서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혹은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 앞에 서게 되었을 때처럼, 우리 또한 자신의 죄로 인해 초래된 결과들을 마주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와 상관 없는 일처럼 회피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성숙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는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의 생명과 베냐민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27-31)

(27-29)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갔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틀림없이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 너희가 이 아이도 내게서 데려 가려하니 만일 재해가 그 몸에 미치면 나의 흰 머리를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하리라 하니

유다는 야곱이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낸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무품삯으로 섬겼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노예로 13년을 보냈지만, 야곱은 14년을 노예처럼 섬겨 라헬을 얻었습니다. 그 라헬이 임신하지 못해 고통받다가 늦게 두 아들을 얻었는데, 라헬은 둘째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남은 두 아들 중 하나는 20년 전에 잃어버리고, 나머지 한 명만 남았습니다. 이제 그 남은 아들 한명을 애굽으로 보내는 것은 아버지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것 같습니다. 30-31절입니다.

(30-31)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버지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이 막내 베냐민을 단순히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둘의 생명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표현합니다. 유다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도 자기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두 명의 아들을 잃어버리고 아내 마저 죽었습니다. 막내 아들 셀라만 남았을 때, 그 만은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첫째가 다말과 결혼한 후 죽자, 둘째를 다말과 결혼시켜 대를 잇도록 했는데, 그 마저도 죽었습니다. 혹시 막내 셀라도 죽게 될까봐 다말을 친정집으로 보내 셀라가 클 때까지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 사이 아내마저 죽어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유다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 같습니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여, 아버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유다는 아버지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고통과 자신의 죄를 마주합니다. 삶의 경험 속에서 실패와 좌절의 터널을 지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유다를 성숙시키셨습니다. 유다는 자기 자신에게 좌절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할수록, 다른 사람의 좌절과 약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나중에는 다른 사람의 약함을 위해 자신을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의 형편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더 잘 믿고 있다고 생각 할수록, 우리는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약함과 실패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내가 대신 있어 아버지를 살게 하소서(32-34)

(32-34)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그리고 유다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자기가 종이 되는 대신에 베냐민과 나머지 형제들을 돌려보내기를 요청합니다. 유다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가 희생해서라도, 아버지 야곱이 아들을 잃는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이미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고 고통 중에 있으며, 유다는 아버지가 더 큰 고통에 빠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선택한 것은, 베냐민 대신 자기가 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아끼고 사랑한 아들을 잃게 되는 그 고통을 아는 유다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 대신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유다는 과거와 달라져 있었습니다. 유다는 과거에 요셉을 미워해서 팔았고, 막내아들을 잃지 않으려고 다말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 일들 뒤에 있는 자신의 불의함을 보았고 자신의 죄와 직면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불의함과 죄를 인정하고, 그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들을 위해 자신이 대신 종이 되기까지 댓가를 치르려했습니다.

우리로 유다와 같은 변화를 하도록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도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로 사랑이라는 실천적인 삶을 제시합니다. 사랑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인데,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고 하시고, 죄인 된 우리를 위해 대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유다가 실패 속에서도 결국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보여준 자기 희생적인 삶의 길로 주님께서 우리 또한 인도하여 주실 것을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요셉 앞에서 선 유다와 그 형제들처럼, 우리도 믿음의 여정 가운데 우리가 뿌려놓은 죄의 결과들을 마주하게 될 때, 유다처럼 더 성숙되어 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이끄시는 그 삶의 길을 따라,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며 사랑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된 유다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해보고, 왜 그러한 심정이었을지 묵상해 봅시다.
2. 유다는 야곱에게 베냐민을 어떻게 설명했으며, 왜 그렇게 유다가 말할 수 있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유다는 요셉 앞에서 과거와 달라져 있었는데,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묵상해 봅시다.
4. 예수님의 계보에 들어간 유다가 보여준 말과 행동의 특징을 생각해보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 할 사랑을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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