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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3:23-29

갈라디아서 3:23-29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율법의 역할-초등교사(23-24절)
어제 말씀을 나눈 바와 같이 갈라디아서 3-4장은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진리인 ‘이신득의(以信得義)_이신칭의(以信稱義)’를 변증하기 위하여 율법과 언약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거짓 교사들의 바르지 못한 가르침에 현혹되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_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심을 강조하는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유대인인가?”라고 질문하면, 그 대답은 “아니오!”일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인’이라는 말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넷째인 유다(지파)에서 나온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유다의 증조부(曾祖父)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사람인가?”라고 질문하면, 그 대답 역시 “아니오!”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인의 우르’입니다. 지금의 이라크 남쪽(쿠웨이트 위쪽)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대아인의 우르까지는 1,600km도 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방 땅에서 가나안으로 왔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고, 유대인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기 약 500년 전의 사람이니까 율법과도 무관합니다. 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고, 믿음(복음)이 온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23-24절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우리말 동사 ‘지다’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짐을 지다’, ‘해가 서쪽으로 지다’, ‘경기에서 지다’, ‘빚을 지다’ ‘꽃이 지다’, ‘흉이 지다’ 등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동사 ‘지다’를 한 가지 뜻만을 고집한다면, 이 동사가 들어 있는 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잘못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양하게 해석해야 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율법’입니다.
‘율법’은 모세오경(창세기-신명기)을 칭하기도 하고, 모세오경에 있는 613가지 조문을 뜻하기도 하고,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로 대표되는 여러 제사를 뜻하기도 하고,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뜻하기도 합니다. 신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복음의 반대 개념’, 할례와 여러 조문입니다.
만약 율법을 다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거나, 율법을 절대화하면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특히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던 것은 그들이 율법을 절대시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삼고, 자신들만 선민이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여 경멸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헬라어 성경에는 ‘믿음’ 앞에 ‘정관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의 다스림을 받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그 율법이 무효하거나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고 합니다.
‘초등교사_파이다고고스’는 문자적으로 ‘개인 교사’, ‘아이를 다스리고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유력한 유대인들은 자기가 부리는 종 중에서 똑똑한 사람을 골라 자기 자녀들이 14-16세 정도가 되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양육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들을 ‘파이다고고스_초등교사(몽학선생)’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의 신분은 종에 불과했지만, 주인의 자녀를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주인의 자녀를 가르칠 때 회초리질도 자유롭게 할 정도였습니다. 주인이 자기 자녀를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을 얼마나 엄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초등교사의 지도를 받는 아이는 그 눈치를 볼 것입니다. 만약 초등교사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주인의 아이를 등교시킬 때, 아이가 길거리에 있는 간판을 읽는다고 천천히 가면, 학교에 늦는다고 야단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인의 아이가 장성했음에도 여전히 초등교사의 눈치를 본다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겠습니까? 자신이 장성했음에도 여전히 초등교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율법주의와 같습니다. 율법의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이러한 역할을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해 드리면 이러합니다.
율법의 역할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거울을 보지 않으면, 우리의 얼굴 상태가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얼굴에 얼룩이 묻어도 모를 수 있고, 머리에 미세먼지로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는 우리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거울입니다. 거울을 통해서 보면 얼굴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반복해서 본다고 할지라도, 더러워진 얼굴이 깨끗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거울을 깨어버린다고 해서 더러워진 얼굴이 깨끗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거울을 보고서 우리의 얼굴이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필요한 것은 또 다른 거울이 아니라, 비누입니다. 얼굴은 비누로 씻을 때 비로소 깨끗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씻는 ‘영원한 비누’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만 우리는 정결해질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 율법의 역할은 ‘진단서’와 같습니다.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으면, 몸 상태를 알려주는 진단서를 받게 됩니다. 체중이나 혈압과 같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몸속 장기의 상태, 뇌의 상태 등 눈으로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것들까지 알려줍니다. 만약 우리가 검진을 받았는데, 우리 몸에 있는 질병이 있고, 그 질병에 대해서 진단서에 아무리 상세하게 기록할지라도 그 진단서가 그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우리 몸에 병이 있고, 그 병이 심각한 상태라면, 의사가 필요함을 더욱 또렷하게 말해줍니다. 병의 상태가 심각할수록 더 뛰어난 의사가 필요합니다.
진단서를 세밀하게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그 진단서를 찢어버린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심각한 상태의 진단서를 들여다볼수록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더욱 또렷하게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병을 고치는 영원한 의사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역할은 ‘계산서’와 같습니다.
계산서에는 지불해야 할 액수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몇십만 원이나 몇백만 원 정도가 아닙니다. 심지어 몇억 원도 아니고, 몇조 원도 아닙니다. 율법의 계산서에는 지불해야 할 액수가 ‘생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누가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 계산서를 찢어버리면 해결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생명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생명의 값을 대신 치러주셨습니다.


율법의 종료-유업을 이을 자(25-29절)
25-29절은 율법의 초등교사의 역할이 끝나고 자유인의 신분이 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그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아래에 있으면 율법은 더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지방법원에서 아무리 무거운 판결을 내려도 고등법원이 무죄라고 하면, 지방법원의 판결은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또한 고등법원이 아무리 중한 판결을 내려도 대법원이 그 판결을 돌려보내면, 그 효력을 상실합니다. 그 믿음의 법,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모든 법 위에 있습니다.

(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옷은 단지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만 입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지만,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입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옷을 입는 격식이 많이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때와 장소, 경우에 맞추어서 입곤 했습니다. 여름에 입는 옷과 겨울에 입는 옷이 달라야 하고, 산에 갈 때 입는 옷과 바다에 갈 때 입는 곳이 달라야 하며, 격식을 차린 파티에 참석할 때 입는 옷과 운동을 하러 갈 때 입는 옷이 달라야 합니다.
옷은 때와 장소, 경우에 따라 입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입은 옷에 걸맞게 사는 것입니다. 군인이 군복을 입으면 군인다운 삶이 요구됩니다. 군복을 입고 술 취한 채 쓰러져 있는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경찰이 경찰복을 입으면 경찰다워야 하고, 의사가 가운을 입으면 의사다워야 하고, 법복을 입은 판사는 판사다워야 하며, 운동복을 입은 운동선수는 선수다워야 합니다.

<파파로티>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상진은 한때 잘나가던 성악가였지만, 지금은 작은 도시 예고 음악선생입니다. 고등학생 장호는 성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조직폭력배입니다. 그 학생을 가르쳐 콩쿠르에 입상하기까지의 좌충우돌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 말미에 장례식장에서 이런 대화가 오갑니다.
장호 : 나 같은 조폭도 성악 잘하면 사람 소리 들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상진(스승) : 네 목소리는 하늘이 내려 준 거야. 그 목소리가 정말 부럽더라. 넌 세계적인 테너가 될 수 있어. 장호야, 너 이제 검은 양복 벗고, 턱시도 입고 살자. 인마, 그게 네 운명이야.
검은 양복은 지금 장례식장에서 입고 있는 상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조폭의 옷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턱시도는 성악가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기름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근무가 끝나고 퇴근할 때, 반드시 기름때가 묻은 작업복을 벗어야 합니다. 기름때로 찌든 옷을 벗지 않고 다른 옷을 입으면,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옷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전의 옷, 이기심의 옷, 욕망의 옷, 세속적 가치관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옷이 빛이 납니다.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우리가 아프리카나 남미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 굉장히 반가울 것입니다. 한국에서 사는 지역 달라도, 나이 차가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구분이 없이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지금은 이 말이 밋밋하게 들리지만, 당시로는 혁명적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헬라인(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옥의 땔감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당시에 자유 시민들은 종을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고, 재산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유대인 남자들은 숫자를 셀 때 여자들은 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고가 팽배할 때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것은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벽을 뛰어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벽을 넘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유업(유산)을 잇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양자’라고 하면, ‘데려온 사람’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양자는 ‘유산을 이을 사람’이 가장 주된 개념입니다. 영화 ‘벤허’에서 벤허가 노예선에서 함대사령관 아리우스(Quintas Arrius) 제독을 살려주고, 그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역할 당시에 초등교사와 같았던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때는 그들이 크게 보였고, 그들은 바울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때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붙잡았던 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은 압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표(師表)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붙잡은 것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군인과 경찰이 군복과 경찰복을 입으면 그 옷을 입혀준 국가가 책임져 줍니다. 의사가 의사 가운을 입고, 간호사가 간호사복을 입으면, 그 옷을 입혀준 병원이 책임져 줍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은 그 옷을 입혀주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영과 진리로 살아가며, 그리스도로 옷 입고,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시는 한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율법을 지켰거나,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 입혀주셨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바라옵나니, 우리가 한평생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율법의 옷을 다시 입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시고, 세속적 가치관의 옷이나 욕망의 옷을 입기보다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하시고, 또 그 옷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때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것이 세상적인 시선으로 어리석게 보이고,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그리스도의 옷이 우리를 지키며, 우리의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 영과 진리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에게 이미 믿음(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왔음에도, 여전히 떨치지 못한 당신만의 율법이나 고정관념은 무엇입니까?
2. 당신을 믿음으로 이끌어준 초등교사는 무엇이었습니까?
3.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옷 입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세상과는 다른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습니까?
4.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며,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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