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9:1-10

누가복음 19:1-10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려 오셨습니다. 앞선 누가복음 18장에서 부자 관원이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18:23), 본문의 삭개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1-6)
(1-2)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세리라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던 세리들은,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액수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자기 몫으로 착복하기 일쑤였습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로마 정부로부터 상당한 업적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부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서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삭개오를 만나시는 예수님을 보고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삭개오는 뭇 백성의 원성을 샀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를 비롯한 세리들을 혐오하였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율법상 부정한 자로 규정되었고, 압제자의 하수인으로서 변절자로 낙인찍혀 죄인과 창기들, 이교도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받았습니다(마 9:10-11).

이런 삭개오의 관심이 오늘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께 향하여 있었습니다.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삭개오는 넉넉한 재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소외된 자신의 처지 때문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소문 난 예수님을 동경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신의 작은 키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무리가 많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분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약에 삭개오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삭개오를 막아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헤치고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였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도 작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는 여리고를 통과하면 꼭 지나가야 하는 길목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허둥지둥 나무에 올라가서 가지에 걸터앉는 삭개오의 모습을 바라보며 손가락질 하였겠지만, 주님을 만나보고자 하는 삭개오의 간절한 열망은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생각은 그의 열망일 뿐, 만약에 예수님께서 그곳을 지나가시지 않으신다면? 혹은 지나가시더라도, 삭개오가 앉아 있는 나무 위를 올려 보시지 않으신다면? 또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을 바라만 보고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저 그분이 지나가시는 모습을 쳐다보며, “저분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그 예수님이시구나”하며 쓸쓸히 나무 위에서 내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예상한 그 길을 지나시고, 나무 위에 걸터앉아 있던 그를 쳐다보시고 불러주십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십니다.

(5-6)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예수님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면서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주목하지 않으셨더라도, 삭개오는 주님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기대와 생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나무 아래 오셔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오늘 네 집에 머물겠으니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주님을 한 번 보고자 했던 사람이, 이제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만나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그 이상의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고, 이제 자신의 집에 유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삭개오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제안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유하시겠다는 것은 머물러도 괜찮겠냐는 물음이 아니라, 오늘 네 집에 반드시 머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한글성경은 번역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하시는 말씀과,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 사이에는 ‘왜냐하면’이라는 헬라어 접속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 집에 유하셔야 할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삭개오를 부르시자, 그는 굉장히 모범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고,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영접 하였습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시는 헬라어 표현과, 6절에서 급히 내려오는 삭개오의 반응을 나타내는 헬라어 표현이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삭개오에게 오늘 다가왔고, 삭개오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하지 않고 기뻐하며 받아들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자였지만, 이제 더이상 소외된 자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못마땅해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선포(7-10)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는 것에 대해 수군거리며 불평합니다. 앞선 15장에서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며, 식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수군거리며 불평하였습니다. 죄인의 집으로 알려진 세리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는 모습은 그들의 관습과 신앙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유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되어서 그 집에서 쉬기 위하여 가셨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구원의 표시였습니다. 삭개오는 이 말을 즉시 알아차렸기 때문에 속히 내려와 영접하였고, 둘러선 사람들도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며 수군거렸던 것입니다. 5장에서 세리 레위의 집에서 열린 예수님과 세리들 사이의 식탁 교제(눅 5:29-32)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한 구원의 축복을 상징하였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세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도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9절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 집에 구원을 선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아직 예수님께 회개와 관련해 한마디 말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믿겠다는 고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이러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먼저 자녀로 받아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받아주신 것은,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나 의로움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 엄청난 구원의 선물이 삭개오의 생각과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었지만, 삭개오에게는 복음 그 자체였습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들은 후 뒤따르는 삭개오의 결단은 그가 참으로 회개하였음을 나타내줍니다. 그가 놀랍게 바뀌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주셨기 때문에 그에게 즉각적인 변화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삭개오는 이제 재물에 대한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사람들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는 그의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18장에서 부자 관원이 이렇게 할 것을 요구받았으나 근심하면서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18:22-23), 삭개오는 구원의 감격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배상할 것이 있다면, 그 액수의 1/5을 더하여 배상할 것을 요구하지만(민 5:7), 삭개오는 율법의 요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상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고, 속임수로 부당하게 피해를 입힌 사람들에게 충분히 배상해 주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변화를 통하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증명한 것입니다.

삭개오의 변화된 마음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고 말합니다. 우리의 말이나 생각으로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의 변화된 삶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그렇게 살아내야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 구원받은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삶 가운데 어떠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재물에 대한 자유함이 구원의 표식에 대한 조건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재물에 대하여 올바른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실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이 결단이 진정한 회개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 날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다는 선언을 통해 확증시켜 주십니다.

(9-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구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표현은 어떤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는 자들에게 협력하고, 또한 속여 빼앗은 것 때문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약속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혈통에 따른 아브라함의 자녀가 모두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는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고(눅 3:8), 삭개오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자격을 갖춥니다.

인자이신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동시에 잃어버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삭개오와 같이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녀를 구원하는 것임을 주위를 둘러싼 이들에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각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낫게 하시고, 귀신을 쫓으신 것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들에게로 찾아가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처럼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천대받는 이들을 찾아가 복음의 소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삭개오의 집을 방문하고자 하셨고, 삭개오는 이 은혜의 행동에 반응하였습니다. 죄사함과 화목을 제공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인자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것은, 삭개오가 작정하고 은혜를 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삭개오가 아무 자격도 없고, 심지어 그 은혜를 받을 소망조차 갖지 않았을 때 놀라움으로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사함을 제공하는 일에 주권을 가지시지만, 회개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사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며, 삭개오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돌이켜 회개하며, 실천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지만, 또한 주님 안에서 매일 새롭게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세워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동행할 수 있게끔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삭개오를 불러주셨던 주님이, 우리 또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소외되고 천대받는 이들을 찾아가 그들의 아픔과 눈물을 닦아 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마리아가 주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감사하여 믿음으로 향유를 준비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힘껏 주님을 섬기는 일에 쓰임 받는 귀한 그리스도의 통로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작은 자, 소외된 자, 혐오스러운 자였던 삭개오를 찾아와 주셨던 것처럼, 저희를 찾아와 주시어 주님의 자녀 삼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를 바라보시고,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의 집에 유하여 주셨을 때, 그는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성령님께서 계시기에, 이 하루도 주님의 자녀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애통하며 눈물 흘리고 있는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저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힘껏 주님을 섬기는 일에 쓰임 받는 주님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의 행동하는 모습이 모여, 하나님의 나라에 잇대어진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삭개오는 속히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급히 내려왔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찾아오셨을 때, 들려주신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였습니까?
2.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삭개오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이 어떠하였을지 생각해 봅시다.
3. 우리의 삶 속에서 힘껏 주님을 섬기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으로 살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새벽기도 > 누가복음(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9:28-48  (0) 2022.12.16
누가복음 19:11-27  (0) 2022.12.16
누가복음 18:31-43  (0) 2022.12.16
누가복음 18장 15-30절  (0) 2022.12.16
누가복음 18장 1-14절  (0) 2022.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