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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9:49-62

누가복음 9:49-62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너희를 위하는 사람(49-50절)
24장으로 구성된 누가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1-3장인데, 세례자 요한의 부모와 그의 출생, 그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와 구주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가정(家庭) 그리고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서로 번갈아 펼쳐집니다.
두 번째 부분은 4장-9:50절까지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부분인데,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신 일과 말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세 번째 부분이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9:51-19장까지인데,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이르시기까지의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시기적으로는, A.D. 29년 가을부터 이듬해인 A.D. 30년 봄까지의 6개월 동안, 그리고 장소적으로는 이스라엘 중부 동쪽, 베뢰아 지역과 남쪽 유대 지역에서 행하신 일과 말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 부분이 20-24장으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일과 말씀, 그리고 고난당하심과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6개월 남겨놓은 시점인데, 3가지의 일어난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9-50절은 누가 우리를 위하는 사람인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9)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당신이 고난당하실 것과 부활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들었음에도, 예루살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꿈만 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는, 이런 아이와 같이 연약한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역설의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요한이 말꼬리를 돌렸던 것입니다. 마치 요한의 이 말은 “예수님! 큰 사람에 대한 가르침보다 훨씬 더 다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 교훈은 나중에 하시고 이 문제부터 대답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요한의 이 말은 지역사회가 재난을 당해 일손이 필요하여 거기로 달려갔는데, 먼저 온 사람들이 “당신들은 다른 데로 가시오!”나 “당신들은 다음에 또 이곳이 재난을 당하면 그때 오시오. 이곳은 우리만 있어도 충분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요한은 종교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관한 한 자기들이 큰 자라는 것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처럼 12제자로 불러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사람도 많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칫하면 요한과 같은 오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자기만이 하나님 역사의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마리아 마을의 거부(51-56절)
51-56절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의 일행을 거부하고 배척한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이때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약 2년 반이 지났을 때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을 때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심지어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성인 남자만 해도 5,000명을 배불리 먹게 하셨을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예루살렘이 있었고, 거기서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마음을 굳게 결심하셨다고 증거합니다.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님께서는 홀로 예루살렘을 향하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만 해도 12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여인도 있었고,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 70명의 사람을 둘씩 짝을 지어서 보내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이 정확하게 몇 명인지는 성경에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수십 명은 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먹고 자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발대를 사마리아 지방의 한 마을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통행이 순조롭지가 않았습니다.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가 사람이 많기 때문이거나, 피해받기가 싫다 등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단지 예루살렘을 목적지로 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700년이나 되는 긴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이 처음에 예수님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도 동일했습니다.

그때 제자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야고보와 요한은 성격이 아주 급했기 때문에 그들의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산 위에서 보았던 일,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가 함께 예수님의 별세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아하시야왕이 엘리야 선지자를 잡기 위해서 군인 50명을 보냈는데, 엘리야 선지자가 오십 부장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당신과 당신의 부하 쉰 명을 모두 태울 것입니다.”라고 했었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50명을 모두 태우고 말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때처럼 하나님께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해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응징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자기 열심에 빠지다 보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 쉽습니다. 왜 자기가 가진 생각에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미숙해서 일 수도 있고, 상대가 성숙하지 못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하는 일을 자녀들이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아이들의 생각을 어른들이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럴 때는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지혜입니다.

두 제자의 어리석은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5-56)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꾸짖으시고’에 작은 숫자로 ⑴이 있고, 아래에 각주(脚註)를 보시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어떤 고대 사본에는, 55절 끝에 다음 말이 있음. ‘이르시되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
무력을 통해서 상대를 제어하려고 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을 통해서 가셨는데, 때때로 인생의 길이 막히면 돌아서 가는 것이 지혜이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정면돌파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서 가는 일도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57-62절)
57-62절은 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주신 답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주 열심을 가진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심을 다해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나름대로 계산한 후에, 주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더 이익이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 계산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모르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마치 동문서답같이 들립니다. 이것은 ‘제자가 되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서기관’이라고 합니다. 서기관은 성경을 베끼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한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전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런 분이라면 내가 평생 따라다녀도 먹고 사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혹시 저분이 왕이 되신다면, 1등 공신은 제자들 차지가 되더라도, 2등 공신은 될 수 있겠다”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의 속내를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 길은 단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경제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고, 또 외로울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답변이 이러하였습니다.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이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친 후에 따르겠다며 하락하여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이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인륜을 거스른 듯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례식은 모든 일에 우선합니다. 아무리 중요한 만남이라고 할지라도 아버지의 장례식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장례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당시 유대의 풍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부친이 별세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의 진의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집을 떠날 수가 없고, 그것은 몇 년 후가 될지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즉 핑계를 대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또 이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내면에는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유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허락해 달라”는 것은 “제 아버지에게는 제게 줄 유산이 있는데 그것을 받고 난 후에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이 뭔가를 쥐고 있어야 대접을 받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자리에 있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또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답변은 이러하였습니다.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그는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으니, 허락해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답변이 이러하였습니다.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작별 인사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밭을 갈 때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며 갈면 이랑이 바르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농부가 바르게 밭을 갈기를 원한다면 정면을 봐야 합니다. 그것도 움직이는 소꼬리가 아니라 정면에 움직이지 않는 한 지점만 보고서 갈아야 바른 이랑이 만들어집니다.
때로 신앙생활에서도 아주 중요한 결정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 스스로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변의 눈치를 보면, 바른 결정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때에는 사람의 눈치가 아니라 주님의 눈치를 보셔야 합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과 예수님께서 부르신 두 사람은 물론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본질이 진토에 붙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들과 세속적 가치관을 자신의 힘으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에 진정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속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진토에 붙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과 슬픔의 눌림으로 녹아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잊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에 붙어,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살림을 받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힘으로 여기고,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자기 야망과 자기감정에 빠져서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를 때가 더 많았음을 고백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배부름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겠노라 말한 사람과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서 예수님을 따르겠노라 말했지만, 유산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돋보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에 예수님을 따르겠노라 말한 사람은 모두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속적 욕망을 자기 힘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얼굴이 비침을 고백합니다.
바라옵나니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주님의 말씀에 붙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시는 것을 경험하는 복된 한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침묵이 지지로 다가온 일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2.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내내 예루살렘을 향해 굳은 마음을 갖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신앙생활을 지탱해 주는 굳은 결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지켜가고 있습니까?
3. 예수님을 따르겠노라고 하면서도 따르지 못한 사람과 예수님의 부르심에도 따르지 못한 사람은 그 마음에 다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 주님을 중심으로 따르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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