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9-40
찬송가 454장 '주와 같이 되기를'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9-26절)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과 농부의 비유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잡아 해코지하려 합니다.
(19-20)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하지만 그들은 백성이 두려워 예수님을 붙잡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이 결국은 사람을 무서워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심하며 예수님을 처리할 다른 방법을 궁리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기려고 의인인 체하는 정탐, 즉 오늘날 말로 하자면 심부름센터 직원들을 보내어 말로 올무에 걸려는 것이었습니다.
(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고 존경하고 있다는 듯이, 예수님을 한껏 치켜세우는 말을 합니다. 마음에 없는 말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의 증거는 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르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으며, 겉모양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걷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칭찬에 우쭐해졌다고 여겼는지 음흉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선생님께 공손히 묻는 것 같지만 이 질문은 뇌관과도 같았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가이사는 아마도 디베료 가이사, 즉 티베리우스를 의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로마 황제로 대변되는 제국에 세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묻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옳다고 하신다면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큰 원성을 살 수 있습니다. 또 옳지 않다고 하신다면 로마제국에 큰 고초를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미끼를 문 물고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예수님이 어떻게 답하시든 공격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들의 악한 간계를 다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데나리온을 가져와 보여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꿈에도 모른 채로 옳다구나 하며 그 동전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은 별생각 없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답합니다.
당시 데나리온 동전 앞면에는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라는 문구가 있었고 뒷면에는 ‘최고의 사제’라는 글귀와 함께 어머니 리비아가 평화의 여신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찌 보면 이 동전을 소지하고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신성모독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이 돈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형상과 글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하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넘어 그들이 가이사의 권세 아래에 살고 있었고 동화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로 그들의 질문을 근본부터 뒤흔드셨고, 이제는 공수가 바뀌게 됩니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것이 가이사의 것이라면 가이사에게 주라는 간단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한 말씀으로도 정말 많은 논의가 가능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통치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함으로써 그의 통치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한해서 원문의 의미를 보다 잘 담은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 부분을 “그러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드려라”고 옮깁니다.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돌려드리라고 하십니다. 가이사에게 바친다고 하지 않으시고 돌려준다고 하신 것은 그 권위가 받아야 마땅한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며 그들이 묻지 않았던 하나님의 것도 언급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가이사와 하나님 가운데 누가 더 위대하신 분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만드십니다. 가이사가 돌려받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하나님께 돌려 드릴 것은 우리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가이사의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허를 찔려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침묵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 너무나 익숙하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지만, 이는 실로 하나님의 지혜와 권위가 아니면 하실 수 없는 답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은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돈이 바로 가이사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보다 가이사의 것에 마음이 쏠리며,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비밀스러운 내적 욕망까지 파악되자 그들은 말문이 막혔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해 예수님께 옳고 그름을 가려달라고 묻는 것이 가당한지 자문해야 합니다. 그들이 던진 질문에는 숨은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당시 서로 치고받고, 네 편 내 편을 가리는 엄청난 논쟁거리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더 깊은 본질을 말씀하심으로 그 문제를 초월하십니다.
사람 사이에도 시시비비를 가르는 일도 너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어떤 사항이 옳은지 그른지를 묻는다면, 과연 예수님은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다 그르고 다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 문제는 본질적으로 죄악된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양비론을 취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죄의 결과이니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다만 죄악 된 인간이 극히 유한한 관점에서 무한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옳고 그름을 가리라고 강요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일갈하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 논쟁(27-40절)
이제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합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형이 자식을 낳지 못한 채로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동생이 결혼하여 상속자를 세워야 하는데, 일곱 형제가 모두 이런 식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고 여자까지 죽는다면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내놓은 문제는 아마도 부활을 믿는 서기관 또는 바리새인과 논쟁할 때 사용했던 질문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이 질문에는 답하지 못할 것이라고 킥킥거리며 웃다가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즉 부활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개념인지를 보여주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당혹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 역시 처음부터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대비시키시며 이 세상의 일을 근거로 저 세상의 일을 파악할 수 없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35-36)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저 세상, 즉 앞으로 올 세상은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곳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야 할 이유가 없고 부활의 자녀,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사와 동등한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세를 기준으로 영원과 부활을 판단하기에 어리석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진리로 답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보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모르기에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을 서로 견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더 나아가 그들이 그렇게 신봉하는 모세의 글로 그들의 질문을 논파하십니다.
(37-38)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모세는 가시나무 떨기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음을 기록합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내용을 뒷받침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자, 이삭의 하나님이자,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려면 그 셋 모두 살아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와 관계를 맺으시지 죽은 자와 관계를 맺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시면서 사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두 다시 살아 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현재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요, 부활의 자녀가 된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에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자는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은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라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들은 사두개인들과 부활에 관해서 믿는 바가 달랐지만, 그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고 모세의 글로 논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두개인 역시 감히 더 묻지 못합니다. 모세 오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지켰지만, 그 깊은 의미는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질문드린 두 무리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나아왔습니다. 하나는 옳고 그름을 가려달라는 질문이었고, 또 하나는 가상적인 상황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함께 변론하자고 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나오는 마음이 주님이 주시는 답변의 온도를 결정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애통해하는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를 구하는 마음이라면 당연히 따뜻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통틀어 인생의 질문을 던졌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하박국이 그러했고, 욥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질문 앞에 꿇어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로움보다 지혜로우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질문자의 위치에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도 동전이 누구의 것인가? 물으셨고, 41절에서도 왜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서 계속 너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너의 힘으로 삼느냐? 질문하십니다. 물으시는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답변을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반응입니다. 이를 영어로 response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책임이라는 responsibility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질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내재적인 책임이 없습니다. 다만 각자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질문에 답변을 드리고, 그에 반응한 책임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위기상항에 대한 답변이 우리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주일 말씀처럼 우리의 답변은 하나님만을 나의 힘으로 삼아 하나님께 홀로 바르게 서겠습니다. 하지만 더불어 함께 살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도 낙오시키지 않겠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러한 답변을 드리고 책임감 있게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같은 마음으로 질문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은 우리의 시시비비를 가리시는 분도 아니시며, 지적 희롱을 당하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우리의 답변이 우리의 책임이 됨을 압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질문에 홀로 하지만 더불어로 대답하며, 삶으로 그 책임을 지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 간절히 질문했던 기억이 있으십니까? 어떤 마음으로 질문하셨습니까?
2. 하나님은 그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3.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4.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하셨습니까? 그 답변은 어떠한 방식으로 나를 하나님 앞에 책임감 있게 살아가도록 만들었는지를 묵상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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