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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0장 1-16절

누가복음 10장 1-16절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기약을 떠올리시며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가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길 굳게 결심하셨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출입을 거부했고 예수님이 부르신 많은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가며 그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이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뜨거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런 하나님을 향한 우리 인간들의 죄악과 무관심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며 오늘 예수님께 보내주신 70인의 사람들을 통해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잠든 영혼을 깨우시기 원하셨습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칠십 인 파송과 훈련(1-9절)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을 따라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칠 십 명의 사람들을 둘씩 짝을 지워 친히 지나가실 곳에 미리 보내십니다.
(1-2)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예수님의 사역은 점진적 확산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룩을 넣은 반죽이 부풀듯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에게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파송하여 사역을 하게 하시고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칠십 명의 사람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훈련하고 사역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처음에 혼자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점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권위와 사역을 이양하고 계십니다. 이는 떠날 기약이 가까워짐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역을 할 때 007 제임스 본드 형이 있고 유모 형이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제임스 본드 형을 주목합니다. 혼자 다 헤쳐가기에 사람들의 박수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고 나면 공동체는 큰 타격을 받습니다. 유모 형 같이 다른 사람들을 키우고 함께 성장하는 사역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열매도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라지고 시간이 지나면 싹이 트고 열매가 맺어 공동체가 더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현재 맡겨진 소임을 잘 감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남기는 사역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뒤에 사람을 남기셨고 그들을 통해 초대교회를 이루어 나가셨고 세계 복음화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사람을 남기는 사역은 힘들고 더디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혼자 걸어가신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시며 자신의 사람을 세워가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 걸어갈 동역자들을 세워나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언젠가 떠나가야 하는 그 순간 미소 지으며 그 자리를 기쁜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칠십 명의 사람들을 파송하시며 자세히 사역의 세부지침을 알려주십니다. 3절에서 9절입니다.

(3-9)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오늘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사람들에게 전대,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여행을 떠날 때 캐리어와 짐을 통째로 잃어버렸다면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막막함과 절박함이 절로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훈련을 시키셨겠습니까? ‘믿음의 훈련’을 단단히 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인생에 때론 경제적 파산을 당하기도 하고 건강이 바닥을 치기도 하고 자녀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거나 배신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 사방이 막혔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에서 애굽의 군사들이 쫒아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넘실대는 상황에 처해 절망에 빠졌을 때 모세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내 힘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보았지만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 우리는 가만히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타나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칠십 명의 제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신 것은 일반적 상황이 아닌 전도훈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삶에 내 힘으로 풀리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다 느껴지신다면 함께 위를 바라보십시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신뢰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나아가십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만 챙기지 말라고 하셨을 뿐이 아니라 방문한 그 집에서 주는 것을 먹고 마시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도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생존을 위한 욕구가 강합니다. 전도 여행을 위하여 짐을 챙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생존의 욕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생존을 넘어 ‘더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우리 ‘육신의 정욕’을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었습니다. 예전에 우리나라가 먹고 살기 힘들 때는 사람들의 소망이 그저 때를 굶지 않는 것 또는 생일에 하얀 쌀밥에 고기반찬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대인은 그때보다 더한 ‘육신의 정욕’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예전 임금님이 먹던 수라상은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수많은 맛 집과 음식들이 즐비합니다. 우리의 몸을 더 편안하게 만들어줄 수많은 가전제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상들이 나옵니다. 경치 좋고 살기 좋은 집들이 넘쳐납니다. 물론 좋은 집에 살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물건을 사용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족을 넘어 탐욕의 자리까지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육신의 정욕에 매인 사람이 되고야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방문한 그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도 있고 좋은 방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반대로 형편없는 음식을 줄 수도 있고 헛간 같은 방을 줄 수도 있겠지만 환경에 매여 더 좋은 집, 좋은 음식을 대접하는 가정으로 옮겨 다니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집중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내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세상의 성공이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냐?’ 라는 질문입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자리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성공, 반대로 고난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사명의 자리를 놓고 고민할 때에 우리 내면의 유혹은 너무 커서 브올의 아들 발람처럼 주님께 받은 사명은 아예 보이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는 그 유혹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귀를 통해 발람의 영혼을 깨우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영혼을 말씀으로 깨우시고 다시금 우리가 사명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시기에 우리는 다시금 소명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이 성공에 눈이 멀어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우시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에 담는 회복의 시간되시길 축언합니다.

영접하지 않는 동네(10-16절)
예수님께서는 칠십 인의 의식주에 대해서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대처행동매뉴얼을 주십니다. 10절에서 12절 말씀입니다.
(10-12)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파송된 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동네에 가게 되거든 그 동네를 나와서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고향과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발에 붙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거룩한 곳에 부정한 땅의 먼지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표현이며 하나님의 백성과는 상관없는 땅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칠십 인의 사람들에게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신 것은 영접하지 아니한 동네 사람들의 피 값에 대하여 무죄함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려 사람을 보내셨지만 그것을 거부함으로 당해야 하는 죄 값을 그들 스스로 치루어야 함을 의미하며 스스로 전도자들을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나라와도 상관없는 곳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의 수많은 이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동네들에게 화를 선포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13-16)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본거지였던 갈릴리 지방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그토록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수많은 이적들을 행했던 갈릴리 북부지역에 위치한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이 동네들은 정작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앙의 자리에 머물러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마을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고 맹인의 눈을 치유해주셨고 백부장의 하인과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셨고 들 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이적을 보이셨지만 강퍅한 그들의 마음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셔야 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내 주위 사람은 전도했는데 정작 내 가족과 친척이 예수님 믿기를 거부 할 때,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데 정작 내 자녀는 교회를 나오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미어지고 나의 기도가 부족함 때문인지, 내가 본이 못되어 그런 것인지 자책합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셨음에도 받아들이지 않은 동네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전한 복음이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아님을 알려줍니다. 혹 내가 가족과 친척에게 본이 되지 못하여 걸림돌이 된 것은 아닐까, 내 삶의 연약함으로 내 자녀가 교회를 떠난 것은 아닐까 죄책감에 눌려 있는 분들이 있다면 우리 마음의 발에서 죄책감의 먼지를 떨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칠십 명의 사람들에게 발에 먼지를 떨라고 하신 까닭은 그들의 피 값을 너에게 묻지 않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믿지 않는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정도의 신앙인이라면 그 사람 때문에 가족이 신앙을 등지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수많은 이적과 증거를 보여주셨던 이 세 동네는 마지막 심판 때에 불과 유황으로 멸망했던 소돔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15절에 가버나움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가버나움은 지역 주민들이 부요한 곳은 아니었지만 지금보다 예수님 당시 활발한 무역과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무역이 발달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무역도시의 모습을 제법 갖추고 세관과 로마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옛날 마포가 한강을 이용한 수상교통의 중심지였고 어촌이 형성되어 있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런 여러 지역적 이점들이 가버나움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방을 사역의 거점으로 삼으신 것은 그 도시들이 화려하고 부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많았고 사람들의 유입이 많아 복음전파에 용이했기 때문이며 이방나라들과 근접해 있어서 혼혈인도 많아 전통유대인들이 무시하는 지역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두운 동네에 큰 빛으로 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마음을 높여 하늘에까지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의 강남 같은 곳이 아니라 떠오르는 개발지역으로 앞으로 더 부요하고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지역이 될 것이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교만함을 말씀하시며 음부에까지 낮아질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실제로 가버나움은 약 7세기에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퇴락의 길을 걷게 되어 사람이 살지 않는 동네가 되었다가 천 년간 잊혀져 자취를 감추었다가 1838년 미국 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의 성지탐사로 인해 발견되게 됩니다. 말 그대로 음부에까지 낮아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버나움은 우리의 교만함을 보여주는 거울이 됩니다. 잘난 것이 없음에도 잘난 척 하며 수많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완악한 마음으로 거절했던 우리의 영적 교만함을 가버나움을 통해 봅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통해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심에도 여전히 마음을 닫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간 가버나움을 향해 애타게 외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마음에 그 말씀을 담아보십시다. 빙산이 내려온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의 배라는 교만함으로 나아가 첫 항해에서 가라앉아버린 타이타닉 같은 인생이 되지 마십시다. 현재 진토와 같이 주저앉아 있는 인생처럼 느껴질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담는 다면 분명 우리를 다시 세우시고 다시 살도록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를 돌아봅니다. 나 홀로 사역하고 있다면 예수님처럼 떠날 때를 기억하고 사람을 세울 수 있는 인내와 지혜를 더하여 주시고 사방이 막혀 의지할 곳이 없는 고난의 바닥에 내려가 있다면 위를 바라보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뢰를 온전히 고정시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보이는 곳이 다 막혀 있어 답답할지라도 오직 주 만을 의뢰하게 하시는 훈련의 과정임을 잊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주신 것을 감사히 누리는 자족의 은혜를 주시되 사명이 아닌 성공의 자리를 기웃거리는 우리의 탐욕을 제하여 주셔서 순전한 마음을 회복시켜 주옵시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스스로 가버나움 같은 자라 여겨지는 분들이 있다면 돌이켜 회개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에 담아 진토와 같은 이 땅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세워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자리에서 사람을 남기는 사역을 하고 있는지 혼자 일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고 훈련하시는 모습이 나에게 주는 교훈을 묵상해 봅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신 말씀을 통해 세상에 보내진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묵상해 봅시다.
3. 주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이며 나를 왜 이 땅에 보내셨는지 돌아보며 세상의 성공과 안락함의 유혹에 취해 주신 사명을 놓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4. 가버나움 사람들같이 교만함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기 위해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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