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8:31-43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고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31-33)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에서 자신이 고난 받아 죽을 것이나 삼 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을 포함해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최소 세 번 이상 자신의 고난을 말씀하셨음에도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반면 앞을 보지 못하여 구걸로 연명했던 여리고의 한 맹인은 비록 육신의 눈은 멀었으나 예수의 진면을 바로 보고, 메시아로 믿어 시력을 되찾고 구원을 얻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33)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메시아 곧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이 땅에 온다면, 압제 받는 민족의 현실을 뒤엎고 영광스러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과거를 재현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의 메시아에 대한 생각은 힘없이, 저항하지 못하고, 고난 받는 종과 같은 메시아가 아니라 영광스럽고 열방으로부터 높임 받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의 메시아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는, 솔로몬이 이방 나라로부터 영광과 경배를 받았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것처럼 높임 받아야 할 분이지, 능욕과 채찍과 모욕을 받을 분이 아니었습니다. 무너졌던 나라를 재건하고 든든한 반석에 올려야 할 메시아가 주님의 말씀처럼 이방인의 손에 힘없이 넘겨져서 죽임 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심한 고난을 받고 죽은 다음에 삼 일 만에 살아난다는 말씀을 몇 번씩 반복하셔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두 번 이야기 해보고,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다시는 그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제자들에게 두 번을 말씀하셨는데 그럼에도 못 알아들었고, 세 번째 말씀하시는 데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모르셨겠습니까? 십자기 지시기 전에 열 번을 말해줘도 못 알아들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거듭해서 고난을 예고하시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중을 위해서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부활 이후,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복음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이 모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으리라는 믿음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 말씀하시는 주님과 그럼에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3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젠가는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아 그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될 것이라는 우리 주님의 믿음이 우리와도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메시아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제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듯이, 우리도 주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도 주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왜곡된 이해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샬롬을 가져다 줄 가상의 메시아를 만들어 놓고, 마치 우리 주님이 거기에 맞춰주셔야 하는 것처럼 신앙하고,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주일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상한 심령을 위로하는 가슴 따뜻한 메시지에 환호하지만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한 삶을 도전 받을 때 소극적으로 반응하시진 않습니까?
우리가 이해하는 폭이 좁다고 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기다려주시는 분이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 당장 깨닫지는 못하더라도 거듭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으면 깨닫게 될 것이라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오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생 여정을 뒤돌아보면, 우리 모두의 인생을 놓지 않으시고 거듭 말씀해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없었더라면 이만큼 신앙하며 주님 따르는 모양이라도 갖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동시에 주님의 뜻과 상관없는 나의 의와 자의식으로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주님의 뜻이 없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의 인내를 닮아야 합니다. 오래 참으시며, 자신의 뜻을 몇 번이고 나타내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던 주님을 닮아, 여전히 주님을 전하지만 반응하지 않는 가족과 지인들을 보면서 낙심하지 않고 언젠가 이 모든 주님의 뜻을 밝히 깨달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바르게 반응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사랑으로 자기의 것을 낭비하기를 쉬지 않으셨듯이, 인내하며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인내하며 우리가 품어야 할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따라 낭비를 다짐하고 그 뒤를 따를 때, 주님은 우리를 도구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분입니다.
또 우리 주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오셨고, 회피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신의 삶으로 그 뜻을 이루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자기 인생을 허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말씀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길에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주님께도 십자가 고난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잡히시기 전 날 밤 피땀을 흘리시며 이 잔을 옮겨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주님의 기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자기 길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명확히 보이는 한 목표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가야 할 길이 명확했으나 그 길이 고통스럽고 힘든 길이라 시인 윤동주는 우리 주님을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만 이처럼 우리도 주님의 인생 바라보며, 우리도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온전히 일상 속에서 주님의 나라를 살아내고, 이루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35-43)
이처럼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리고의 한 맹인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 받습니다. 그는 제자들과 달리 앞을 보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결핍에도 주님을 향한 빛나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그는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 고백하며 간절하게 도움을 간구합니다.
(눅18:36-38)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이 보이지 않았던 맹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가에서 구걸하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는 예수님의 일행으로 거리가 소란스러워지고, 맹인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리들 틈바구니 속에서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던 맹인의 말이, 웅성웅성 대던 무리의 소음을 뚫고 예수님께 전해지기 위해서는 악을 쓰며, 울부짖으며 소리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무리들이 유대가 아닌 나사렛에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진면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는 나사렛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맹인은 달랐습니다. 맹인에게 예수님의 출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길가에서 구걸하며 주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맹인은 사람들의 만류와 제지, 꾸지람에도 굴복하지 않고 더욱 간절히 주님을 찾습니다.
(눅 18: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님만이 자신에게 참된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메시아임을 믿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다윗의 자손임을 믿었기 때문에 맹인은 온갖 수모를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맹인은 육신의 눈이 멀어 앞은 보지 못했지만 믿음의 눈이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소원대로 눈을 고쳐주십니다.
(눅 18:41-42)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하나님만이 맹인의 눈을 뜨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맹인의 의심 없는 믿음이 바탕이 된 간절한 간구 때문에 그는 구원을 얻고, 시력을 되찾는 기적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 중의 하나, 선지자, 선생으로만 알고 있었더라면 맛보지 경험하지 못했을 기적을 체험한 단 하나의 이유는, 맹인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힘없이 초라한 필부에 불과한 듯 보이고, 불의한 세속 권력에 저항할 한 줌의 힘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이셨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 많으신 메시아이셨습니다.
세상에 참으로 잘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잘난 사람들이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처럼 내세울 것 없고,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여 받아누리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이 구원받습니다. 단 주님을 메시아로,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들이 구원 받습니다. 그속에 우리들도 있습니다.
(고전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님은, 주님을 구원자로 알고, 주님이라 고백하며, 간절하게 부르짖는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주님을 힘없다 여기지 않고 믿음으로 바라보며,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간절함과 겸손함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신앙할 때 혹 주변에서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일을 쉴 수 없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에 힘을 내고 계십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우심과 함께하심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은총 베푸셔서 올곧게 주님 따라 걸어가도록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내 삶에 주님이 역사하신 흔적을 보고 모두가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눅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하늘의 하나님께 찬양하는 날이 인생 가운데 반복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전에 우리 주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 믿고, 고백하는 오늘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우리가 깨닫지 못해도 여전히 말씀하시고, 그 뜻을 일러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삶의 길을 조율하시고 그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걸어가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길을 조율하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게 해주시옵소서.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주님의 진면을 확인할 수 있었던 맹인의 신앙고백을 나의 것으로 삼고, 나의 구원자를 온전히 의지하고 그 은혜를 간구하는 심령으로 하루를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주님께서 예고하신 자신에게 닥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31-33)
2. 여리고의 맹인이 예수님을 무엇이라 부르고 있으며, 무엇을 요청합니까? (38)
3. 앞이 보이지 않고, 무리에 둘러쌓인 예수님을 불렀던 맹인의 외침 속에 포함된 정서는 무엇이었을까요?
4. 간절하게 주님 앞에 부르짖은 결과는 무엇이었으며, 지켜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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