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188장 ‘무한하신 주 성령’
앞선 본문에서 요셉은 아직 흉년이 오 년이 남았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를 봉양하고 싶다고 하며 형제들에게 아버지 야곱을 모셔 올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큰 구원 계획에 의해 먼저 보냄을 받은 것이라고 밝힙니다. 오늘 말씀은 형제들이 돌아가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내용까지를 다룹니다.
애굽땅으로 이주 제안(16-24)
(16)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와 신하들이 기뻐했다고 전합니다. 참으로 가슴 뭉클한 말씀입니다. 요셉은 애굽 온 땅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노예로 잡혀 와 감옥살이하던 어느 외국 청년이 그 높은 자리에 올라간 순간 얼마나 시기하고 멸시하는 눈초리가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그의 울음소리가 궁중에 들리고,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어갔을 때 바로뿐 아니라 그의 신하들이 모두 기뻐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든지 우리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 동등한 사람, 낮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게 좋은 소식이 있을 때 주위 모든 사람이 내 마음과 같이 기뻐해 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윗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지만 동료나 아랫사람에게는 사랑받지 못하거나, 동료와 아랫사람에게는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지만 윗사람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하지만 요셉은 드물게도 윗사람과 동료 및 아랫사람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이 지난 세월 동안 자신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원하도록 보내신 하나님의 소명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흉년으로 죽어가는 모든 이의 육적 생명을 구원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더 나아가 자신의 형제와 앞으로 이어질 메시아의 계보를 유지하는 영적 생명의 보존자가 되는 역할 역시 자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 지점입니다. 우리 역시 어느 자리에 있든지 생명을 증진하고, 생명 살리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죽으려는 자를 살리고, 사람 죽이는 사회를 사람 살리는 사회로 바꾸고, 모든 생명체가 함께 잘 살며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로 인도하는 일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돈 많은 그리스도인, 높은 자리에 있는 그리스도인, 말 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렇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세상 일에는 능통하지 못해서 돈이 없고, 건강이 없고, 힘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쓰며 자기 생명력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에게서 하나님을 느낍니다. 주위 모든 지역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요셉은 자신이 거하는 곳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사회에서 작지만 자신이 지키고 있는 자리를 생명의 보금자리로 만들고, 다른 이의 슬픔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다른 이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즐거워한다면 다른 이들도 우리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17-20) 바로는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이렇게 하여 너희 양식을 싣고 가서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이제 명령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바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명합니다. 양식을 싣고 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모든 가족을 데리고 오라고 하면서 애굽의 좋은 땅을 줄 것이고, 애굽 땅의 좋은 것은 다 그들의 것이 되리라고 공언합니다. 이러한 처사를 볼 때 요셉이 당시 바로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요셉의 공헌이 그만큼 크기도 했겠지만, 그 처신이 얼마나 바로에게 인정받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의 생활과 정신에 모든 것을 맞췄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들며 하나님의 꿈을 소중히 간직하면서도 주어진 관계와 일 가운데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애굽처럼 이방 나라와 같은 관계와 자리에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이나 다니엘을 비롯한 성경의 인물들과 믿음의 선배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있지만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에게 입증하셨습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요셉이 그랬듯이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인생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합니다. 또 슬프게도 요셉처럼 이 땅이 말하는 성공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신실함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온 애굽땅의 좋은 것이 우리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천국의 좋은 땅과 기름지고 좋은 것은 분명히 우리의 것이 됩니다.
(21-24)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그가 또 이와 같이 그 아버지에게 보내되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실리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드릴 곡식과 떡과 양식을 실리고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말 그대로 금의환향입니다. 형제들에게 좋은 옷을 주고, 음식뿐 아니라 애굽의 진귀한 온갖 물품을 함께 실려 고향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옷을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요셉에게는 더 이상 형들에게 앙금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옛적 형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던 대상인 옷을 통해 그들이 저지른 죄악상을 기억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철없이 자랑하면서 형들의 분노를 일으켰던 그 물품을 이제는 함께 누리자고 하면서 형제 사이에 있던 모든 응어리가 해결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의 왜곡된 사랑으로 인해 모든 형제가 겪어야 했던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변 사람들과 갈등이 초래된 결정적인 사건이나 대화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의 상처 입은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자신이 당한 모든 악을 선으로 갚아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고귀하고 멋진 그리스도인의 형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꼭 들어야 할 말, 내가 꼭 손에 넣어야 할 무언가가 있습니까? 그것이 전제 조건이 되지 않으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곱씹고 곱씹는 것이 있습니까? 요셉은 오히려 형제와 자신을 갈라지게 만들었던 옷을 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마음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 가능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받지 못해 서운한 그 무엇이 있을지라도 그 얽매임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나도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라고 결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주님은 우리의 옛 사람을 벗겨주시고 새 사람으로 입혀 주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새 사람으로 옷 입고 다른 이를 옷 입히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흥미로운 부탁을 합니다. 바로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는 당부였습니다. 형제들이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요셉을 유기했던 사실까지 밝혔는지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50장 17절을 보면 야곱은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언젠가는 그들이 행했던 죄악이 밝혀졌을 것입니다. 이들의 행태는 아마도 고대 근동판 그것이 알고 싶다의 주제로 적격이었을 것입니다. 22년 후에 밝혀진 진실. 그날 요셉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정도의 제목이 가능할 듯 싶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요셉은 살아 있었습니다. 모든 정황은 요셉의 사망을 가리켰지만, 증거는 모조리 위조된 것이었고 범인들은 뻔뻔하게도 20년 이상 비밀을 묻은 채로 지근거리에서 아버지를 기만했습니다. 이제 돌아가 요셉이 살아있음을 알려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자 형들은 야곱에게 또 베냐민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느냐를 두고 갑론을박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가 더 잘했느니 못했느니를 따지다가 다툴 여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한 다툼이 불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모든 일을 인도하셨으니 앞으로 화목하자는 취지입니다. 요셉의 지혜와 마음씀씀이가 어디까지 미치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25절 말씀에서 형들은 야곱에게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말만 하는 걸로 볼 때 아마도 그 자리에서 모든 진실을 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이 가족은 유지됩니다.
야곱의 결정: (25-28)
(25-28) 그들이 애굽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아버지 야곱에게 이르러 알리어 이르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그들은 야곱에게 가서 요셉이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했습니다. 야곱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소식이기에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야곱은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로 요셉의 상실을 억지로 상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 총리에 대해 감정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요셉이 애굽 총리였다니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의 말을 의심하던 야곱도 애굽에서 온 진귀한 수레를 보고 그들의 말이 참임을 믿고 기운이 소생하였습니다. 그 수레는 애굽의 의전용 차량이나 전세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명 그 수레는 형제들이 살 수도, 만들어낼 수도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러자 이제 야곱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표현을 합니다. 족하도다! 야곱의 삶은 이 한마디를 향해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을 할 때에 성경은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기록합니다. 무엇이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던 그 야곱이 이제야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 많은 상실과 아픔의 기억으로 점철된 험악한 나그네 세월이 이 한마디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족함을 느낄 때 그는 진정한 이스라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족하다고 고백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야곱은 자기 아들 요셉을 잃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이 귀하기에 자신의 품에 끼고돌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아들을 더 귀한 아들로 만들기 위해서 앗아가셨습니다. 야곱에게서 요셉을 앗아가시고 요셉에게서 가족을 앗아가셨기 때문에 요셉은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야곱과 형제들도 진정한 가족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요셉을 야곱에게서 잠시 거두지 않으셨다면 이 형제들은 이스라엘의 기초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께 왜 내게서 이것을 앗아가십니까? 라고 따지며 괴로워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대상은 건강이 될 수도 있고, 물질이 될 수도 있고, 관계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대상을 우리에게서 순간 앗아가신 이유는 더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가장 궁극적으로 십자가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죽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든 죽지 않고 십자가를 피하려고 애를 씁니다. 거기 못 박히면 내가 죽어 없어질 것 같고, 모든 자유와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 같고, 내 계획이 어그러질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를 지고 거기에서 죽으면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고 진정한 생명을 주셔서 더 깊은 자유와 즐거움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리둥절합니다. 아 하나님께서 생명을 뺏으신 게 아니라, 더 좋게 해 주셨구나,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았구나 하고 말입니다. 지금 고통으로 신음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기쁨으로 어리둥절하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기 소원합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에, 또 야곱이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 역시 지금까지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어령 전 양화진 원장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 지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남기신 인터뷰에서 모든 게 선물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선물이었고, 생명을 포함해 자신의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것이 다 선물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중에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것을 앗아가고 저것을 앗아가느냐고 묻습니다. 야곱 역시 그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곧 깨닫게 됩니다. 족하도다! 그것이 내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그것을 더욱 좋게 만드셨구나. 족하도다! 하고 말입니다. 우리 삶에 족하다고 고백하게 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오늘 하루 험악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생명 살리는 일에 충성하는 우리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 소유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은 내게 속하지 않았음을 봅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며, 비록 하나님이 거두신다고 할지라도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임을 신뢰하게 하시옵소서. 야곱의 가정에 상실과 고통을 주심으로써 더 나은 가정이 되게 하심같이 우리 가정에도 우리를 통해 회복의 은혜가 있게 하시옵소서. 우리 앞에 주신 십자가를 담담하게 지고 죽음을 맞이하면 오히려 살게 하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족하도다! 고백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기뻐할 때 내 주위 사람들은 나와 같이 기뻐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생명 살리는 일에 더 힘써야 할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2. 요셉이 형제들에게 옷을 준 것처럼, 내가 회복을 위해 기꺼이 주위 사람에게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그렇게 할 마음이 있습니까?
3. 우리에게는 다투기 원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내게 다투려고 하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마음을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묵상해 보십시오.
4. 하나님이 무언가를 앗아가셨다고 느꼈지만 후에 더 좋게 만드신 것을 보고 족하도다 고백했던 일을 묵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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