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28-48
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
예수,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다(28-36절)
오늘 본문의 시점으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남겨놓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여의 공생애를 마무리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성전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28-36절은 나귀 새끼(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므나 비유’입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앞에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더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은 여리고입니다. 해발고도가 약 –250m인 여리고는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도시 중의 하나입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은 해발고도가 약 800m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서 성큼성큼 걷고 계십니다.
(29-30)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당시에 나귀는 물건을 이동하는 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장성한 나귀는 사람이 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나귀는 말과 비교해 덩치는 작아도 힘이 세고, 병치레를 잘하지 않기 때문에 서민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작은 자동차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건강하게 다 자란 어미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공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 겸손하여서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라고 하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슥 9:9)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어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군림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며, 십자가를 지심으로 희생과 섬김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나귀를 풀어오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1-32)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돈을 주고 나귀를 사 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풀어서 오고, 누가 왜 풀어 가느냐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과 나귀 주인 사이에 제자들이 모르는 약속이나 계약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주가 쓰시겠다’가 일종의 암호가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누군가가 나귀를 맨 끈을 풀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왜 풀어가시오”라고 물었을 때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내가 보낸 사람입니다”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봐서 예수님과 나귀 주인 사이에 계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보지도 않으시고 맞은편 마을에 한 번도 사람을 태운 적이 없는 나귀가 있다는 것을 아시는 능력이 있는 분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적절하게 여겨집니다.
(33-34)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마을로 들어갔더니 나귀가 있었고, 나귀의 주인들이 “왜 나귀를 푸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긴 설명을 하지 않고 “주께서 쓰려 하십니다.”라고만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나귀 주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는 장면은 4복음서가 모두 증거합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하신 수난의 시작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일이 그만큼 제자들에게 깊이 각인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깊이 매여 있는 매듭이라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쓰시려고 하는 것은 풀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어린 나귀와 동일시 해 보십시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에 묶여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결코 그 매듭을 풀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나를 매고 있는 매듭을 풀고 나를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이 앉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예루살렘과 그 부근에 수많은 나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등에 태운 나귀는 바로 이 나귀입니다.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태우는 것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틀거리며 갔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비틀거리고, 서툴고, 연약해 보이는 나귀와 같은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마침내 두 제자가 어린 나귀를 끌고 왔습니다.
(35-36)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제자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옷을 어린 나귀 위에 깔고 그 위에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제자들만 옷을 벗어서 깐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대다수 사람이 옷을 벗어서 깔았다고 증거합니다. 사실 이 장면은 굉장히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입니다. 말에 비하면 나귀는 몸집이 작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셨기 때문에 발이 땅에 닿는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왕이나 장군이 아주 크고 좋은 오토바이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갔다면, 예수님께서는 서울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신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 예루살렘으로 가시다(37-44절)
37-44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37-38)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께서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셨다’라는 것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감람산을 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감람산 정상을 넘어 예루살렘 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남쪽 비탈길에 서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 지르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왕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진심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행색이 그토록 볼품없었고, 타고 계신 것이 준마가 아니라 어린 나귀였음에도 불구하고 환호했던 것은, 예수님에 대해 허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 때문’에 큰 소리로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행하신 표적에 대해서 들었고, 그것을 예루살렘에서도 행하시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었습니다.
(39-40)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을 환호하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우니까 예수님께 제자들을 좀 나무라서 조용히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은 “예수! 당신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서 왔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소리를 지를 수 있습니까?”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허상을 가진 것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보잘것없는 마을 나사렛에서 온, 천박한 목수 출신의 예수가 어떻게 메시아가 될 수 있느냐?”가 바리새인들이 가진 생각이었습니다. 게다가 마리아가 남편을 통하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고 하고, 제대로 배운 일도, 소유를 많이 가진 적도 없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했건 말건,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냈다는 소문이 있을지라도, 이런 사람은 보기 싫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조용하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서 소리 지르며 찬양하고 있지만, 찬양하는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 당신은 메시아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열렬하게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시고 기뻐하시거나, 그렇게 환호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격려하시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우셨습니다. 군중들의 모습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우신 것이 3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우셨습니다.
본문의 ‘울다’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클라이오(klaiō)’인데, 이 단어는 ‘큰 소리로 울다, 통곡하다’의 뜻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죽음과 관련이 있을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우리가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전부 허상입니다. 그리고 장자 예루살렘이 어떤 지경에 놓일지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 40년 후에 무너질 예루살렘을 생각하니까 안타까움의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성전에 들어가시다(45-48절)
45-48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행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은 한 해에 한 번, 반 세겔씩 성전세를 내어야 했습니다. 한 세겔은 성인 남자의 4일치 임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반 세겔은 2일치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세는 일반 화폐로는 받지 않고 성전에서 쓰는 화폐로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일반화폐를 성전화폐로 바꾸어주는 환전상이 있었습니다. 또 성전에는 짐승을 파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가지고 온 짐승은 검사료를 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검사관들이 온갖 구실을 대어서 제사를 드리기에는 부적절한 제물이라고 판정해서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 파는 짐승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값이 밖에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비쌌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사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입 중에 일정한 비율로 대제사장에게 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쫓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폭리도 문제였지만, 이들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이라는 곳에서 장사했습니다. 그것은 먼 이방에서 달려온 수많은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 경건한 장소를 시장통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신 후에, 성전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강도’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힘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주먹이든, 자신이 들고 있는 흉기든, 자신의 소유나 능력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믿고 그 위에 인생의 터를 잡고 인생을 세웁니다. 그것만이 자신을 세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터 위에 인생을 세운다면 결국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모두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한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자신의 인생과 가족, 일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이든, 가족이든 일이든, 사람과의 관계든 무엇이든지 세워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성전은 언제나 기도하는 집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가진 것과 누리고 있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낭비함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좋은 일’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나귀 새끼(어린 나귀)의 주인들의 이름을 우리는 모릅니다. 나귀의 주인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나귀를 공동으로 소유할 정도의 가난한 사람들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귀를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낭비함으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좋은 일’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삶을 기도하는 집으로 가꾸며, 주님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낭비함으로, 좋은 일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통로로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기꺼이 자신들의 어린 나귀를 기꺼이 내어준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 나귀를 몇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어도, 또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낭비한 나귀는 단순히 나귀 한 마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나귀를 드림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통로였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음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영원히 좋은 일이었습니다.
또한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담습니다. 우리가 장차 무너지고, 사라지고 없어질 것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인생을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필요로 하시면 우리도 기꺼이 우리의 나귀를 내어놓을 줄 아는 믿음을 갖게 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실 때, 기꺼이 주님을 태운 어린 나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예수님께서 보낸 두 제자가 나귀 주인들에게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기꺼이 나귀를 내어드렸습니다. 당신의 믿음 생활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린 것은 무엇입니까?
2. 이전에 사람을 태운 적이 없었던 어린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태워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태우지 않고 당신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3. 예수님께서는 장차 무너질 예루살렘을 보시고 통곡하셨습니다. 지금 당신이 장차 사라지고 없어질 것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삶을 어떻게 교정하시겠습니까?
4. 사랑의 낭비를 하므로 좋은 일의 통로가 되며, 여호와 하나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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