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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0:25-42

누가복음 10:25-42
찬송가 :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25절에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냐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신6:5과 레19:18의 말씀을 인용하여, 27절과 같이 대답합니다.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일반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것에 대한 증거이자 척도는 내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내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지도 않고, 품지도 않고, 오히려 미워하고 멸시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예배를 드린다!’ 이것만큼 어불성설은 없을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에 예수님은 그 대답이 옳다고 하시며,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가 자신이 더 옳다는 것을 보이려고,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30-35절에 이야기 하나를 해주시는데, 이는 일명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예루살렘(해발600~800m)은 여리고(-250m) 보다 높은 곳에서 위치해 있었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꼬불꼬불하며 매우 거칠었다고 합니다. 근데 왜 이 길이 중요합니까? 바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왕래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여비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때문에 이 길목에는 언제나 강도들이 우글거렸다고 합니다. 기원 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기 위해, 먼저 여리고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최정예 선발대를 보내, 주변의 강도 소굴들을 소탕했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 같은 유추를 가능케 합니다.

그런 곳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도 벗겨지고, 폭행을 당하여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제사장과 레위인이 각각 그곳을 차례대로 지나갑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제사의 역할을 감당하고, 여리고 혹은 거주지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쳐 갑니다. 그들이 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율법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전제사와 관련된 사람들로서, 자신을 모든 부정한 것들로부터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여나 떨어져 있는 피 한 방울이라도 밟을까봐, 그래서 부정해질 까봐, 그들은 최대한 조심하며 피해갔을 것입니다. 그들의 직책을 감안하더라도, 사실 그들은 사람의 생명보다, 율법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도 38년 된 병자를 예수님이 고치셨을 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막2:27)

이렇게 유대인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말씀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 말씀으로 혹 남을 정죄하거나, 타인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과연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며, 진정한 신앙생활을 무엇이냐고 스스로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강도 만난 사람은 결국 이렇게 죽어가는 것일까요?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자마자,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외국인과의 혼혈민족입니다. 그래서 민족적인 혈통을 중요시하는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자마자, 그의 마음에 불 불듯 일어났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불쌍히 여김(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이 원어적 의미는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실 때,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플 때, 그냥 불쌍하고 측은하게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이 그대로 예수님께 전달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픔이 곧 예수님의 아픔이며, 우리의 고통은 곧 예수님의 고통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실 때, 치유와 회복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바로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34절에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자신의 옷에 피가 묻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갖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사용한 기름은 올리브인데, 이 기름과 포도주는 당시 대표적인 응급 치료약이었습니다. 기름은 상처를 부드럽게 해주고 포도주는 상처를 소독하고 살균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는 응급 치료약이라는 점과 함께, 성전 제사에 바쳐지는 제물이라는 점입니다. 올리브 기름은 매일 아침과 저녁, 상번제에 올려졌습니다. 포도주는 초막절 때 물과 함께 번제단 위에서 부어지는, 관제 예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번제단에서 기름과 포도주를 부을 줄 알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부어야 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 기름과 포도주를 삶의 현장에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에 사용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자기 짐승(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고,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비용을 더 지불 할테니, 자신이 다시 올 때까지 그 사람을 잘 보살펴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또 여기서 볼 수 있는 의미는, 강도 만난 자는 유대인이며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죽게 된 너희를 구해주는 것은 제사와 율법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싸매셨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이 치료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다 지불했듯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 값을 모두 치르신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 비유에는 바로 복음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36절에 율법교사에게 질문 하십니다.

(36-37)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그러자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얘기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유대인 입장에서, 무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을 자비롭다고 말하기가 싫었던 것 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사마리아인에게 주셨던 기름과 포도주를 주셨습니다. 기름은 진정시키는 효능이 있고, 포도주는 활력을 주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름은 <위로>고, 포도주는 <격려>입니다. 우리는 사마리아인이 가졌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사로 있는 지인의 이야기입니다. 내과 전공의 2년차 시절에 ‘혼자 남겨진 병동, 계속 호출되는 응급실, 중환자실 근무, 생사기로의 응급상황 발생’으로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큰 좌절감을 느끼며, 자신은 능력과 자격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여 이대로 도망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도망가려고 몰래 나가려는 찰나, 우연히 담당교수를 만났다고 합니다. 교수는 그에게 스쳐 지나가면서 “너 지난번에, 환자 잘 돌보더라. 그때 잘했다”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도망치려는 그에게, 교수의 그 한마디가 마음을 울리는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도망가는 것을 그만두고 다시 병동으로 터벅터벅 돌아갔다고 합니다. 현재 자신의 밑에 전공의들을 보면 물론 질책할 것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질책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전공의들의 마음과 상황을 배려하고, 한 마디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것이, 그들에게 큰 힘이 되고 전환점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수의 한 마디 위로와 격려로 전공의들이 힘이 날 때, 결국 혜택을 보는 것은 그 병원의 환자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내게 있는 기름과 포도주로 누군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39-42) 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8절을 보면, 마르다의 집에 예수님이 방문하십니다. 이후 예수님에 대한 마르다, 마리아 두 자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두 자매의 행동과 태도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언니인 마르다는 접대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을 해석할 때, 육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하며, 마르다 보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에 사모하고 집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그런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본문에서 조금 더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만약 일을 하는 마르다가 틀리고,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옳다면, 그래서 집안의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 있다면, 식사 준비는 누가합니까? 예를 들어 교회 곳곳에서 많은 봉사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리도 있지만, 육체적인 섬김이 필요한 봉사도 분명 존재합니다. 또 다른 분들이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를 위해 여러 모양으로 봉사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즉 말씀을 듣는 것도, 섬기는 것도,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모두 중요한 것들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 집에 오셨고, 또 함께 계시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가 있고 평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식사 접대를 위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가 자신의 일을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옆에만 있는 것이 매우 못 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의 태도에 화가 난 마리아가, 40절에 동생을 예수님께 이르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염려와 근심이 불평과 불만이 되어, 마르다 안에 있는 은혜와 평안을 빼앗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마르다와 같은 분주하지도 않았고, 염려와 근심이 없었기에, 그 안에 은혜와 평안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빼앗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주님이 주신 은혜와 평안이 있습니다. 그것이 예배를 드릴 때나, 아님 봉사의 자리일 때나, 어떤 상황이든지, 은혜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분주함으로 혹은 염려와 근심이 생기면 소멸 즉, 빼앗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우리 안에 주신 은혜와 평안이 불평과 불만으로 소멸되지 않고, 빼앗기지 않도록 신앙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은 70인을 세워 파송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합니다. 사마리안 사람 비유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상대방의 아픔이 내 아픔입니다. 위로와 격려를 통해 사람을 살리는 곳입니다. 마음이 분주하지 않고, 근심과 염려 때문에 은혜와 평안을 빼앗기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과 우리 가정에서 잘 이루어져 갈 수 있기를 사모하며, 신앙적 노력으로 살아가시는 오늘 하루되시길 축원합니다.

기 도
하나님, 마치 강도 만난 사람처럼 죽어가는 저희를, 시름에 빠진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찾아오시고,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주시고, 치유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하시고, 그 마음으로 주님이 주신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주님이 주신 은혜와 평강을 빼앗기지 않도록 근심과 염려가 생기지 않도록 신앙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가정의 달을 맞아, 혹 소외되거나 외로운 가정이 있다면, 주님의 긍휼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주시고, 언제나 저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깨우쳐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평소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2. 주님이 주신 기름과 포도주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던 간증이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3. 내 주변에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주님의 마음을 전할지 나눠봅시다.
4. 내 안에 있는 은혜와 평안은 지키기 위한 신앙적 노력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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