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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0:1-8

누가복음 20:1-8
찬송: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권위를 준 자가 누구냐?(1,2,8)

우리나라는 유교적 문화 현상의 영향으로 권(權)의 개념과 그 발현 현상에 대해 매우 민감한 편입니다. 사회통념이던 우리나라의 유교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인간 세상의 질서를 바르게 담당하기 위해 하늘의 도를 따라야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어진 권(權)에 높고 존엄한 하늘이 내리는 힘을 위(威)라 하여 오늘날의 권위(權威)가 된 것입니다. 권위자에게 필요한 것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위한 균형이 필요했고, 균형을 이루는 기준을 도(道)라고 불렀습니다. 권위의 개념에는 하늘과 땅의 이치, 그리고 질서와 균형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권위의 개념은 심각하게 훼손되어 사회문제 중에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거쳐 권위는 문화 의식이 되어, 우리의 말과 사고방식, 행동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나이와 직급, 성별에 따른 상하 관계를 구성하여 또 다른 계급사회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2007년 한 사회정신건강연구소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인의 정체성이 매우 혼미한 단계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체성 혼미단계의 사람들은 주어진 일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노력하는 경향이 있으나 새로운 일을 탐색하거나 도전하는 일에는 부족합니다. 사회구조에 경직성을 보이며, 민주적 절차보다는 강력한 리더를 선호하고 사회저항보다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권위주의가 생성된다고 합니다.

물론 조사 이후로 우리나라에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지만, 이 결과대로 오늘날 듣고 있는 소식들에는 이른바 ‘갑질’ 논란이 늘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하청 업체에 강요와 물품 밀어 넣기를 하고, 입주민이 아파트 경비원을 대상으로 폭행하며, 사장님이 직원이나 운전기사에게 막말하는 등의 이야기들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난 5월 25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비무장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경찰이 체포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무릎으로 플로이드의 목을 누르는 영상은 인종차별이라는 이유로 온 세계에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권위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생각나는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 모든 시간을 억눌린 삶으로 살았습니다. 왕을 세우기 위한 사무엘과의 만남에 일곱 명의 형제들은 모두 모였으나 다윗은 양을 치느라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 있는 형들의 안부를 확인하고자 찾아갔으나, 형들은 다윗이 교만하고 완악하다며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을 이긴 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가져가는 다윗을 질투하여 사울 왕은 끊임없이 다윗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 사울의 권위를 인정하며 죽일 기회를 얻고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권위는 인정받지 못하여도 스스로 누군가의 권위를 무너뜨리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오늘 본문도 ‘권위’가 주제입니다. 권위를 기준으로 세상 사람들을 구분한다면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뉠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의 권위를 중심으로 그 권위에 환호하는 민중들이 있는 반면에, 적개심을 드러내는 지도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적개심을 가진 사람들의 결론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찾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눅 19: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은 유대인들의 의회인 ‘산헤드린’을 구성하는 집단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의장으로 총 71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성전과 관련된 다양한 직책과 역할들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지도자들은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부터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시는 것이 불편했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는 일은 자신들이 가진 성전관할권을 침해하는 상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이렇게 하도록 만든 배후세력을 말하라며 예수님을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우리말 ‘가까이 와서’로 번역된 헬라어 ‘엡히스테미’는 ‘위에 서다, 습격하다, 공격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질문한 태도가 매우 공격적이고 무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권위적이던 그들이 자신들의 권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다른 이들의 권위에는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인정받지 못함을 견디지 못하는 그들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게 권위는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성전에서 하신 일이란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것은 무사안일(無事安逸)과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메시아였습니다. 비록 현실은 로마의 압제 아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민족을 잊지 않으셨고 모든 억눌림과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사 진정한 평화와 샬롬을 허락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복음이 울려 퍼지는 역사의 현장에, 하나님의 아들이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선언하시는 복된 때에, 성전을 담당한다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권위가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힘의 구조와 논리가 아닐진대, 지도자들은 성전을 가까이하면서도 성전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돌아갈 대답은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요한의 세례(3~7)

무슨 권위로 이런 일들을 행하느냐는 지도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역질문하십니다. 그 질문의 주제는 세례요한입니다. 당시 요한의 사역과 그가 베푼 세례는 많은 이들이 회자하던 때였습니다.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로서 그의 신앙과 경건에 흠잡을 데가 없는 선지자였습니다. 400년간 지속하던 영적 암흑기를 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언한 그에게 이스라엘의 많은 기대는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의 생일잔치에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인해 너무나 우발적이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세례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질문을 남겨두었습니다. 주님은 그 질문을 하심으로 자신의 대답을 대신하십니다.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요한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었을까? 그렇다면 저렇게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면, 요한은 자기 멋대로 세례를 베푼 거짓 선지자였는가? 그러나 그의 영적인 권위는 어떻게 봐야하는가?’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하기엔 어떤 것도 흡족할 만한 답이 되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질문에 제자들이 한 답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은 죽음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깊은 각인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막 8: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주님의 역질문에 지도자들이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본문에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라 한다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라고 한다면 요한을 선지자로 인지한 백성들의 돌에 맞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놓으려던 덫에 주님의 역질문으로 오히려 자신들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지도자들이 할 수 있는 답변은 없었습니다.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정치적, 신앙적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는 지도자들은 궁색하게도 알지 못한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권위를 중시하던 그들이건만, 지금의 모습은 권위 없는 모습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초라한 것을 붙들고 있었는지 주님의 질문에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거짓이요 껍질뿐이던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참 권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자신들이 세우려 했던 권위, 그것을 위해 성전을 기반 삼아 제도를 만들었고, 로마를 등에 업었으며, 두려움없이 하나님의 말씀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운 권위는 모래성과 같아서 한 번 지나가는 파도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자신들이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광야로 가며, 갈릴리 빈민촌에 머물렀습니다. 제도나 조직, 지역을 근거로 힘을 삼지 않았고, 민중을 동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과 영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주변의 인정을 받으려 하기보다 하나님의 뜻과 구원을 세워가는 것을 더 큰 목적으로 삼으며 살아갔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 참 권위가 찾아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참 도(道)를 기준으로 하늘과 땅의 질서를 바르게 세워나갔고, 하나님께서 권위로 옷 입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권위는 지위나 자리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권위적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느라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은 물론 아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권위적인 지도자들에게 주님께서는 포도원 농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막 12:1-9)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권위욕은 내 눈을 가리는 우상입니다. 그 우상이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계획을 가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해 정죄하게 하며, 사람과 영혼이 아니라 조직과 제도, 직함과 명분, 실리만을 좇게 함으로 결국은 본문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권위욕에 매몰되어 인생의 후반전을 망칠 것이 아니라, 나의 권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참 권위자이신 성령님을 모시고 백성다운 삶으로 헌신할 때, 비로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님.
빈 깡통 꾹 찌그러져 아무 모퉁이에나 버려진 인생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도 되는듯 텃세를 부리고 약자를 뭉개며 비루한 권위로 옷 입고, 기득권을 방패 삼았음이 수치스럽습니다. 화살 같던 말, 휘둘렀던 폭력, 인정하지 않던 태도 모두 거룩한 주님 앞에 온전히 무릎 꿇게 하시고, 내 힘을 채우기보다 참 권위자이신 주님을 따르는 순전함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참 권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권위의 선과 악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2. 다윗이 사울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3.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권위가 제도나 직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보면서 참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까?
4. 갑질은 있고 권위가 사라지는 이 시대에 세례요한과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권위로 옷 입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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