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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22:14-23

누가복음 22:14-23
찬송가 436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숨가쁘게 달려오던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제 서서히 마무리 되어 갑니다. 예수님의 마지막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처절함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의 살인음모와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도들의 배반이 동반된 처량하고 외로운 걸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처량해보이는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외롭게 그리면서도 즐거운 교제를 상징하는 식사의 교훈을 여러번 기록합니다. 누가복음에는 총 7번에 걸쳐 식사시간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 본문은 그 중 다섯번째 식사이며, 예수님께서 오직 사도들과 함께 하신 첫번째 식사기록입니다. 예수님은 3여년간의 공생애 기간동안 사도들과 숱한 식사를 함께 하셨겠지만, 이를 조명해서 기록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사도들과의 숱한 식사에는 관심이 없던 누가는 오늘의 식사에는 집중합니다. 왜냐하면 이 식사만큼이나 예수님이나 사도들에게 특별한 식사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만찬을 통한 주의 만찬 제정(14-20절)
이 특별한 식사는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이 식사가 더 특별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라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때가 이르렀다고 말하며 시작합니다. 그것은 가깝게는 유월절의 때가 이르렀음을 표현하기도 하고, 넓게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때가 이르렀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끝에 있을 오늘의 이 유월절 식사를 사도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사도들과 함께 할 이 식사를 얼마나 간절하게 사모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유월절 식사가 가진 의미가 매우 깊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명절이었습니다. 먼저,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성립을 상징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했음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것만으로도 유월절 식사는 의미가 깊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 깊은 의미로 확장하고자 하셨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이 핍박 중에도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기념하던 이 유월절 시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유월절 식사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희생될 진정한 유월절의 어린 양이 되시려고 오셨음을 알리셨습니다. 즉, 이 시간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 가운데 오신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이 식사를 그토록 원하셨고 그래서 더 특별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기록은 다른 공관복음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누가는 마태(마 26:26-30)와 마가(막 14:22-26)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록합니다. 먼저, 누가는 기록의 순서를 바꾸어 기록합니다. 또한 누가는 마태나 마가와는 다르게 예수님께서 드신 잔을 하나가 아닌 두개의 잔으로 나누어 기록합니다. 이로 인해, 마태와 마가는 주의 만찬 제정 과정을 떡에서 시작했지만, 누가는 잔에서 시작했습니다.

(16-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전통적으로 유월절 식사에서는 4번에 걸쳐 잔을 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집례자가 첫번째 잔을 들고 기도한 후에 그의 앞에 쓴나물, 무교병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후로 가족들에게 무교병을 나눠 주었고, 가족 모두에게 전달되면, 집례자 앞에는 유월절 양이 놓였습니다. 그러면 집례자는 유월절 만찬에 대해서 설명하고 두번째 잔을 들었습니다. 이후로 쓴나물과 무교병, 유월절의 양을 먹었고, 식사가 마무리 되어갈 무렵 가장이 축복 기도를 하고 세번째 잔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잔을 한 번 더 들면서 유월절 식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생각해볼 때, 17절에 언급된 잔은 첫 번째나 두번째 잔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19절에 이르러 사도들에게 무교병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세번째 잔을 들기 전이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세번째 잔에서부터 기록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는 내용을 네번째 잔을 드신 이후로 기록하고 있는데, 누가는 같은 내용을 첫번째 혹은 두번째 잔으로 다르게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모순이라기보다 마태와 마가는 누가에 비해 조금 더 포괄적으로 마지막 식사에 대해 기록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고, 누가는 마태와 마가에 비해 이 마지막 식사가 가진 신학적인 의미를 먼저 전달하고자 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식사 이후로는 더이상 유월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깝게는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때문에 더 이상 유월절 식사를 먹을 수 없다는 의미합니다. 조금 더 확대하면 구약에 제정되었던 유월절의 의미는 없어지고 이제 신약의 주의 만찬으로 확장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곧,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듯이 유대인의 구원의 상징인 유월절 식사가 신약 시대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구원받음을 상징하는 주의 만찬으로 대치되었음을 뜻한다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 더 넓게 생각해보면 유월절 식사는 최종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계 19:6-10). 지금까지의 유월절 식사는 마지막날에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예표였음을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사역이 마무리 되어간다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사도들은 그저 예수님과 더불어 먹는 식사의 교제는 이제 당분간은 없을 것이라고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 의미를 잘 이해를 했든지 아니든지, 예수님께서는 원하고 원하셨던 이 식사의 자리가 가진 의미를 사도들과 함께 나누시며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19-20)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주님은 먼저 떡을 떼셨습니다. 유월절 식사의 세번째 부분, 곧 세번째 잔을 들기 전에 있었던 식사입니다. 이는 무교병을 쓴 나물과 유월절 양과 더불어 먹는 식사였습니다.. 이 떡에 관하여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너회를 위하여 주는’이라는 내용을 추가하여 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누가의 이러한 표현은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대신 찢으심으로 속죄를 이루실 것을 상징한다는 주의 만찬이 가진 대속적인 의미를 보다 더 잘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또한 마태와 마가와는 달리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메시지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 사도들이 자신을 기억해 줄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비록 예수님 자신은 죽음 이후 부활하고 승천하여 없겠지만, 성만찬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구속사역을 기억해 줄 것을 사도들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끝나는 순간, 유대인들만의 유월절 식사가 이제 기독교적인 기념 식사가 되었습니다. 출애굽을 기억하는 수단이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라는 측면을 더해 유월절 떡에 대한 새로운 상징을 부여하셨습니다. 이제 이 떡을 먹을 때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의 찢겨진 살을 기억하며,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저녁을 먹은 후’ 주님께서는 잔을 나누셨습니다. 유월절 식사의 세번째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들고 계신 이 세번째 잔 속 붉은 포도주는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잔에 대해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네’는 ‘전혀 새로운 종류의’라는 의미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류의 언약임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불완전한 짐승 제물을 홈없고 완전한 제물로 대치시키는 언약이었습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흘리게 될 피를 통하여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완전한 속죄를 보여 주시며 이러한 속죄 사역을 기념하는 새로운 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세워지는 새언약, 그것은 죄 사함에 대한 약속을 넘어,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이 포함되어 있으며, 마음에 새겨진 법입니다. 혈통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는 자들을 향한 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바라셨던 이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을 선포하고 이를 기념하게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는 이 마지막 식사를 기억하기 위해 주의 만찬으로 기념합니다. 당시의 마지막 식사와 지금의 주의 만찬이 다른 것은 마지막 식사는 예수님의 희생을 예견하면서 이뤄진 식사였지만, 주의 만찬은 오늘날의 교회가 주의 죽으심을 돌아보고 회상하면서 주의 재림을 고대한다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만찬은 현재의 우리들을 과거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주기도 하고 미래의 그리스도와도 연결을 시켜준다는데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의 만찬은 할 수 있는대로 힘을 써서 참여해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새언약으로 세워진 공동체의 일원임을 기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공간의 한계로 인해 1년에 3번 주의 만찬을 거행합니다. 이 주의 만찬에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배반에 대한 예언(21-23절)
새언약을 세우는 이 거룩한 식탁 위에 배신자의 손이 함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계셨지만, 죽음을 향한 자신의 사역을 위해 끝까지 나아가셨습니다. 이것은 인자이신 예수님께 정해져 있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저 정해진 길을 가시는 것일지 몰라도, 그 분을 파는 악한 사람의 행동에는 분명한 책임이 따릅니다. 예수님을 파는 그의 행동에 정당화할만한 여지를 전혀 주지 않습니다.

(22)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에게는 화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도들, 곧 식탁 위에 손을 올리고 있던 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놀랐습니다. 다만, 식탁 위에 함께 손을 올려두고 있었던, 즉 예수님을 배반하려고 모의를 하고 있었던 한 사람의 놀람과 다른 사도들의 그것은 달랐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우리 안에 배신자가 있다는 예수님의 언급에 놀랐지만, 그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입니다. 그는 매우 당황스럽고 놀랐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어떠한 티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흔히 말하는 포커페이스, 즉 표정을 잘 관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 중에 당황한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눈치를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23)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배반의 대한 예언으로 인해 사도들은 누가 그런 일을 행할 것인가를 궁금해 했습니다. 사도들의 대화의 주제가 옮겨졌습니다. 지금 사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배반의 음모가 아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해 가신다는 사실임에도 말입니다. 마지막 유월절 식사의 의미와 여운은 잊은채, 이 논의에 빠져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이후로 이어지는 사도들의 논쟁들 사이에서 여전히 주님의 죽음을 대비하는 대화는 없습니다.
식탁 위에 함께 손을 올리고 있던 사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신실한 사도인 것처럼 다른 사도들 사이에 섞여, 이 마지막 만찬까지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는 배반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고 원하셨던 이 마지막 유월절의 식탁에는 새언약의 은혜와 배반의 음모가 함께 올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식탁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있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될 사람도 포함되어 있고, 아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주의 만찬을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새언약의 은혜를 입고 살아갈 사람이 있는 반면에, 배반의 음모에 가담할 사람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물론 유다의 배반에 견줄만 한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배반을 오늘날 신앙인의 모습으로 그려본다면, 예수님과 밀접하게 지내고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주를 배척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를 배척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거창해보일 수 있지만, 이 또한 단순화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김으로 불순종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심판이 임한다고 할 때, 농담으로 여겼던 사위들은 이 마지막 유월절 식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 나온 롯과 롯의 처, 그리고 두 딸은 이 식탁에 참여한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남편을 따라서 소돔을 빠져 나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소돔에 두고 온 것에 관심이 더 많았던 롯의 처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고, 그녀는 결국 주를 배척한 사람, 곧 가룟 유다와 같은 그룹에 해당되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는 자신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나를 위해 일하고 있다면, 롯의 처를우리의 마음에 잘 새겨 두어야 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힘으로 삼거나 움켜쥐지 말아야 할 것을 움켜쥘 때, 우리의 마음에는 숱한 소금기둥이 세워진다는 것을 자각하여, 진정 여호와를 나의 힘으로 삼고, 영원한 것들을 꼭 쥐고 살아갈 때, 우리 모두가 새언약의 은혜로 말미암아 최종적인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주님께서 베푸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보며, 우리를 향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을 기억합니다. 은혜와 믿음으로 베풀어진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말로만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고, 마지막 날 천국에서 있을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과의 교제를 원하고 원하시는 주님과 만나기 위해 말씀 묵상의 시간을 얼마나 갖고 계십니까?
2. 주의 만찬은 주님의 고난을 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3.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작정한대로 가시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당신은 순종하고 계십니까?
4. 새언약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여호와를 당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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