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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46:28-47:12

 창세기 46:28-47:12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애굽에 온 야곱 가족들(46:28-34)
어제 46:1-27을 통해,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그의 가족 66명과 함께 애굽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살폈습니다.

(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야곱은 가족들이 애굽에 다다를 때가 되자, 자신들이 거의 다 왔음을 요셉에게 알리기 위해서 유다를 미리 보냈습니다. ‘미리’의 문자적인 뜻은 ‘얼굴’입니다. 야곱이 한 ‘얼굴’을 전령으로 요셉에게 보내서 자신들이 도착했음을 알렸다는 의미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마땅히 장남 르우벤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둘째 시므온도 아니었고, 셋째 레위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가려 뽑아 보낸 사람은 넷째 유다였습니다. 유다는 야곱의 집안(즉, 이스라엘)의 대표 얼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유다는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가장 상하게 한 아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야곱의 아들 10명은 동생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먹고도, 요셉의 옷에 염소 피를 묻히고서 요셉의 피라고 아버지를 속이고서도 22년 동안 말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38장에서 살핀 바와 같이,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쌍둥이-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당시가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다면, 유다는 그의 바르지 못한 행실로 인해 사회적으로 완전히 생매장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이러한 지난날의 잘못된 행실이 그에게 믿음으로 승화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갔다가 다음에 올 때는 막내를 꼭 데려와야 곡식을 살 수 있다는 애굽 총리의 말을 듣고, 다음에 곡식을 사러 갈 때 아버지 야곱을 설득했던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또 베냐민의 자루에서 애굽의 총리가 점을 칠 때 사용하는 은잔이 나와서 노예가 될 뻔했을 때 그를 위해서 간구하고, 자신이 대신 노예가 될 터이니 베냐민을 풀어달라고 눈물로 간구했던 사람도 유다였습니다. 유다의 그 간구가 요셉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습니다.
물론 유다의 삶을 보고서, “우리가 삶을 마음대로, 또 엉뚱하게 살아도 나중에는 다 정리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지난날 자신의 바르지 못한 삶이 오늘의 바른 자신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29)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의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요셉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신은 초강대국의 총리이니까 체통을 지켜야 한다며 뻣뻣하게 자기 집으로 오라 하고서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총리가 한 가정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와 가족을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내 22년 만에 죽었다고 여겼던 아들을 만난 아버지와 22년 동안 한순간도 잊지 않고 아버지를 그렸던 아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목을 어긋맞춰 안고 얼마 동안 울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어긋맞춰 안다’는 것은 ‘포옹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넘어지다, 눕다, 엎드러지다’의 뜻입니다. 특히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만나서 안고 울었다 정도가 아니라,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넘어지고는, 자신들이 넘어졌는지 알지도 못하고 안고서 울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뒹굴며 ‘한참(for a long time)_얼마 동안의 문자적 의미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족하도다

이 말은 야곱의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야곱에게 자신의 지난 모든 세월이 가치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과 같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역사해 주셨음을 알려주는 증명서와도 같았습니다.

요셉은 울음을 그친 야곱과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1-34) 요셉이 그의 형들과 아버지의 가족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버지의 가족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들이라 목축하는 사람들이므로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요셉은 22년 만에 가족을 만난다는 흥분된 감정에 휩싸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오기 전에 가족들이 머물러야 할 곳을 이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내려오면 자기 상전인 바로왕에게 알현을 시켜야 하는데, 그때 해야 할 말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가족들에게 자기가 먼저 바로왕에게 가족들을 소개하면서 ‘우리 가족은 목축하는 목자들이기 때문에 양과 소와 같은 짐승들을 끌고 왔다’라고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고센 땅에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숙한 삶과 성숙한 인격을 가긴 사람은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신실하게 감당합니다.
당시 애굽에서도 ‘목축’은 굉장히 천하게 여김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래서 34절에는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긴다’라고 합니다. ‘가증히 여기는 것’의 문자적인 의미는 ‘토하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도 목축하는 역겨운 것을 보지 않아도 되니까 야곱의 가족들을 따로 살게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았던 것입니다.

바로왕 앞에 선 야곱(47:1-12)
마침내 야곱의 가족들은 바로왕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1-2)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와 내 형들과 그들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가나안 땅에서 와서 고센 땅에 있나이다 하고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을 택하여 바로에게 보이니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묻되 너희 생업이 무엇이냐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바로왕을 알현한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그들에게 일러주었던 말, 즉 자신들은 목자라는 것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모두 바로왕을 만나게 하지 않고 그중에 ‘5명’만 뽑아서 만나게 했습니다. 숫자 ‘5’는 애굽에서 아주 존중된 숫자, 완전수로 여기는 숫자였다고 합니다. 43:34절에 보면, 형제들이 두 번째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이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동생 베냐민에게는 5배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최고의 대우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돌아갈 때 요셉은 다른 형들에게는 옷을 1벌씩 주었지만, 베냐민에게는 5벌을 주었습니다.
요셉이 형들 중에서 5명을 뽑은 것은 애굽 사람들이 5자를 존중하기 때문에 5명이면 충분히 가족들을 대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5명은 누구였겠습니까? 성경이 그 이름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2절의 ‘그의 형들 중 다섯 명’에서 ‘중’의 의미가 ‘끝, 가장자리’입니다. 그러니까 1-5째(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가 아니면, 6-10째(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였을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 바로왕에게 자기 가족은 밋밋한 사람들이기에, 이 애굽을 결코 넘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우리 가족은 지극히 평범합니다”라는 것을 잘 설명하는 쪽을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형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4)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양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 곳에 거류하고자 왔사오니 원하건대 종들로 고센 땅에 살게 하소서

형들은 자신들이 온 목적을 분명히 밝히는데, 기근 때문에 양들에게 풀을 먹일 곳이 없기 때문에 왔고, 이곳에 뿌리박고 살기 위함이 아니라 ‘거류(居留)_남의 나라 영토에 머물러 삶-임시거주’하기 위해서 왔다고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고센에 살게 해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고센은 애굽의 변방이자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 동편에 있던 지역으로 홍해로 이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라암셋’이라고도 했습니다(11절). ‘고센’은 지방 이름이고, ‘라암셋’은 지역(도시) 이름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곳은 기름진 곡식이 나오는 애굽의 좋은 땅이었고, 요셉이 거주했던 곳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고센은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야곱의 가족들이 농사를 지어 먹고살기도 좋았고, 요셉이 거주했던 곳과 가까워서 왕래하기도 좋았고, 애굽의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수 백 년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을 하는 데도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살기에 애굽에 이보다 더 좋은 땅은 없었습니다.
요셉은 초강대국의 총리로 있었을지라도 자기 집안 식구들이 언젠가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늘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바로왕은 요셉의 형들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5-6)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그들 중에 능력 있는 자가 있거든 그들로 내 가축을 관리하게 하라

바로왕은 고센에 머무르게 해달라는 요셉의 형들의 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요셉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7년의 풍년은 물론 7년의 기근 중에서 2년을 잘 이겨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의 가족을 잘 대해주는 것은 요셉의 뛰어난 통치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은 야곱 가족들의 고센 거주뿐만 아니라 형제 중에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왕실의 가축을 관리하는 것도 허락했습니다. ‘관리하게 하다’의 문자적인 뜻이 ‘우두머리가 되게 하다’입니다. 혹 형제 중에서 역량 있는 사람이 있으면, 애굽의 관련 부서 공무원이 되게 하는 것도 허락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로 하면 “형제 중에서 뛰어난 사람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안 되지만 ‘축산정책과장’ 정도는 시켜도 좋다”는 의미였습니다. 정말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그 후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바로왕과 대면하게 하여, 야곱이 바로왕을 위하여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자 바로왕은 야곱에게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라고 질문하자 야곱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우리 말에 자신의 나이를 겸손하게 낮추어서 표현할 때 ‘개나 말의 이빨’이라는 의미로 ‘견마지치(犬馬之齒) 또는 ‘개나 말의 나이’라는 의미로 견마지년(犬馬之年)’이라고 합니다. 지금 야곱은 자신의 생애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지금 자신의 나이가 조상들에 비해서는 젊은 130세이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175년을 살았고, 아버지 이삭은 180년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나이로 하면 할아버지보다는 45년을 덜 살았고, 아버지보다는 50년을 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는 조상들보다 훨씬 더 거칠었다고 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그의 삶을 살펴온 바와 같이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11-12)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셋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또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과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먹을 것을 주어 봉양하였더라

요셉이 가족들이 거주할 곳으로 정한 고센(라암셋)은 ‘애굽의 좋은 땅’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장 좋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바로왕에게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험악한 세월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인식하게 해 주었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세우게 해 주었으며, 바로왕을 축복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돌아보면, ‘험악한 세월’이라고 여겨지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 험악한 세월이 몇 주간, 몇 개월처럼 짧은 기간이기도 하고, 수년간 또는 수십 년이라는 긴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 기간이 얼마이든지 간에 그 기간으로 인해서 우리도 하나님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우리의 믿음이 이전과 다른 곧은 길을 가게 해 주었으며,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을 이해하고 품어줄 줄 아는 넉넉한 인격의 소유자로 만들어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험악한 세월은 결코 험악한 세월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험악하게 보였던 세월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을 붙잡게 하여 준 하나님의 은총과도 같습니다. 그 은총을 누리기 위해 오늘도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날로 살아가십시다.

기 도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인생은 다 처음 걷는 길이라 참 쉽지 않습니다. 또한 누구도 가 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라 앞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길이 쉽지 않아서 과거에는 불평과 불만을 많이 터트렸는데, 지나고 보니 인생길이 쉽지 않아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혹 우리가 앞으로 걷게 될 길이 쉽지 않을지라도, 험악한 세월이라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는 은총의 세월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의 길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집으로 가꾸어 가기 위해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야곱과 요셉은 22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어서 지난 삶이 정리되었습니다. 당신의 인생길에서 과거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세월이 지난 후에 이해가 되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때 무엇을 깨달으셨습니까?
2. 요셉은 가족들을 만나기 전에 살아야 할 곳과 바로왕을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미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준비’가 ‘은혜’입니다. 당신의 제대로 준비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3.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지난 삶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시겠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눈을 들어 하나님을 목적 삼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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