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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9:18-36

누가복음 9:18-36
찬송: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복음의 십자가 (18~27)
신앙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지적 작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 인생의 전환이며 개혁이고, 인간의 지정의(知情意)는 물론 삶과 행동 양식 전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로 주어진 신앙이 견고하지 못하고 흔들리기도 합니다. 신앙 한 이후로 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들만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과 곤고한 상황에서 답을 찾지 못할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시험과 고난이 연속해서 찾아올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약해집니다.

흔들림 없는 견고한 신앙은 강도 높은 신앙의 훈련과 성경공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예배만으로도 이루어지는 것 역시 아닐 것입니다. 견고한 신앙은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과 교제를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나의 삶과 영혼을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며 자성하고 돌아보는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숨인 말씀을 깊이 들이마셔 우리 마음의 공간이 넓어진 상태에서 나의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의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날마다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제자들을 교실에 앉혀놓고 수업을 하시거나, 성경을 암송하게 하신 기록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이해 못 해도 성령님께서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며 재촉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주님은 제자들과 일상의 생활을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날이 밝기 전 이른 새벽에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모든 사역의 출발은 기도여야 함을 알려주셨고, 세상이 터부시하던 세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말씀을 전하심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부정하다 이야기하던 병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대시며 참된 치유와 회복이 무엇인지 몸소 보이셨고,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영적인 권세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보여주신 것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 안에서 제자들과 충분히 질문하고 토론하며 대화를 나누셨고, 그대로 행하게 하셨습니다.

앞서 나눈 누가복음 8장에 군대 귀신 들린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주님께 치유함을 받고 난 이후, 수치스럽던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을 떠나 주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군대 귀신 들렸던 이에게 자신의 과거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고향, 마을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생명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가까운 사람들, 고향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함을 알려주심으로, 그 자신 역시 날마다 생명이 재창조되게 하셨습니다.
(눅 8: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셨는지를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다음에 등장하는 혈루증 여인 역시 부정함으로 마을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던 자신의 형편과 소원을 말하지 못하고, 믿음만 가진 채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 사정을 모르시지 않는 주님께서 여인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갑자기 모든 무리들을 멈추시며, 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용기 있게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의 모두와 함께 은혜를 나누게 하십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과 영의 호흡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작용이나 순간적 체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을 통해 말로 정리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눅 8:47)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하니

오늘 본문의 장소는 동일 본문 마태복음 16장과 마가복음 8장에서 ‘빌립보 가이사랴’라고 했습니다. 2019년 안식일 기간 성지순례 중 빌립보 가이사랴에 방문했습니다. 이스라엘 최 북단 헬몬 산에 위치한 이 지역은 성지순례 중 메마른 광야와 사막만 지나던 저에게 마치 우리나라의 푸르른 산속과 강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곳에는 큰 황제의 신전 터와 ‘판’신을 숭배하던 성전 터가 있었습니다. 분봉왕 헤롯 빌립이 이곳을 수도로 삼아 로마 황제에게 바친 도시였음에 손상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풍요로운 자연과 웅장한 성전은 현재 터만 남았음에도 방문한 저에게 그 위용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를 지나가시며,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주님은 제자들에게 왜 물으셨을까요? 제자들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따르는지 몰라서 물어보신 것은 아닙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끌어내시기 위한 질문입니다.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물질의 논리, 지배의 논리, 황제의 논리가 가득한 그 도시 한가운데 초라한 행색의 주님을 향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말한 베드로의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초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향해있기에 가능한 고백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그 행동이 그의 신앙과 믿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포장하고 감추어도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행동에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열매로 그들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마 7:18,20)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야고보와 요한처럼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함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합니다. 청탁, 편법, 거짓은 말할 것도 없고 자리만 차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 생각하며 메시아로 인식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주님의 제자답게 삶을 십자가로 그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그제서야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알려주십니다.
(22-23)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의 물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에 우리는 이미 행동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져야 할 제 십자가는 무엇이겠습니까? 흔히들 자기 십자가라 하면 나를 괴롭히는 그 무엇이라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 속 썩이는 자식 등이 그 예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규정하는 기준이 나의 괴로움일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십자가는 타자를 위한 희생입니다. 타자를 위해 나를 부인하고 목숨을 버리는 것이 십자가이기에, 십자가는 자기 괴로움이 아니라, 자기 부인이며 자기 포기입니다.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셈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마지막에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버렸느냐로 판단하십니다. 화려함과 명성의 도시 한가운데 십자가로 향하는 주님을 향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그 영광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십자가를 메겠다는 각오이기도 합니다. 모두가 화려함과 웅장함을 따라갈 때에 초라한 행색의 주님을 따르는 것, 모두가 면류관을 선택할 때에 주님처럼 십자가를 선택하는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제자는 어쩌다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희생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며, 남들이 다 하는 그것을 하지 않고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는 길로 가기 위해 날마다 처절한 싸움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주님이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셈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말씀으로 호흡함을 잊지 않는다면, 수치스럽게 세상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고난의 십자가를 선택하며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삼으며 그의 나라를 꿈꿀 수 있습니다. 그런 참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 나라를 보게 하십니다.
(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영광스런 변화와 하늘의 선포(28~36)
28절부터는 산 위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산, 구름, 영광, 모세, 음성, 광채가 났다는 이 이야기의 키워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출 24:1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네가 그들을 가르치도록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모세가 그의 부하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모세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 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지니라 하고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 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엿새 동안 산을 가리더니 일곱째 날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

시내산에 오르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종살이하며 고통에 허덕이던 백성이었다면, 말씀을 받고 난 이후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불순종을 습관처럼 하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사람들이었다면, 이제는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하늘의 음성으로 예수님을 증명한다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받으심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세례 받으심이 사역을 준비하는 것으로서의 세례라고 한다면, 변화산 사건은 사역의 확증으로서의 변모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구약,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신약, 영광과 소통으로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인 십자가, 그리고 구름 속에서 아들 예수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나타납니다. 본문 안에는 인류 전 역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려가시는 큰 구원의 계획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그 상황이 어찌나 영광스러웠던지 베드로는 자기도 알아듣지 못할 말로 고백합니다.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초막을 짓고 여기에 살겠다는 베드로에게는 세상의 저급하고 지저분 한 것은, 산 위의 영광과 거룩함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화산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우리 신앙의 목적이 영적인 황홀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가 나눈 대화의 주제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황홀경인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 뒤에 거룩한 희생, 생명을 위한 죽음, 구원을 이루기 위한 피 흘림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초막을 짓겠다는 베드로를 데리고 서둘러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31절의 우리말 ‘별세’의 헬라어는 ‘엑소더스’입니다. ‘엑소더스’의 의미는 ‘죽음, 떠남’을 의미하며 구약에서는 ‘출애굽’을 의미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죽음’이 영적인 의미에서는 ‘출애굽’입니다. 문자적 의미의 ‘떠남’이, 영적 의미의 ‘출발’입니다. ‘죽음’을 의미하지만, 영적인 ‘출생’을 나타냅니다. 주님에게 ‘별세’는 이 땅의 사명을 다하고 하나님으로 돌아감이었습니다. 그 마침 점까지 달려가실 주님을 향해 구름 속에서 난 하나님의 소리는 ‘택함을 받은 자’이니 그 말을 들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35~36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택함을 받은 자’는 곧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셔서, 제자들과 공생애를 보내신 후 이제 제자들을 보내시는 분이 되십니다. 그 확장의 길을 기도하심으로 가고 계십니다. 주님은 매우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하셨습니다. 본문의 첫 시작도 주님께서 따로 기도하심으로 시작합니다. 기도로 시작하시는 주님께서 기도로 세우신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제자는 예수님의 사역 마침 점인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베드로처럼 영적인 황홀경에만 머무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기도의 자리에만 있고, 예배의 현장만 목말라하는 것으로는 세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침 점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영의 호흡인 말씀을 깊이 들이마심으로 바르게 신앙고백하십시다. 영적인 충만함으로 마음과 사역을 확장시켜, 참 생명과 참 죽음인 우리의 달려갈 길을 마치기 위해 오직 주님만 바라보십시다. 그럴 때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우리에게도 보여주실 것이며, 변화산 위의 영광이 그대로 우리 삶에 내려올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세상의 열매들을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합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에 우리의 마음이 현혹되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굳게 닫힌 입술을 열어 주님을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저마다 짊어진 십자가 더욱 굳게 붙들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걷는 그리스도인이기 원합니다. 산 위의 영광만 쫓지 않고 산 아래의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백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역시 보냄을 받은 자로 가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곳에, 엎드려야 할 곳에서 영광을 기다리며 인내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신앙이 약해질 때마다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나가는지 생각해봅시다.
2.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에 나의 언어로 고백해봅시다.
3. 나의 자기 부인과 자기 포기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4. 내 신앙이 ‘엑소더스’하기 위해 과감하게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이며, 목적해야 할 곳은 어디인지 묵상하며, 결단하는 기도를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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