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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0:9-18

누가복음 20:9-18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장로들로부터 주님의 권위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포도원 비유를 통해 주님의 권위에 대한 대답을 주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가장 권위 있는 정치 기구인 산헤드린을 구성하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들의 권위를 이용해 저지르고 있는 악행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을 맡긴 주인(9)

(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비유에서 포도원을 만든 ‘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미하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전통적으로 유목 생활을 하였지만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의 뜨겁고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와 좁은 농경지는 포도 농사를 짓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또 포도주는 석회석이 많은 근동 지역의 물을 희석시키는데 도움이 되어 매일의 식탁에 오르는 중요한 음료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부자들은 종종 자기 토지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며 소작농들에게 자신의 포도원을 맡기고 일정한 소출을 받는 방식으로 포도원을 운영하였습니다. 포도원 비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익숙한 문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포도원에 비유하셨으며(사 5:1-6),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포로 되었던 이스라엘의 회복을 포도원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 그림 언어로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렘 32:15).

포도원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만 발견되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오래 있다가’라는 시간적 묘사입니다.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복음이 가장 후대에 기록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누가는 주님께서 당시 사람들의 기대 보다 더디 오심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여 집니다. 본문 안에서만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포도원을 일구셨을 뿐 아니라 최소한 수 천 년 동안을 돌보신 분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종교와 정치 등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스스로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주인에게 충성을 다해야 할 소작농들이었지만 오랜 시간 주인을 의식하지 않고 본인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건강 그리고 우리의 일터 모두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들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손에 그것들을 쥐고 있다 보면 쉽게 내려놓지 못하게 됩니다. 건강도 내 것이고 돈도 내 것이고 자녀도 내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저 내 일이, 내 계획이 잘 풀리도록 도우시는 분으로 계시기를 바라게 됩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려 하나님을 외면하는 우리의 일상은 언제나 이기적인 홀로의 유혹과 탐욕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아담적 탐욕과 악한 소작농들의 길을 걷지 않도록 우리를 진리로 교훈하시고 도전하십니다. 선한 청지기로 충성하기 보다는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했던 소작농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악한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악한 소작농들(10-16)

(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포도원 주인은 포도원의 소출을 얻기 위해 한 종을 자신이 고용한 소작농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기대와 달리 소작농들은 마땅히 바쳐야 할 소출은 고사하고 주인이 보낸 종을 몹시 때리고 빈손으로 주인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다시 한 번 한 종을 소작농들에게 보냈고 이번에도 소작농들은 그 종을 능욕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주인은 세 번째 종을 소작농들에게 보냈고 이에 소작농들은 그 종을 상하게 하고 내쫓아버렸습니다.

(11-12)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주인이 보낸 종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그 종들을 소작농들이 때리고 능욕한 것은 주인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동이며 주인의 인격을 모독한 것이기에 주인은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소작농들의 악한 행위를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법적으로 포도원 주인이 당국에 이와 같은 사건을 고발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요청하면 당국은 훈련받은 군인들을 포도원에 보내 악한 소작농들을 체포하여 법정에 세우고 마땅한 형벌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군대를 동원하셔서 주인 행세하는 산헤드린 공회를 심판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을 심판하는데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과 동등한 권위를 지닌,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 모든 잘 못 된 일 들을 바로 잡으려 하였습니다.

(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어찌할까’로 번역된 원어 문장을 직역하면 ‘내가 무엇을 해야할까?’입니다. 주인의 독백은 청자와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의 입장에서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도록 도전합니다. 또한 주인의 권위로 그 악한 농부들을 벌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일반적인 문제해결 방법 이외의 것을 제시하려는 주인의 고민과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은 주인이 사랑하는 자이며 포도원의 법적 상속자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포도원’에 보내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의 권위의 근거와 그가 오신 이유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악한 소작농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을 넘어 주인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더 큰 악을 저지릅니다.

(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구전 율법인 미쉬나에는 <점유자의 권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 저수지, 도랑, 지하저장고, 비둘기장, 목욕장, 노예...(생략) 그리고 계속 수익을 내는 것이면 무엇이든 취득하여 만 3년 동안 점유한 자는 그 소유권을 확보한다.” 당시에는 전쟁이나 전염병 등으로 사람들의 기대 수명이 짧았을 뿐 아니라 갑작스러운 죽음 등으로 자신의 소유를 증명할 수 있는 체계도 부족하였습니다. 점유자의 권리에 따르면 주인이 3년 동안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방치하는 재산에 대해 실제로 점유하고 있었던 사람에게 소유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악한 소작농들은 포도원의 실제 주인은 먼 곳에 있었고 단 한 번도 직접 방문한 일이 없었으며 이제 법적 소유주인 아들이 왔지만 그 아들이 죽게 된다면 주인의 포도원을 합법적으로 빼앗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악한 소작농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밖으로 끌려가 십자가 죽음을 당하게 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장로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인 노릇하기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사실을 아시고 비유를 통해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시며 포도원 주인이 악한 소작농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법적 소유권을 가진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악한 소작농들은 기세등등하여 이제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포도원의 주인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주인이 오는 그 날 그들은 모두 그 악한 행실에 대해 심판받았습니다. ‘진멸하다’는 표현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죄에 대해 조금도 허용하시지 않고 멸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린 일상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 동안 자신들에게 그 모든 소유권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지만 롯의 때와 같이 하나님께 그 모든 소유권이 있음이 드러나는 그 날에 스스로 주인 행세하였던 그 모든 것들은 불과 유황의 심판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처음부터 불과 유황으로 악한 소작농들을 심판하시지 않고 자기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을까요. 왜 악한 사람들을 진멸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야 했나요.

모퉁이 돌(17-18)

(17-18)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시편 118편 22절 말씀을 인용하시며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아들을 뜻하는 단어와 돌을 뜻하는 단어가 각각 벤과 에벤으로 히브리적 언어유희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포도원 밖에 내쫓겨 죽임을 당하셨지만 오히려 그것은 구약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며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한 포도원 주인은 무능하고 무지하여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죽음마저도 포도원 주인의 주권 아래 있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18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익숙한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상징을 떠올리게 합니다.

(단2:34-35)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단2:44-45)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 하니

삼위 하나님은 심판과 권위를 통해 자신의 소유를 되찾지 않고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자기 아들을 진멸하시까지 낭비적 사랑과 언약의 신실함을 통해 자신의 소유를 되찾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심으로서 탐욕으로 붉게 물든 우리의 피를 보혈로 정결케하셨으며 욕망으로 축적하던 우리의 살을 주님의 몸으로 새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영광과 유익을 누릴 뿐 아니라 홀로 일상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삶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주인 행세하며 손에 꼭 쥐고 놓지 못하고 있는 것들은 결국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교우님들의 인생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오셨을 때 생각대로 만족한 인생이 되셨습니까? 교우님들의 가정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자녀를 양육하고 가정을 돌보셨을 때 과연 만족할만한 가정이 되셨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악한 일도 서슴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 모두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가꾸고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주인 행세하던 모든 영역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존대하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며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하였습니다. 존대하리라고 번역된 원어는 돌이키다, 예배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아담적 우상숭배를 이기는 힘은 주님께로 우리의 시선을 돌이키고 주님을 예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살며 소망하는 교우님들의 삶을 주님께서 친히 돌보시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 노릇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말씀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권면해 주셨지만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 놓지 않으려 말씀 받기를 거부하고 무시하였습니다. 이기적인 홀로의 삶을 살고자 귀를 닫았던 우리의 삶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새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세상에 빼앗겼던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옮기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께 영광 돌려 드리는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살아내기를 소망하고 결단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소작농들은 선한 청지기로 살지 않고 주인 행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맡겨 주신 것들 가운데 주인 행세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드리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3. 하나님께서 주인 행세하는 우리를 진멸하시지 않고 주님을 내어주신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그대의 삶에 진정한 주인이 되시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5. 그대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기 위해 어떻게 기도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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