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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목사 설교 종합입니다. | 설교
2007.03.17 19:04

설교제목 : 마가복음 강해5/"영적무장과 초점"

34절까지의 기록과 같이 사람들이 점점 예수님께 모여들었음. 그럼에도 예수님은 영적 재무장을 위해 기도의 자리에 들어가셨음. 5시간 계속 도끼질한 사람보다 50분 도끼질하고 10분 쉰 사람이 더 많은 양의 일을 하였다는 예화가 있음. 10분 쉰 시간은 도끼의 날을 간 시간이었음.
그런데 기도시간이 바로 이같이 도끼의 날을 가는 시간임.
Ⅰ.영적 무장을 위한 새벽기도의 조건
①새벽 오히려 미명에 기도하여야 함(기도로 하루를 시작)
이렇게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는 다음과 같음
첫째, 오믈 본문 35절 말씀처럼 예수님이 그 모델이 되어 주셨음.
둘째, 하루의 시작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의미가 있음.
셋째, 새벽은 기도하는데 방해받지 않는 시간임.
새벽을 깨우는 민족은 위대한 민족임.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하여 광야시절에 하나님으로부터 먹을 것(만나)을 새벽에 받았음.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음. 오늘날 유대인들도 가장 일찍 일어나는 민족이 되었으며 그 결과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

②나가 기도해야 함(떠나야 함)
"굳이 교회에 나가 기도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음.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35절 말씀과 같이 그 자리에서 기도하지 않고 나가서 기도했음.
믿는 사람은 단절이 필요함. 유대민족의 절기 중 무교절이 있음. 이날에는 발효되지 않는 빵을 먹는 날임. 이스토(효모)를 계속해서 보존하며 빵을 만드는데 사용하다 이날을 기해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날임. 이는 "죄악을 버린다, 죄악에서 떠난다"라는 의미임. 예수님이 하신 모든일도 중간에 단절이 있었음.
기도는 잠자리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기도해야 하며 가장 좋은 곳이 교회임.

③한적한 곳에서 기도해야 함
한적한 곳은 방해받지 않는 곳이며 이는 교회임. 예수님은 많은 사역을 하였음에도 지치지 않았음. 이는 기도의 엔진이 쉬지 않았기 때문임.
선교가서 아픈사람 없음. 이는 열심히 기도하기 때문임. 아픈 사람 나오는 경우 이는 영적으로 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임. 교회는 활력이 필요하며 영적인 다이나믹스가 있어야 함. 새벽기도를 통해 이런 활력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람.

Ⅱ.사역의 초점
예수님은 사역의 초점이 분명했음. 37절 말씀처럼 모든 사람이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으셨음. 이렇게 사명자는 흔들리지 않는 바, 이는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기도에 열중하기 때문임. 할 수는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은 소중한 일이며 이는 사명이 무엇인지 알 때 가능함. 예수님도 38절 말씀과 같이 말씀의 씨앗 뿌렸음. 이같이 부단히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이 사명자의 길임.
우리도 사명에 분명한 초점 맞추고 그 사명 붙잡고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임.끝.
설교제목 : 마가복음 강해6/"최선으로 이웃을 돕는 길"

오늘은 우리의 고유명절인 설날임. 많은 사람을 만날터인데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만남에 무게를 두기 바람. 이웃과 친척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만나기 바람. 그럼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보기로 함.

Ⅰ. 이웃과 친척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① 믿음으로 도울 수 있음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를 네사람의 친구가 지붕을 뜯어 상을 내려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는다는 내용임. 5절 말씀처럼 이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변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음. 우리도 내 능력으로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게 함으로써 도울 수 있으며 우리는 그의 도구일 따름임.

설교는 예수님 만나게 하는 것이며 변화시키는 것은 예수님임. 요한복음 6장 28절에서 ꡒ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ꡓ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ꡒ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ꡓ고 하셨음.

이같이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 믿어주고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일 하는 것임. 그러면 그 믿음이 일하는 것임. 친척들을 만날 때 믿음으로 도울 수 있기를 바람.

② 행동으로 도와야 함

중풍병자의 친구 네명은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 주었음. 야고보는 행함이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였음. 행동은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진정한 믿음은 우리의 행동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됨.

4절 말씀에서 친구들은 많은 사람의 무리 때문에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 없었음. 이같이 전도와 희생 앞에는 장애가 있음. 그러나 거기서 포기하면 진정한 믿음이 아님. 사랑은 장애를 뛰어넘는 것임.

믿음은 방법을 찾는 것이며 다른 사람 다 못하는 상황에서 길 만드는 것임. 방법을 찾는 도움,그런 도움을 우리의 이웃과 친척에게 주어야 함.

Ⅱ.결과적으로 주어지는 것들

① 죄사함을 받음

5절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ꡒ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ꡓ고 선포하심.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려왔을 때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고 죄문제를 다루었음. ꡒRadical(급진적인)ꡓ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ꡒRoot(뿌리)ꡓ임. 그리스도인들은 죄사함을 다루며 이는 결국 뿌리의 문제를 다루는 것인 바, 결과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Radical(급진적)할 수 밖에 없음.

② 당장의 문제인 질병도 고쳐주심

중풍병자는 죄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질병까지 고침 받았음. 우리도 친척들을 예수께 데려옴을 통해 죄문제 뿐만 아니라 눈앞에 닦친 현실의 믄제도 해결 받을 수 있음.

12절에서 ꡒ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ꡓ라고 하였음. 우리도 전도하면 이러한 영광을 목도할 수 있음.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도하며 이러한 영광 볼 수 있기를 기원함.


마가복음 강해8/`의식있다 하는 자의 몰상식`(마가복음 2:18~22, 2월 15일 새벽기도)

바리새인들은 의식이 있다고 칭함을 받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자부하였음.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말은 옳은데 행동이 문제였음. 우리도 이렇게 흐를 가능성이 있음. 바리새인들의 의식과 행동의 문제점을 봄으로써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함.

Ⅰ.자신의 헌신이 다른 사람의 공격자료가 되어서는 안됨

18절에서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공격하고 있음. 그러나 자신의 헌신과 금식은 하나님께 드리면 됨. 바리새인들은 1%의 헌신과 99%의 자랑으로 살아감. 우리도 기도 많이 할수록 기도 안하는 사람 눈에 보이기 쉬움. 헌신하는 사람이 상처받기 쉬움, 자신은 최선의 모습만 보고 남에 대해서는 최악의 모습을 봄.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할수록 하나님 영광 보여야 함에도 헌신하지 않는 다른 사람이 눈에 뛰면 이는 병들고 있음. 하나님에 대한 알량한 헌신이 다른 사람의 공격재료 되지 않는 자가 되길 기원함.

Ⅱ.타이밍이 중요

19절에서 예수님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 금식할 수 없으며 신랑을 빼앗길 그 날에 금식하라"고 말씀하심. 전도서 3장에서도 때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음.
전 교회가 전도할 때, 전도만 하면 다냐? 전 교회가 교제할 때, 교제만 하면 다냐?라고 공격하는 자가 있음. 이 말은 맞는 얘기일 수도 있지만 틀린 시각임. 전도의 때가 있고 교제의 때가 있음. 그 때에 그것에 전념하여야 함. 10대에 할 일이 있으면 20대에 할일이 있음.
때에 맞게 할일 다하는 사람이 되길 기원함.

Ⅲ.초신자에 대한 배려와 의식이 있어야 함

22절에서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음. 이 말씀은 초신자를 너희 바리샌인들처럼 오래 믿은 사람의 기준에 의해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임. 훈련시키는 초기에는 초신자를 너무 엄격한 기준에 의해 판단하지 말아야 함. 교회는 인내심이 있어야 함.
링컨의 오른팔 역할을 한 그랜트 장군은 술꾼이었으나 링컨은 그의 장점만 보아 그를 중용하였음. 우리는 약점 때문에 기죽는 문화가 아니라 강점 살리는 문화로 만들어야 함.
베드로는 불 같은 성격, 바울은 담즙질적 성격의 단점이 있었으나 그들은 장점으로 일하였음. 교회도 위험 보지 말고 기회 바라보아야 함. 또한 약점 바라보지 않고 장점 바라보아야 함.
교회의 진정한 파워는 연약한 사람의 장점과 가능성 바라보는데 있음. 그러면 바리새인들의 비판적 시각이 아닌 건설적 대안 제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음.


삼손(1) `실패한 자리의 의미`(사사기 13:1~14, 2월 17일 주일낮 예배)

오늘부터 약 10주간에 걸쳐 삼손에 대해 보기로 함. 성경상의 인물중 삼손만큼 흥미를 끄는 사람이 없을 것임. 삼손은 육체적으로는 강한 사람이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는 가장 약하게 산 사람이었음. 결국 하나님의 은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음.

삼손의 이야기는 그의 어머니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됨.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가장 힘없고 약한 단지파 사람이었음.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자식이 없었으며 이는 당시 고대문화로 볼 때 세상적으로 실패한 사람이었음. 삼손의 이야기는 이러한 실패자인 부모의 이야기에서 시작됨. 오늘은 앞으로 전개될 삼손에 대한 첫번째 시간으로서 실패자 부모의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보고자 함.

Ⅰ.실패한 자리는 신앙과 인내를 증명하는 자리임

삼손 이전 사사 중 입산이라는 사사가 나옴 12장 8절에 의하면 아들 30명 딸 30명이었음. 사사기는 암흑의 시대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던 시대였음. 자기 힘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사사기 시대의 사고방식이었음. 그런데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음. 이브라함까지도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어려고 하였던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놀라운 일이라 할 것임.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주실 때 까지 기다리는 것임. 실패의 의미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며 기다리라는 의미임. 요셉은 실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으며 마침내 30세때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음.

실패의 자리에서 인간적인 방법 취하지 않을 때 우리의 믿음이 더욱 빛남. 사울이 전쟁에서 사무엘이 오지 않자 인간적인 방법, 즉 자신의 방법으로 제사를 지내다 망했음. 반면 예수님은 굶고 있는 상황에서도 사탄의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음.

실패의 자리는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자리이며 우리의 인내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자리임. 인간적인 방법 아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기를 기원함.

Ⅱ.실패의 자리는 부흥을 위한 모판임

삼손은 12번째 사사였음. 사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임. 삼손의 대안이 사무엘임. 사무엘이 사사시대를 종결짓고 왕국시대로 넘어가게 하였음. 그러므로 삼손에 대해 하나님은 많은 은혜 부어주셨음.

수태고지를 한 사람은 삼손과 사무엘 세례요한과 예수님임. 이상의 네명은 한시대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람들임. 삼손은 구속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임. 하나님은 일하실 때 모판을 준비하심. 그리고 그 모판은 어머니가 되었음. 삼손의 어머니,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세례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임.

신앙의 토대는 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많고 그러므로 어머니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함. 마노아와 마노아의 아내는 한없이 낮아지는 경험을 하였음. 사사기의 막가는 시대에 있어 등불과 같은 역할 하였음.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해서 겸손을 배웠기 때문임. 그러므로 고난은 모판의 역할을 함.

축복과 안일 속에는 독이 있음. 하나님은 은햬 주시면서 그 해독작용으로 고난을 주심. 삼일교회도 많은 불편함과 어려움 있지만 이것은 미래에 하나님이 엄청난 일 이루실 징조이며 모판임. 초대교회도 엄청난 핍박이 있었지만 이는 부흥을 위한 모판이 되었음.

실패만 보지 말고 부흥의 모판, 하나님의 영광의 모판을 볼 수 있는 자들이 되긱를 기원함.

Ⅲ.우리는 성령의 힘만으로 살아갈 수 있음

4~5절에서 삼손의 어머니에게 장차 삼손을나실인과 같이 살아가게 할것을 말하심. 나실인은 구별된, 하나님께 서원한 사람임 .나실인의 서약은 세가지로서 민수기 6장에 언급되어 있음. 즉,술 마시지 말 것, 머리 자르지 말 것, 사체 만지지 말 것임.

신약시대에는 우리 자신이 바로 나실인임. 머리 자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외적 표시를 의미하며, 시체 만지지 말라는 것은 정결함을 의미하며 술취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음.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다른것에 영향은 받을 지라도 지배를 받아서는 안되며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야 함.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아라"고 말씀하고 있음. 우리 성도가 드리는 십일조는 돈에 대한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며 또한 성도들은 술의 힘, 도박의 힘, 사치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음.

우리가 실패의 자리에 들어가면 성령의 힘으로 살아감. 교회의 힘도 성령의 힘이며 우리 가정의 가장 강력한 힘도 성령의 힘임. 사도행전 6장 4절 ꡒ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ꡓ는 것은 "강점 가지고 일하겠노라"와 같은 말임. 실패의 자리는 내강점 무엇인지 알게 하는 자리이며 오직 성령의 힘으로 살게하는 자리임.

오늘 말씀을 요약컨대,,삼손의 가정은 비록 실패한 가정이었지만 그 실패는 의미가 있었음. 그 실패는 ①믿음을 증명하는 기회였었고 ,②거기는 끝이 아닌 엄청난 미래가 있는 모판이었으며, ③가장 중요한 것 깨닫게 하고 성령 붙잡고 살게 하는 자리였음.

설교제목 : 마가복음 강해 "새바람을 일으키는 적극적인 신앙"

오늘 본문은 안식일에 대한 논쟁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로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 안식일에 왜 병자를 고치는가?라는 것임.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일성수가 자유를 주는 것이며 구속이 아님.
주일성수가 얼마나 능력이 되고 기쁨이 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하며 압박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됨. ꡒ하지 말라ꡓ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니며 ꡒ그렇게 사는 것보다 훨씬 멋진 인생ꡓ 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이 필요함.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사람 잡는데 썼음.
그럼 안식일에 대해 네가지로 분석해 보고자 함.

Ⅰ. 생산과 일을 그치고 압박과 근심을 그치는 것

주일에는 모든 일 그쳐야 함. 그리고 가는 방향 생각하고 묵상하고 점검하는 날임. 이런 사람은 일주일 뿐만 아니라 하루도 이런 패턴으로 살아감. 즉, 저녁에는 그날 계획했던 일 완수 못했더라도 기도하고 자는 사람임.

시편 5편 2절 ꡒ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ꡓ 는 말씀처럼 안식일은 무조건 하던 일 중단하는 날이며 걱정과 근심 그리고 모든 일 쉬는 날임.

Ⅱ.쉬는 것

이에는 육적 쉼뿐만 아니라 정서적, 영적 쉼까지 포함함. 이를 위해 예배가 있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회복을 경험하게 됨.

잘 쉬는 사람이 잘 일하는 사람임. 새벽기도는 전날 일찍 자고 잘 쉰 사람이 참가함. 출애굽기20장 9절에서 ꡒ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다할 것이라ꡓ고 안식일의 규례를 설명하였음. 이같이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쉴 수 있음.

Ⅲ.받아들이는 것

기독교 공동체의 가치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임. 잘 받아들인 사람이 강한 사람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 가치와 비전을 많이 받아들일수록 일주일을 승리할 수 있음.

Ⅳ.축제

안식일은 또한 축제의 날임. 음식과 애정의 향연, 그리고 영혼 사모의 향연이 있어야 하며 기쁨이 있어야 함. 초대교회는 함께 떡을 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음. 이같은 안식은 축제와 기쁨의 날이며 이러한 축제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매 주기마다 있어야 함.
설교제목 : 마가복음 강해 "효과적인 과업완수의 핵심"

예수님은 사역에 있어 최고의 효율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최고의 사역의 열매를 맺었음. 예수님이 사역을 이루시는 방법을 보기로 함.

Ⅰ. 군더더기가 없는 사역

9절 ꡒ배를 등대하라ꡓ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잘 활용했으며 가장 기동력이 강하였음. 교회도 사역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도구를 활용하는 것이 필요함. 또한 사역은 과학적 발전에 따라 달라져야 함.

전통적 관념에서의 span of control은 12명이었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한계에서 커뮤니케이션의 한계가 논란이 되고 있음. 그러나 잭 웰치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었음. 예수님도 당시의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뛰어넘었음.

우리는 전도함에 있어 전달의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전달의 내용이 중요함.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 즉, 생명과 약속과 말씀을 그안에 담아야 함.

Ⅱ.예수님은 감정전달의 마술사

5절에서 "근심하고 노하셨다"고 기록했듯이 예수님은 감정이 풍부했음. 일 잘하는 사람은 감정을 기막히게 활용하는 사람임. 기쁠 때 생산성 있는 일을 하여야 하며 슬플 때는 사람을 움직이는 글을 써야 함.

이같이 기쁠 때나 슬플때나 최선을 다해 그 감정상태를 활용해야 함. 두려움과 기쁨 그리고 슬픔을 표현하고 이를 사역과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함.

Ⅲ.할 수 없어도 순종하면 역사가 나타남.

5절 기록 "손마른 자가 손을 내민다"는 것은 앞 뒤 말이 되지 않음. 그러나 안되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왔음. 내 분석 아닌 내 상황 아닌 모습으로 오로지 순종할 때 해결 받았음.

교회 안에서 자기 분석 통해 부흥 있은 것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ꡒ주만 바라볼찌라ꡓ는 심정으로 순종하며 나아갔을 때 부흥이 있었음.

설교제목 : 삼손(2) "거절을 통한 승화"

오늘은 삼손 두번째 시간으로서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를 통해 하나님께서 삼손을 주시기 이전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임하였는지 보기로 함.

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였음

3절 말씀과 같이 마노아의 아내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였음. 마노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경험하였다는 그의 아내의 말을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아내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음. 그리고 8절 말씀과 같이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사모하였음.

세상사람은 많은 것에 목말라 하고 있으며 그 목마름은 대부분 채움을 받음.그러나 의에 대한 목마름, 영광에 대한 목마름은 많지 않음.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번 체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 33장 18절 말씀처럼 ꡒ원컨대 주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이소서ꡓ라고 영광을 사모하였음. 그 결과 그의 삶 전체가 신명기 33장 18절 말씀처럼 ꡒ여호와를 대면하여 아는 자라ꡓ는 평가를 얻었음.

환경의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수록 본질로 돌아가야 함. 마노아는 자기의 아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고 ꡒ나에게도 영광 보게 하옵소서ꡓ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였음. 그 결과 하나님은 마노아에게 그 아내보다 더 많은 비밀과 계시를 주셨음. 이는 환경을 통해 본질로 돌아갔기 때문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안주하면 안됨. 나보다 앞선 사람이 있으면 그를 시기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본질을 추구하여야 함. 즉, 환경을 통해 본질을 자극하는 신앙이 되어야 함.

에스겔서 4장 말씀에 나오듯이 물이 무릎에 찰 때 만족하지 않고, 배에 찰 때도 만족하지 않고 헤엄칠 정도로 충만해야 만족이 있어야 하며 이때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음.

Ⅱ.거절당함이 도리어 축복이 되었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는 그를 대접할 생각을 하였음. 그러나 그는 그 대접을 사양하였으며, 대신 예배를 강조하였음.( 16절)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가 사람인줄 알고 대접하려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께의 예배를 강조하였음. 거절하였지만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upgrade된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였음.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였음. 그는 초막 셋을 짓고 산상에 있고 싶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산상에서의 안주가 아닌 현장으로 나갈 것을 명하였음. 이세상이 어둡고 모순될지라도 현장으로 나갈 것을 명하였으며 베드로는 거절을 통한 성장을 맛보게 되었음.

우리는 하나님께 이것 하나만 꼭 들어달라고 기도했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할 때는 낙심하기 쉬움. 그러나 마노아가 거절당함을 통해 성장이 있었듯이 거절이 바로 축복의 통로가 됨.

로마서 5장 3절 이하 말씀ꡓ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이 연단을 연단이 인내를 인내가 소망을 가져올 줄을 우리가 앎이라ꡓ는 말씀처럼 환난으로 시작햇으나 그것은 소망으로 끝나기에 거절당함이 도리어 축복이 되는 것임.

Ⅲ.예배의 부흥이 먼저 있었음

마노아는 그다음에 예배를 드렸음.(19~20절)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 이전에 결코 우리를 통한 세상의 변화를 주시지 않으며, 우리가 부흥되기 이전에 결코 우리를 통한 세상의 부흥을 주지 않으심. 성경 어느 곳에도 성도의 변화 없이 세상을 변화시킨 예는 없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그 예배의 부흥을 통해 우리의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음. 예배의 부흥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기원함.

설교제목 : 최악에서 최선을 이루는 법

Ⅰ. 전진하는 신앙이 되어야 함

오늘 본문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기 이전 두명의 정탐꾼을 여리고 성에 정탐꾼으로 보내는 줄거리임. 이 상황은 이전 10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의 상황과 다름. 이전에는 가나안에 들어갈찌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요단강 이전에 경계가 삼엄한 상황이었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위험한 상황이든, 아닌 상황이든 전진해야 함. 부딛치면 하나님이 길 열어 주심. 히브리서 10장 36절에서 ꡒ너희가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ꡓ고 말씀하셨음. 믿음으로 나타내는 것은 전진하는 신앙을 말함.

여리고 성은 크지 않은 성이었으며 그래서 두명의 정탐꾼이 쉽게 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음. 그러나 하나님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도울 자를 보내 주심.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와 대적함에 있어 도울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까마귀가 와서 도와 주었으며, 삼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상황에서 여우 300마리를 동원하여 블레셋의 지경을 불지르게 함. 이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도와 주심.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순종의 자리에 서 있느냐 여부임.

최악에서 최선을 이루는 것은 믿음 가지고 전진할 때 가능함. 하나님의 믿음 가지고 전진하는 사람 되길 기원함.

Ⅱ.믿음 하나에 모든 것 희생할 수 있어야 함

라합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음. 단지 소문으로 하나님에 대해 들었을 뿐이었음. 10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 주셨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음.

그러므로 우리가 할일은 씨뿌리는 것임. 몇마디가 영혼을 변화시킴. 예수님 십자가 오른편 강도가 "나를 변화시키소서"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음. 지도자는 결정적인 순간, 문제를 해결해야 할 다급한 순간 말씀하나 던질 수 있어야 함. 말씀 하나에 인생을 던지고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어야 함.

라합은 소문으로 듣고, ꡒ상천하지에 유일한 하나님ꡓ이라는 말씀 하나에 그의 인생을 걸었음. 우리는 많은 말씀 들었음에도 이기적이며 안락을 추구하며 사명 저버리고 불평하며 살아가고 있음.

라합은 말씀 하나에 목숨을 걸었음. 정탐꾼을 통해 영접한 것 그자체가 희생이었음. 예수 믿는 것은 희생임. 희생없이는 이룰 수 없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가정의 안락함, 건강, 학위 따는 것,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포기할수 있어야 함. 열매맺는 방법은 간단함. 즉, 희생하는 것임.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ꡒ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ꡓ 고 말씀하셨음. 젊은이가 큰 일 이루기 위해 죽음까지 각오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 일 크게 이룰 수 있음.

Ⅲ.믿음으로 희생하였을 때 주어진 축복(라합의 경우)

마태복음 1장 4절에 예수님의 족보가 나옴. 라합의 남편은 살몬으로서 그는 나손의 아들임. 나손은 민수기 7장 2절의 기록과 같이 유다지파의 대표임. 즉, 기생 라합은 유다지파의 며느리가 되었으며 또한 라합에게서 룻의 남편 보아스가 났음.

또한 라합은 다윗의 고종 할머니가 되었으며 메시야가 그 족보에서 나왔음. 라합은 기생, 이방인라는 최악의 조건 지녔으나 믿음으로 희생한 결과 이런 영광스런 모습으로 드러났음. 그는 온 목숨을 거는 믿음으로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음.

이같이 우리도 믿음으로 우리 인생을 끌어가면 빛나는 인생이 될 수 있음. 내 영광 다버리고 내 삶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울 때 세상을 끌어가고 변화시킬 수 있음. 하나님 핲에서 그런 영광 담는 그릇 되길 구하고 간구하는 성도가 되길 바람.


설교제목 : 삼손(3) "강점사역,약점관리"

Ⅰ. 강점에 집중하여야 함

삼손에 관한 기록의 시작인 13장에서 천사의 수태고지에 의한 삼손의 출생을 보았음. 이에 따라 우리는 14장에 들어 삼손에 대한 큰 기대를 갖게 됨. 그러나 14장에서의 삼손은 여자에 빠져 헤메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

이같이 삼손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장점도 있고 약점도 가지고 있음.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장점 가지고 일하지만 실패하는 사람은 약점에 매어달림. 성경은 우리에게 ꡒ강점에 집중하라ꡓ고 가르치고 있음. 삼손은 받지 않은 능력으로 일하려다 어려움에 빠졌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강점 주셨으며 그러므로 그 강점 가지고 일할 때 열매가 있음. 링컨이 탁월했던 이유는 강점 가지고 일했기 때문임. 그가 북군의 총사령관으로 세운 그랜트 장군은 술꾼이었지만 그의 강점을 보고 중용하였음.

사람은 다음 두가지 중의 하나의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음, 그 하나는 하자없는 사람 쓰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장점 탁월한 사람 쓰는 것임. 그런데 큰 일 이루는 것은 하자는 있더라도 장점 탁월한 사람 쓸 때 가능함.

ꡒ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ꡓ라는 로마서에서의 말씀처럼 성경상 인물 중 단점 없는 사람 없음. 그러므로 약점보다는 강점 가지고 마음껏 일하여야 함. 삼손이 그의 강점 가지고 기도에 집중했다면 엄청난 일을 했을 것임.

Ⅱ.겸손하게 나아갈 때 약점 가운데 더 크게 일할 수 있음

삼손의 결정적인 약점은 여자에 약하다는 것임. 삼손이 14장에서 첫번째 한 말이 ꡒ내가 여자를 보았노라ꡓ였음. 이와 비슷한 사람이 다윗이었음. 그는 광야에 도망다니면서도 4명의 여자를 얻었음,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와의 범죄 이후 그 죄를 남에게 돌리지 않고 ꡒ내가 범죄하였도다ꡓ고 회개하였음.

삼손은 한마디로 보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음. 고리도후서 5장 6절에서 ꡒ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다ꡓ고 말씀하고 있듯이 신앙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보는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임.

한국사람의 약점 중 하나는 삼손처럼 너무 감정적이다는 점임. 감정은 파괴하는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나 세울 수는 없음. 그러므로 감정은 기도할 때 쏟아 부어야 하며 사랑할 때 사용하여야 함. 대신 문제를 해결할 때는 사실에 기초하여 냉정한 이성으로 하여야 함.

겸손보다 강한 힘은 없음. 승승장구할 때 넘어질 수 있음, 그 이유는 교만해지기 때문임. 9월 11일 월드트레이드 센터 테러 이후 미국 부시가 용서하고 화해를 구했더라면 미국은 이미 보유한 경제적, 군사적 힘 뿐만 아니라 도덕적 힘까지도 부여받을 수 있었을 것임. 그러나 보복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민간인을 죽게 하였으며 그 결과 빈 라덴을 잡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지도 잃게 된 결과를 초래했음.

그러므로 스스로 죽는 방법이 필요함. 예를 들어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화해를 선포하고 반대자를 용서한 결과 대통령에 물러난 이후에도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음.

바울이 고린도후서 12장의 기록처럼 삼층천의 천국을 경험한 이후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를 보여 능력을 크게 더해 주셨음. 이어서 바울은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번 기도하였으나 하나님은 ꡒ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ꡓ라고 응답하였음. 이는 고린도후서 12장 7절 ꡒ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ꡓ는 말씀처럼 바울로 하여금 더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임.

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려고 약점 주심. ꡒ 능력의 심히 큰 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도다ꡓ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내 컨디션 내기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약함 가지고 더 크게 일할 수 있음.

하나님은 은사를 주시기도 하지만 약점 속에서 약함 가운데 더 크게 일할 수 있음. 바울은 가말리엘 문화에서 공부한 그 학문적 지식이라는 장점 통해 기독교신학의 기틀을 세웠으며, 또한 육신의 가시라는 약점 때문에 더 기도하고 겸손의 자리로 나아갔음. 이같이 그는 강점 가지고도 일했지만 또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음.

찰스 스윈돌 목사는 실제 이땅에서 벌어지는 일은 10%이며 90%는 태도 때문에 결정된다고 하였음. 세번 실패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할 때 어떤이는 ꡒ나는 겨우 세번 실패했다ꡓ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ꡒ나는 이제 실패자다ꡓ고 말함. 성공하는 사람은 두말할 필요없이 전자임.

우리는 모든 일을 생산적인 것에 전념하여야 함. 강점 있으면 그 강점 가지고 마음껏 일하되 약점 있으면 그 약점 가운데 그 약점 속에서 일하여야 함.

설교제목 : 새출발 선상에 놓인 사람들

오늘 본문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의 모습임.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의 앞에는 문제가 연속하여 있어 왔음. 이같이 성도의 평생의 삶도 문제의 연속임. 중요한 것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임.

새학기 그리고 새로운 계절을 맞아 우리 앞에 많은 문제가 놓여 있음. 요단강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새로운 시작을 앞에 둔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능력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음. 그럼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보기로 함.

Ⅰ. 최선을 다하는 모습

1절에서 ꡒ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ꡓ 라고 기록하고 있음. 우리는 이같이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 최선을 다해야 함.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도 ꡒ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ꡓ고 말씀하셨음.

이스라엘 민족이 시작할 때 최선을 다했듯이 우리도 하루의 시작에 최선을 다해야 하며 이는 새벽기도임. 요한계시록 2장 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어야 함.

Ⅱ.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

2~4절에서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요단가을 건널 때 언약궤를 따를 것을 명하고 있음. 언약궤는 하나님 말씀이며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맨앞에 두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음.

우리도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 따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런한 사람이 강한 사람임. 말씀을 듣고 결심이 있어야 그 말씀이 내 인생을 끌어갈 수 있음.

예수님은 성도를 목자를 따르는 양에 비유하셨음. 양이 목자의 음성 듣고 따라가야 살 수 있듯이 성도는 하나님 말씀 뒤따라 가야 살 수 있음. 듣는 것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며, 따라서 우리는 듣는 것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야 함.

시편 17편 15절 "내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ꡓ라는 말씀처럼, 말씀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함.

Ⅲ.내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함

5절에서 ꡒ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ꡓ고 말씀하고 있음.하나님은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을 원함. 우리자신의 그릇이 깨끗해질 때 하나님은 얼마든지 부어주심.

부흥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의 말씀을 신실하게 잘 증거해야 함. 다음으로 그 말씀을 받는 성도의 마음밭이 좋아야 함. 그러므로 먼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목회자는 성도의 마음이 옥토가 되도록 기도해야 함.

여호수아가 가나안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ꡒ스스로 정결하라ꡑ는 말은 은혜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임. 새학기를 맞아 새롭게 시작하면서 주변사람 탓하지 말고 스스로 성결해지는 것이 필요함.

다윗의 위대성은 밧세바 탓하지않고 ꡒ내가 범죄하였나이다ꡓ라고 자복한 것임. 내가 변화되어야 세상이 변화됨. 이것은 ꡒ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킨다ꡓ는 성도의 자부심이기도 함.

Ⅳ.믿음

8절에서 ꡒ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ꡓ고 말씀하고 있음. 즉, 믿고 행하라는 뜻임. 성화란 믿음의 점진성을 말함. 광야에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였으나 그다음에는 언약궤를 통해 한나님 임재를 체험하였음. 그리고 신약시대 들어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으며 이제는 우리의 삶 가운데 아무런 표징 없더라도 하나님을 믿게 함.

예수님이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지역에서 도리어 사람들의 믿음이 약했으나 이적 행하지 않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이 더 강하였음.

믿음이란 보고서 믿는 것 아니며 도리어 믿으면 보이는 것임. 요단강을 앞에 두고 이스라엘 민족이 새롭게 무장한 것처럼 우리도 새롭게 시작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재무장하여야 할 것임.

Ⅳ.결론적 말씀

우리는 종종 양(量)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음.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가 서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주고 있지만 알렉산더가 헬레니즘 문화를 심은 기간은 고작 12년 8개월밖에 안됨.
예수님도 3년이라는 짧은 공생애를 살면서 그 많은 사역과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음.

따라서 새롭게 시작함에 있어 많은 것 행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 말씀을 붙잡아야 함. 그리할 때 하나님 영광 보여줄 수 있으며 많은 열매 맺을 수 있음.


설교제목 : 삼손(4) "인생의 포도원에 사자가 나타났을 때"

Ⅰ. 누구나 죄지을 수 있으나 있는 그대로 나아와야 치유가 있음

오늘 본문에는 삼손이 이방여인과 결혼하는 불순종한 모습 나옴. 결혼은 영적인 의미가 있으며 이방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범죄임.

우리는 죄라는 것을 알면서 죄지을 수 있는가? 삼손과 같은 사명자가 그 사명 저버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음. 그런데 그 답은 ꡒ그렇다ꡓ임.

로마서 7장 15절 이하에서 ꡒ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ꡓ 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누구든 흔들릴 수 있고 죄지을 수 있음.

빌하일스 목사님은 ꡒ인격이란 남이 보지 않을 때의 나의 모습ꡓ이라고 하였음. 우리는 외면적 타이틀과 껍데기 안에서 살기 쉬움. 그러나 우리는 껍데기 다 버려야 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본연의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함.

마가복음 2장 17절 ꡒꡓ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러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러러 왔노라ꡓ는 말씀에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서 모든 가식 버려야 함.

예배가 안식과 재충전의 시간이 되지 못하고 피곤한 예배가 되는 이유는 가식으로 서기 때문임.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와야 치유와 하나님의 돌보심이 있음.

Ⅱ.하나님이 경고하실 때 묵상하여야 함

하나님은 불순종한 백성에게 경고하시는 알람 시스템을 작동시키심.오늘 본문 5~6절에서 하나님은 불순종한 삼손으로 하여금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나게 하심.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임.

하나님은 불순종한 사람에게 말씀으로 환경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자녀로 경고를 주심.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묵상하여야 하며, 이는 말씀을 듣는다고 다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의미를 잡아 내안에 들어가 흡수되어야 함.

우리는 묵상이 아닌 소유(to have)에 너무 집착하고 있음. 어느 대학 나왔는지 또한 집의 크기, 자동차의 종류, 사회적 지위가 무엇인지보다는 어떻게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하는지가 중요함.

갈렙은 그가 40세 때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ꡒ네 발로 밟는 땅을 네게 주리라ꡓ는 말씀을 45년간 마음에 간직하고 그가 85세 때 ꡒ그날에 내게 주신 그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ꡓ(여호수아 14: 12) 라고 하나님께 구하였음. 그의 능력은 묵상에 있었음.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차이는 묵상의 능력이 있느냐 여부임. 이방종교는 자연을 보고 섬기지만 기독교는 자연을 객관화하여 연구하고 그래서 그자연을 다스린다는 차이를 보이고 있음.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실수 할 수 있지만 그 실수를 분석하고 묵상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함. 작년의 나의 모습보다 올해의 나의 모습이 다르며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 함. 이것이 바로 성화임.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성장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성도가 아니며 이방인임.

심손도 사자를 만났을 때 묵상하여야 했음. 그가 이때 영적 각성을 했더라면 위대한 인생이 되었을 것임. 하나님이 고난 주신 이유는 궤도 수정하라는 경고임. 우리는 성도라 하면서 성공과 돈에 미쳐 있음. 우리가 행복에 취해 있을 때 하나님은 사자 보내 주심. 이때 우리는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사랑과 감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함.

고난은 막대한 영적 에너지 창조의 힘이 있음. 바울 서신 대부분은 옥중에서 쓰여졌으며 요한은 밧모 섬에서 요한 계시록을 썼음. 마틴루터킹은 남부 버밍햄 수용소에서 사랑과 희망과 꿈을 주는 글을 썼음.

Ⅲ. 주신 은사 가지고 본질에 집중하여야 함

삼손에게는 힘이 있었지만 방향이 틀렸음. 많은 은사 주었지만 여자 꽁무니 따라 다니다가 , 복수하다가 세월 다 보내었음. 우리는 이제 to have 를 자랑할 것 아니라 to be를 자랑하여야 함.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칭찬 즉 ꡒ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ꡓ는 말씀처럼 가진 것 가지고 자랑하지 않고 주신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여야 함.
사도행전 3장에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ꡒ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ꡓ고 말하였을 때 그가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음.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동전 몇닢 주고서는 구제하였다고 자랑하였을 것임. 그러나 그들은 기도를 통해 본질과 핵심에 접근하였으며, 기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주신능력을 보여 주었음.

기도할 때 집중하는 인생, 기여하는 인생, 섬기는 인생이 될 수 있음. 기도함으로 이러한 인생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함.
설교제목 : 나는 성령의 삶인가?

Ⅰ.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로마서 7장 24절 ꡒ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ꡓ는 바울의 고백은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의 고민임. 우리의 신앙이 말로만 하는 신앙,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은 능력이 없기 때문임.

이제는 성령을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 fact로 인식하고 드러내야 함. 귀신이 들어와도 사람이 바뀌는데 하물며 성령이 임재한다면 우리의 모습도 바뀌어야 정상임.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과거의 나쁜 습관을 끊지 못하고 있음. 설교자인 본인도 젊은 시절 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음.

또한 과거에는 무종교인 대학생에게 만일 종교를 가진다면 무슨 종교를 가지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대부분은 기독교를 믿겠다고 답하였음. 그러나 지금은 교회 짓겠다면 주민이 반대데모를 할 정도로 기독교는 빛을 잃어버렸음.

우리나라는 노와 사, 보수와 진보, 남과 북, 동서간에 갈등이 존재하고 있음. 우리 성도는 이러한 갈등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음. 이는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없어 못하고 있음.

중국을 공산화한 것은 많은 군대도 아니라 이득수와 진대수라는 의식화된 두사람이었음. 변화된 작은 무리의 힘이 엄청난 힘이 있음. 성령의 사람이 되어 자신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어떠한 갈등도 그안에 들어가서 해결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함.

Ⅱ.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 시점에서 나는 과연 성령의 사람인가? 자문할 필요가 있음.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생각의 주체가 성령이 되어야 하며 성령의 소욕을 적용하여야 함.

① 생각의 주체가 성령이 되어야 함

성령이 충만하면 생각의 주체가 성령이 됨. 성령은 결과부터 보는 것이 아니라 동기(생각)를 봄. 매주일 예배 때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꼭 옳다고 볼 수 없음. 지은 죄는 회개하여야 하지만 성령에 힘입어 죄를 짓지 않는 것 필요함.

다윗이 범죄 후 제일 겁을 낸 것이 시편 51편 ꡒ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ꡓ라는 고백과 같이 주의 성신이 떠나는 것이었음. 구원의 즐거움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야 함. 잘못하면 여호와의 신이 떠나버림.

삼손은 여호와의 신이 떠나는 것을 알지 못하였음. 구약시대에는 잘못했을 때 가차없는 심판이 임하는 영적으로 잔인한 시대였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하나님은 생각을 성령께 의탁(commitment)하게 하시고 그래서 동기부터 성령으로 시작하면 결국은 승리가 있게 하셨음.

그러므로 생각의 주체, 생각의 동기가 성령이 될 때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음.

② 성령의 소욕을 적용하여야 함

육신이 약하다고 핑계할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지배함을 체험하지 못하였기에 육신이 약해 패배하는 것임. 예수믿는 사람에게는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가 패퇴함이 없이는 진정한 평화가 없음.

갈라디아서 5장 16절 ꡒ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ꡓ 말씀과 같이 기독교의 본질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임.

이어서 5장 17절에서 우리 속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라는 두사람의 싸움이 있다고 말씀 하였음. 육체의 소욕은 끈질기고 끈적끈적한 면이 있음. 그러나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성령의 소욕도 있는 바, 육체의 소욕이 끌어 오를 때 단 1분이라도 성령의 소욕을 적용하여야 함.

성령은 내속에 내주하고 계시지만 또한 언제든지 환영할 수 있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울 때 찬양으로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느껴야 함. 그리할 때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도록 인도해 줌.

또한 육신의 소욕이 일어날 때 육신의 소욕을 내 뱉고 성령의 소욕을 호흡할 때 이길 수 있음. 육체의 일은 19~21절과 같이 ꡒ음행과 더러움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분쟁과 시기`````ꡓ라고 하였으며 성령의 열매는 22~23절과 같이 ꡒ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ꡓ라 하였음.

육체의 일은 대부분 언어생활과 관계가 있음. 성령의 생각을 환영함으로 육신의 소욕을 control할 수 있음. 로마서 8장 9절 ꡒ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ꡓ는 말씀과 같이 육신이 영을 control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육신을 control하여야 함.

성령이 주인이시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음. 로마서 8장 13절 ꡒ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ꡓ라는 말씀과 같이 생각의 주체가 성령이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음. 성령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셨으므로 11절 말씀 ꡒ너희 가운데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ꡓ처럼 우리 몸도 살릴 수 있음.

한국은 죄짓기에 너무나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음. 죄짓고 나서 하나님께 죄송하다는 말을 연속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님. 육신은 대우하면 할수록 버릇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음. 그러므로 생각의 주체가 성령이 되어 몸의 행실을 죽임으로 죄를 이길 수 있기를 바람.

Ⅲ.성령의 사람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하였는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로 함. 로마서 8장 26절에서 ꡒ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ꡓ라고 말씀하셨음.

이와 같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면제하지 않으시고 대신 도와 주시며, 따라서 연약할 때 더 큰 가능성이 있음. 말씀을 들었다고 은사 받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여야 도와 주심. 그리고 그 방법은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음.

그럼 어떻게 기도해 주시는가 보기로 함. 그것은 기도의 우선순위를 알게 하시고 기도의 제목을 가르쳐 주시며 기도제목이 잘못되었을 때에 교정해 주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알게 하심. 결국 영이 풍부해짐으로 응답받게 하심.

요컨대, 성령이 생각의 주인이 되면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고 그래서 성령이 친히 기도해 주심으로 우리의 사역에 한계가 없음.

28절에서 ꡒ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ꡓ고 결론짓고 있음. ꡒ모든 것ꡓ은 영어로 all things, ꡒ합력하여ꡓ는 all together 즉 not seperate임. 성령이 내 행실 죽이고 기도하게 하시면 과거의 죄, 과거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all together) 즉, 분리함이 없이(not separate) 선을 이룰 수 있음. 그러므로 성령의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

Ⅵ.결론의 말씀

성령의 사람은 자신의 약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임. 성령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열등감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하면 안됨. 우리는 이미 결정된 것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하며 대신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것에 목숨 걸어야 함. 그래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헌신하고 어떻게 사명을 감당하여야 할지에 전념하여야 할 것임.

설교제목 : 삼손(5) "의식없는 그리스도인"

Ⅰ.성도로서의 정체성 확립의 필요성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덴티티(정체성) 확립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예언자로, 전도의 도구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였음.

신앙이 흔들리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과 자기 확신이 없기 때문임. 로마서 4장 22절, 8장 3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확신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음. 또한 고린도후서 1장 15절, 3장 4절에서 자신의 논리의 근거를 확신에서 시작하고 있음. 그래서 그는 감옥과 강도의 위험하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음.

디모데후서 3장 14절에서 ꡒ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ꡓ고 권고하고 있음. 우리는 언제까지 기도하여야 하는가? 확신이 들 때까지 기도하여야 함. 언제 움직여야 하는가? 확신이 들 때 움직여야 함.

삼손의 문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즉 아이덴티티가 없었다는 것임.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며 그래서 술과 삭도를 대는 것과 시체에 손대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죽은 사자위에 있는 꿀을 퍼 먹었음. 죽은 시체 만지지 말라는 명령 어기고 꿀을 퍼먹은 것임.

그러므로 우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첫째, 혼자 있을 때 조심하여야 함. 아무도 안볼 때 유혹 느끼기 쉬우며 뿌리치기 쉽지 않음. 둘째,자기 자신의 신화를 버려야 함. 인간은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으므로 성령 의지하여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함.

그런데 삼손은 이러한 모습 보이지 못했음. 로마서 12장 12절에서 ꡒ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ꡓ고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은 구별된 자로서 세상과 전혀 다른 인생 살아가는 자임.

거룩함이란 "다르다"는 의미임, 레위기 18장 3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풍속 가나안의 풍속 좇지 말 것을 명하고 있음. 그러므로 우리도 이땅을 살아가면서 세상과는 다른 풍속 규례로 살아가야 함.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계속하여 해야 할 일들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가르치고 나서는 ꡒ너희는 저희를 본받지 말라ꡓ고 말씀하고 있음.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과 분리된 인생을 살아가야 함. 그럼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를 보고자 함.

Ⅱ.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

① 분리
분리란 세상사람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을 말함. 이를 위해 거룩되고 구별된 모습 보여야 함.

② 침투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 세상과 분리되었다고 교회내에서만 있어서는 안됨. 복음들고 세상속에 들어가야 함. 분리의 근본목적, 예배와 기도의 근본목적은 세상에 파송되기 위해서임.

세상에의 침투와 세상에 동화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음. 이는 삶에의 실천이 없기 때문이며 세상속에 들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함.

③ 그리스도인의 독특성 유지
세상 속에 침투해 가되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은 유지하여야 함.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어야 함. 우리 삼일교회는 한마디로 말씀을 근본으로 한 복음주의적 교회임. 복음주의란 세상에 들어가되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을 유지하는 것을 말함.

이상을 영어로 요약하면 ꡒThree Isꡓ임. 즉 Identity, Involvement, Influence임. 성도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이덴티티를 확립한 이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러나 세상안에서 구별된 인생을 삶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 미쳐야 함.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ꡒ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ꡓ고 말씀하고 있음. 이같이 성도는 화평함 즉 붙임성이 있어야 함(Involvement)과 동시에, 독특성을 유지하여야 함.( Influence)

삼손은 그 많은 능력 받고서도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으며, 그 결과 세상속에 동화되고 말았음.

Ⅲ.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리

삼손은 9절 말씀처럼 죄를 지었으면서도 그 부모를 공범자를 만듬. 나실인이면서도 회개않고 그 부모를 공범자로 만들었음. 사사기 시대가 암흑시대인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아니고 주변사람이 기준이 되었기 때문임.

갈라디아서 2장 12절 이하에서 이방인과 식사하는 베드로에게 바울은 ꡒ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않으면서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ꡓ고 책망하였음. 요시야의 부흥의 핵심은 주변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음.

내가 변화되어야 하나님께 돌아가라고 외칠 수 있음.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세상과의 분리와 성도로서의 독특성에 있음 세상의 소금이 되어 변화시키고 세상을 뒤집는 강력한 주의 종이 되기를 기원함.


설교제목 : 작지만 큰 능력의 사람

소아시아 일곱교회 중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 보기로 함. 빌라델비아 교회는 크지는 않았지만 큰 영향력 미친 교회였음. 우리도 이같이 작지만 능력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보기로 함.

Ⅰ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①기회를 잘 활용하는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신 능력 잘 활용하였음. 삼손은 힘이 장사였지만 짧은 인생동안 받은 은사를 다른데 다 탕진하였음. 그러나 모세는 애굽에서 연마한 모든 학문을 가지고 마지막 40년 동안 알찬 사역을 하였음.
삼손이 어려서부터 더 충성하였더라면 더 큰 일 하였을 것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가지고 충성 다해야 함. 또한 매순간마다 진실되게 살아야 함. 그러기 위해서 묵상이 필요함.
오병이어의 이적이 말해 주듯이 적은 능력도 주님께 내어 놓으면 주님께서는 크게 쓰심. 오늘 본문 8절 하반절에서도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하였음.
우리는 내게 맡겨진 물질, 은사를 주님을 위해 다 써 버려야 함. 우리는 20대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 다드려야 하며 30대에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 다 드려야 함. 빌라델비아 교회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 다 쓰는 교회였으며 그 결과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음.

②충성 다하는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와 사데교회는 공히 하나님의 진리는 알고 있었음.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실천하였지만 사데교회는 실천하지 않았음. 충성이란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임.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음. 그러므로 마음을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함. 그리고 행동하여야 하며 이것이 바로 충성임.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 잘 담당할 수 있음. 빌라델비아 교회는 또한 목마름이 있는 충성을 하였음.

Ⅱ.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은 어떤 약속 주시는가?

8절 말씀과 같이 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면 열린 문을 주심. 우리가 한가지에 충성 다하면 하나님은 또다른 열린 문을 주심. 그래서 사역이 점점 확장되는 것임.

하나님은 우리가 한가지의 힘든 일에 충성 다하면 몇가지 문을 열어 주심. 일하면 문이 열림. 사역에 열매 맺기 원하는가? 한가지 일에 충성하여야 함. 그리하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겠다 약속하셨음. 어느곳에 가든지 충성 다하여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원함.

설교제목 : 생존에서 생명으로

Ⅰ. 생명을 추구하면 생존 추구의 문제는 해결됨

뻥튀기 일을 하는 아빠를 둔 아이에게 선생님이 아빠의 직업을 물었을 때, 그 아이는 식품팽창업이라고 말했다는 유우머가 있음. 오늘 본문도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로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았다는 식품팽창에 대한 이야기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도 이같이 팽창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위하여 크게 쓰임받을 수 있을까?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음.

학자들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설교가 약 6시간 동안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고 있음.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긴 시간의 설교에 대하여 불만이 없었음. 오병이어의 기적의 원동력은 생존보다 생명을 추구한데 있음.

생존추구란 세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임. 한편 생명추구는 영원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말함. 생존은 생명의 방향을 제시하며, 생명을 추구할 영토를 확보하게 함. 생존과 생명 중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단정할 수 없음.

한국교회의 문제는 생존과 생명의 균형이 무너졌다는데 있음. 생존의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는 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기 위해 영원한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함. 생존에 대한 몸부림만 있으면 사회는 천박해지며 생존에 대한 몸부림만 있으면 천박한 그리스도인이 됨.

우리들은 세상에 뒤쳐지는 것에 있어 염려하면서도 생명추구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고 있음. 생존추구에 대한 발버둥은 있으면서도 생명추구에 대한 발버둥은 없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생존추구를 포기하고 생명을 추구하였으며 그 결과 오병이어의 기적을 낳았음. 영원한 것을 추구할 때 생명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됨을 가르쳐 주고 있음.

Ⅱ.생명을 추구할 때 변화시킬 수 있음

오늘 본문에서 한 아이의 등장하는 바, 그 부모에 초점을 맞추고자 함. 그 부모는 아이에게 도시락을 챙겨 주었음.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집에 일찍들어올 것을 가르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도 이 아이의 부모는 그의 아이가 예수님을 좇아라는 뜻으로 도시락을 챙겨 주었음. 신앙의 조기교욱이라 할 수 있음.

한국의 현실은 세상지식의 조기교육에는 관심이 많지만 신앙의 조기교육은 없는 것이 현실임. 그 결과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잃어 버렸음.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은 생존추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불만이 많았음.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의 영광을 보기를 갈망하였음. ꡒ네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ꡓ는 가장 큰 생존의 축복을 거절하고 출애굽기 33장 기록과 같이 ꡒ나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옵소서ꡓ라고 구함. 그가 산에서 내려오자 백성들은 얼굴보고 두려워 떨었음. 이것이 리더십의 원천임.

생존능력은 생명능력과 같이 가야 함. 우리사회의 각계각층에 기독교인들이 포진해 있지만 여전히 부정부패가 만연한 이유는 교회가 생존능력은 가르치지만 생명능력은 가르치지 않기 때문임.

삭개오는 엄청난 생존능력이 있은 사람이었음. 그러나 그는 웬지 모르는 허전함이 있었음. 그래서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났음.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며 뉘게서 토색하였으면 네배나 갚아주겠다고 맹세하였음. 그는 이제 천박한 세리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되었음.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무능한 이유는 뽕나무에 올라가는 삭개오가 없기 때문임. 하나님에 대한 갈망, 십자가에 대한 갈망이 없기 때문임. 회복해야 할 것은 전문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며, 이러한 갈망이 강력한 종으로 만들고 우리가 서있는 곳을 거룩한 영토로 바꿀 수 있음.

Ⅲ. 생명이 채워지면 생존의 도구가 기적의 통로가 될 수 있음

드림이 무엇인지 알면 채움의 내용을 알 수 있음.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직접 가져갔다고 기록하고 있음. 어린아이에게는 먹을 것이 생명보다 귀한 생존의 도구이지만 그는 이를 기꺼이 드렸음. 이는 그가 6시간동안 생명의 말씀을 들었기에 가능했음.

채워지면 쏟아붓게 되어 있음, 어린아이의 마음에 생명의 말씀이 채워진 결과 생존의 도구를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임. 생명이 채워지면 생존의 도구가 기적의 도구가 됨.

우리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명의 공간이 채워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 사회를 뒤바꿀 수 없음. 텅 빈 우리 마음속의 공간을 주의 말씀으로 채울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가져오고 우리 자신이 기적의 통로가 될 수 있음.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이루어질 특별새벽기도회가 생명의 원천되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 되기를 기원함. 생존에 대한 추구와 더불어 주님 만나지 않으면 떠나지 않겠다는 주님에 대한 열망을 보일 때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볼 수 있을 것임.


설교제목 : 삼손(6) "세상을 만만하게 보다 큰 코 다친 사람"

오늘 본문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었지만, 블레셋 사람의 협박을 받은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 그 답을 가르쳐 줌으로서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는 줄거리임.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보기로 함.

Ⅰ. 성도는 세상의 방법으로 경쟁해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음

하나님은 삼손에게 강점 주셨으나 그 강점 이용하지 않고 세상의 방법 이용하다 패배함. 세상은 우리보다 훨씬 강력한 힘과 방법, 그리고 술수를 사용함. 그러므로 성도가 승리하는 비결은 강점 가지고 일하여야 함.

하나님은 우리 누구에나 강점을 주셨음. 그 강점 가지고 일하면 누구나 평균 이상의 인생을 살 수 있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강점을 찾아야 하는 바, 강점은 ①어떤 일을 할 때 힘들지 않는 것, ②그 일을 할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는 것 ③상대방이나 대상자의 좋은 반응이 좋아야 하는 것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임.

누그든 이러한 장점 붙들면 살 수 있으나, 우리는 검증을 하지 못했거나 세상적 가치에 편승해서 살다가 그 장점을 놓치게 됨. 삼손도 하나님이 주신 강점인 육체적 힘과 영적 강점인 하나님께 부르짖음을 통해 이겨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강점과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을 통해 세상에서의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함. 히브리서 10장 19절 ꡒ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ꡓ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고 또한 부활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기도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우리의 강점으로 삼아야 함.

에베소서 6장 12절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난 영적인 싸움이라고 말씀하셨음. 우리는 세상과 경쟁하면서 세상의 방법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싸워야 함.

야곱이 우물을 두고 그랄 목자와 경쟁하였을 때 세번이나 양보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이름하여 르호봇(ꡒ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였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ꡓ는 의미)고 하셨음. 우리도 이렇게 세상과 경쟁하였을 때 그들과 싸우는 것이 아닌 양보를 통해 궁극적 승리를 거둔 이삭을 모델로 삼아야 함.

우리는 축복아래 놓인 존재이며 은혜 아래 놓인 존재임. 우리가 부활의 능력을 덧입으면 세상과의 어떠한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음. 고린도전서 15장 30절에서 우리는 죽어도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며,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 우라는 미래에 소망이 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음.

또한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우리에게는 이김이 있기에 최후의 승리자임을 가르쳐 주고 있음. 주님 붙들면 수고가 헛되지 않음. 삼손의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강점을 사용하지 않은 것임.

Ⅱ.하나님이 주신 능력 가지고 제도의 변화를 꾀하여야 함

삼손의 모든 승리는 단회적이며,병렬적이며,결과적으로 의미없는 승리였음.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 가지고 기준을 세우고 제도를 바꿔 나가야 함. "Christ against culture"가 아니라 "Christ above culture"가 되어야 함.

즉, 모든 권세와 자연과 지혜 위에 초월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며 문화 속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 미국의 달력에는 미국의 공휴일은 물론 유대의 절기까지도 표시되어 있는 바,그 만큼 유대인 이 미국에 영향력을 미치고 기준을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음.

모든 싸움은 기준 잡는 싸움임. 지금까지 좋은 교회의 定義를 언론과 휴머니스트들이 말해왔음. 그러다 보니 교회 스스로가 구제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 타종교와 잘 협력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라 생각하여 이러한 이미지 갖추려고 노력했으며 세상에 아부해 왔음.

그러나 예배가 살아 있는 교회,죽어가는 영혼 살리는 교회,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이러한 기준에 맞추면 시간은 우리편이 됨. 이스라엘 민족이 죄로 말미암아 뿔뿔이 흩어졌으나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기준을 주셨음. 다니엘과 세친구도 기준 붙잡았음. 그러므로 교회도 기준 세워야 함.

스가랴서 4장 10절에서 ꡒ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ꡓ고 말씀하셨음. 다림줄은 건물을 지을 때 정확하게 지을 수 있도록 하는 기준이 되는 실인바, 우리가 이러한 다림줄 가지고 삶의 현장에 있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기뻐하심. 그러므로 우리는 현장 속에서 기준 바꾸는 싸움 벌여야 함.

하나님이 삼손에게 능력 주셨는데 그는 기준 바꾸고 제도화시켜 나갔어야 했음. 우리나라 역대 왕 중 성종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나라의 토대를 세운 왕들임. 특히 고려의 성종은 나라의 법률을 만들었으며 기준을 세웠음.

우리도 영적인 성종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능력 가지고 기준 세우고 제도화시켜 나가야 함. 기준이라는 지렛대 가지고 세상을 뒤집는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함.

설교제목 : 삼손(7) "눈이 바뀌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Ⅰ. 바른 가치관의 정립 필요성

예수 믿는 사람과 안믿는 사람간에 거의 차이가 없음. 그러나 가치관이 서로 다름. 가치관이란 무엇이 중요며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기준임.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봄. 본 훼퍼라는 신학자도 말하기를 ꡒ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ꡓ이라고 하였음. 이는 성도의 가치관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음. 성경에서도 애통하는 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음.

삼손이 딤나 여인과 결혼한 이유는 그 여인이 예쁘고 미인이었기 때문임. 즉 외모에 이끌려 결혼하려고 하였음. 그러나 외모에 이끌려 만났지만 조금 지나 가치관의 혼란을 일으켰음. 그래서 수수께끼를 내었고 그 수수께끼의 답을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 가르쳐 준 후 분노함으로 집으로 돌아갔음. 그러자 그의 장인은 딸을 동무에게 주고 말았음.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삼손의 장인은 결혼을 진지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임. 이같이 복음이 떠난 곳에는 가정의 신성이 무너짐. 삼손의 장인은 그 대신 그녀의 동생을 줄 것을 제안하였지만 삼손이 거절함. 그리고 블레셋과 전쟁을 벌임.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을 붙잡는 것이 믿음이며 신앙임. 많은 사람이 행복해 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 떠났기 때문임. 오늘날 현 세대의 여대생은 남자를 평가하는데 3분 걸린다고 함. 단 3분간 상대방과 얘기해 본 후 킹카인지 아니면 폭탄(킹카의 반대)인지 판단한다고 함.

그러나 잠언 31장 30절에서 ꡒ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ꡓ고 말씀하고 있듯이 외모는 헛된 것에 불과하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임.

외모만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면 단 3년만 지나도 곧 싫증을 느낌. 그러나 믿음과 성격이 좋은 사람은 골동품과 같아서 세월이 지날수록 더 가치가 느껴지고 행복을 느낄 수 있음.

결혼의 행복은 신앙과 비전에 있음. 우리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행복이 없는 이유는 삼손과 같이 껍데기 보기 때문임. 베드로전서 3장 3절에서 ꡒ너희 단장을 외모로 하지 말고 ꡒ라고 말씀하고 있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신앙과 신념임. 하나님 안에서 갚진 사랑을 해 볼 것을 권유함.

Ⅱ.하나님이 주신 능력 가지고 세상과 부딛쳐 영향력 미쳐야 함

11절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삼손이 블레셋과 싸우려는 것에 대해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며 동역자가 되어 주지 않았음.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비전 품으면 동역자 나타남. 즉 제4절 말씀과 같이 여우가 나타났음.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이 동물을 보내어 동역자 되게 하셨음. 모세의 바로에 대한 재앙에 있어서도 모두 사람이 아닌 자연과 동물이 그 동역자(수단)가 되었음.

고난이 주는 첫번째 유익은 고난을 통해 나의 판단이 얼마나 틀렸는지 알게 하심. 둘째 유익은 내가 고난 당하면 나의 측근이 대부분 떠나가는 배신의 고통과 동시에 생각지도 않았던 동역자 나타남으로 인해 가짜와 진짜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임. 그러므로 측근이 동역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한 동역자임.

고난 당했을 때 고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들임. 중국의 어린이들은 삼국지 속의 이야기 등 약 1,000가지의 이야기를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함. 그래서 어려운 상황 만났을 때마다 그 이야기를 Case로 적용하여 지혜를 얻고 해결책을 얻는다고 함.이는 유대인도 비슷함. 탈무드, 구약에 나타나는 각종 이야기를 그들의 머리 속에 간직하고 있음.

하나님은 삼손에게 강점 주셨는 바, 삼손이 그 강점 가지고 싸웠으면 이겼을 것이나 약점 가지고 싸우다 망함. 고려의 성종은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법을 만들고 국가제도를 세웠으며 메뉴얼화 했음. 서희는 군사력이 아닌 논리와 외교력으로 강동 6주를 얻었음.

넬슨 만델라는 ꡒ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ꡓ이라는 책에서 감옥 속에서 자신을 지탱해 준 힘은 민족의 고난 받은 이야기였다고 썼음. 유대민족은 그들의 조상이 바벨론 포로 생활의 고통중, 에스더라는 인물이 ꡒ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ꡓ라는 물음에 답하여 그 민족을 구한 이야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며 이런 이야기가 우리를 강하게 만듬.

우리나라와 이태리는 공히 사치라는 민족성을 지니고 있음. 이태리 민족이 이러한 사치라는 민족성에 철학을 결합하여 세계적 브랜드를 만들었듯이, 우리도 세계적 브랜드 만들어 내야 함. 우리나라는 휴대폰을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상품으로 만들어 낼 정도로 강한 민족임.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장점 가지고 부딛쳐야 함.

하나님이 주신 능력, 권세, 그리고 기도함으로 부딛쳐야 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과 비젼 그리고 사명을 주셨음. 또한 블레셋이라는 대적도 주셨음. 그러므로 우리가 부딛쳐 나갈 때 하나님은 도울 자 보내 주심. 우리에게 주신 능력 가지고 세상과 부딛쳐 승리하는 자가 되길 바람.


설교제목 : 삼손(8) "현실안주는 독약과 같다"

Ⅰ. 의에 대한 두가지 원리 붙들라

삼손이 블레셋 공격하자 블레셋이 전쟁을 일으킴.(9절) 그러나 블레셋의 전략은 이스라엘 사람이 삼손과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것임.(10~12절) 블레셋은 마귀와 비슷한 전략 즉, 자기들끼리 싸우게 하는 전략을 사용함. 미국이 탈레반을 몰아내기 위해 북부 동맹군을 이용한 것과 비슷함. 몽고도 세계제패시 인구가 100만명에 불과했으나 정복지의 군사를 사용하여 다른 민족을 공격함.

우리도 우리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공격받기 쉬움. 예수님도 제자 유다로부터 배신당했음. 고난은 고난 그 자체의 고통도 있지만 배신감 때문에 오는 고통도 있음. 따라서 사람을 너무 믿거나 좋아하면 안됨.

본인도 목회자로서 교회를 떠날 준비, 죽을 준비 해야한다고 생각함. 또한 중년 이후 물러설 줄 아는 자세 가지고 있음. 평등이라는 가치는 한국인들이 하나되는데 장애가 되고 있음. 지나친 평등의식 가진 자는 믿음이 자라지 않음. 평등이란 질투라는 감정을 우아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함.

正義는 헬라어로 디카이오스네라고 하는 바, 많은 사람이 이 정의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 디카이오스네란 인간사이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를 의라고 하며 이는 내 공로 내 노력 가지고 되지 안됨.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의를 주셨으며 이는 곧 십자가의 의임.

초보적인 단계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따지지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사랑과 자비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십자가의 의를 붙잡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비와 용서, 사랑을 베푸는 것임.

믿음은 이 두가지 원리 붙잡는 것임. 로마서의 시각으로 볼 때 하나님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붙잡는 것이며, 성도와의 관계(12장 이후)에서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임. 이러한 기본을 철저히 붙잡으면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배신하고 공격하여도 참을 수 있으며 어떠한 도전이 와도 이길 수 있음.

요약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디카이오스네, 즉 In the face of God(코람데오 인생),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것이 의의 원리임.

Ⅱ.뚜렷한 교회관을 가지라

12절 말씀을 볼 때 삼손은 기본이 되어 있으며 교회관이 뚜렷하였음.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ꡒ순순히 잡혀 줄테니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ꡓ고 말함. 아군과는 싸우지 않겠다는 자세 보임.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니"는 ꡒ첫째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을 믿는 것, 둘째 하나님이 그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ꡓ을 말함. 목회자는 많은 단점이 있으나 그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사람이 세워짐. 이러한 것을 믿는 것이 거룩한 공회를 믿는 것이며 비로 올은 교회론임.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ꡒ너는 베드로라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ꡓ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음. 이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능력있는 권능을 부어주리라는 말임. 교회관이 잘못된 사람은 누가 적인지를 모름. 예를 들어 신학을 배워서 교회를 공격하는 하는 경우임.

다윗은 교회관이 뚜렷하였음. 사울을 죽일 찬스가 있었으나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음. 교회 중에는 잘못된 교회가 많이 있으나 우리는 공격하여서는 안되며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내부에서 개혁하며 그래도 안되면 조용히 떠나야 함.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심.

교회론이 제대로 안되어 있기 때문에 아군끼리 싸움. 마귀에게는 대적하되 아군끼리는 권면하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것이 참된 교회론임. 이러한 교회론을 가지기 바람

Ⅲ.안주에서 벗어나라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의 반응은 조용히 살자는 것임. 변하기 싫으며 안주하여 살고 싶다는 속마음을 가지고 있었음. 하나님께서 능력과 권세 부어 주셨으면 그들을 이길 수 있는데도 안주하겠다는 연약한 모습 보여주고 있음.

설교자인 본인은 지난 10년을 되돌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크신 열매를 확인할 수 있음. 이제 지난 10년간에 이루어주신 열매와는 비견할 수 없도록 클 향후 10년 후의 꿈의 성취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음. 그것은 미국을 이기는 것임.

그들의 정직성과 합리성 받아들이고 거기에 우리의 강점 가지고 일하면 10년내에 미국을 이길 수 있음. 지난 10년간 교회를 변화시키고 부흥시킨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는 더 쉬운 일임.

링컨의 어머니가 ꡒ부정적인 사람과 사귀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ꡓ라고 말했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 주시면 못이룰 일이 없음. 안주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람.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스크랩] 하나님의 부르심. (엡1:1-2절). | 설교
2007.03.12 01:33

하나님의 부르심
엡1:1-2, 347.377.379장.&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위대한 주제들 중의 하나인“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하고 있습 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는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1,바울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1절),바울은 자신이“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바울은 엄청난 특권을 받았습니다. 온 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큭권보다 더 위대한 특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엄청난 우주의 최고 지도자이신 하나님 그분의 아들이십니다. 우주가 끝없이 펼쳐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위대한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처럼 다스리시고 지배하십니다.

우주의 주권적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보다 더 위대한 특권은 있을 수 없습니다. 2)“사도”라는 말은 매우 특별한 사명을 위해 부름받아 보냄받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사명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부르셔서 영광스러운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3)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소유된 자였습니다. 우주의 지극히 높으신 왕되신 주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개인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구원자와 주로 알 수 있는 특권을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분을 자신의 구원자로 알았습니다. 4)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 그 자신과 그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의 친직이 그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된 것입니다. 그는 그 사역이 좋은 직업이기 때문에, 또는 친구들이 그가 훌륭한 설교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사역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사역자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역자로 부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2, 교회와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1-2절), 이것은 그 교회에 대한 바울의 인사말이며 그가 모든 교회들에게 주었던 평소의 인사말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가 말하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깊은지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제로 교회와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전영역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성도와 신실한 자들이 되도록 부르십니다. (1)성경에서“성도”란 단어는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들을 행하는 단지 몇몇 사람들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란 믿는 모든 자를 언급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단어는 구별되다, 거룩하게 되다, 성스럽고 거룩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성도는 그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삶을 사는데,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드린 사람입니다. (2)“신실한 자들“이란 단어는 자신의 믿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실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다음과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할 만한 분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확신을 둔 사람입니다. -.그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긴 사람입니다. -.그의 생명을 그리스도께 맡긴 사람입니다. 매우 단순히 말해서 신실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고.

그들의 삶을 그분께 구별하여 그분이 그들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자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바로 그 첫 부르심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를 성도와 세상의 신실한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그가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이 세상이 노예화되고 썩어져가는 상태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비극적인 것은 그의 종말이 죽음, 즉 영원한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2)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은혜와 평강에로 부르십니다. 은혜는 아마도 인간의 언어에 있어서 가장 의미깊은 단어일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이말은 사람들이 “은혜”라고 할 때 의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내재된 아름답거나 기쁨이 넘치는 특성을 의미합니다.

-.은혜는 사랑스러움을 지닌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선물 즉 누군가가 친구에게 주고자 하는 호의입니다. 이 호의는 항상 보답을 바라지 않고 값없이 주는 것이며, 항상 친구를 위하여 행해지는 것입니다. (1)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호의와 선물들을 의미합니다.(약1: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의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2)은혜는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롬3:24절),고 했습니다.“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아무 자격도 없는 죄인 중에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스크랩] 영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 | 설교
2007.03.09 23:26


             영의 눈을 멀게 하는 것들/요9: 1-41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있을까요? 물론 우리 몸에 불편
함이나 고통이 있으면, 그것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손가락이나 발
에 생긴 것이든,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괴롭고 견디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과 불편 중에서 앞을 못 보는  것만큼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것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안 당해봐서 잘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젠가
앞을 못 보는 사람의 사정이 어떤지 한번 알아보자 하고  눈을 감고 걸어가다가 머
리를 부딪쳐 가지고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앞 못보는 사람들은
정말 어떻게 살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에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인해 시력을 잃어버린 여 집사님 한 분이 계십
니다. 자상하기 그지없는 남편이 곁에서 눈이 되어 가지고  항상 손을 잡고 교회에
나오시는 모습을 가끔 볼 때면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앞
을 못 보는 그 여 집사님이 얼마나 답답할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선진국
일수록 앞을 못 보는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서 다양한 편의시설을 마련하
고 기구를 개발하는 등 많은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
해도 조금만 불편을 극복하고 숙달이 되면 정상적인 사람과 거의  다를 바 없이 생
활하는 것을 봅니다. 참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아직
그 정도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국의 모 대학 총장이 자기가 겪었던 간단한 에피소드를 기록한 것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총장이 사는 모 지방 도시 번화가 옆에 조그마한 공터가 있는데
그곳에는 언제나 맹인 한 명이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작은 컵 하나를 든 채
서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총장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맹
인이 구걸하는 것을 보고 호주머니에 있던 25센트 짜리 동전 하나를 끄집어내어 그
컵 속에다 넣어 주었습니다. 25센트 짜리 동전을 던져  넣고 몇 발자국을 지나왔는
데 뭔가 낌새가 이상해서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구
걸하던 맹인이 검은 안경을 위로 치켜들고 컵에서 그 동전을 꺼내들고는 얼마 짜린
가 하고 들여다보고 있더랍니다. 그 모습이 하도 이상해서  그는 가던 걸음을 멈추
고 되돌아 와 가지고 "여보, 당신은 앞을 못 보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돈을 들여다보며 살피고  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맹인이 아닙니다." "아니, 맹인이 아니면
서 왜 맹인인체 하고 구걸을 하고 있는 거요?" "예, 원래 여기에 서서 구걸하던 맹
인이 제 친구인데요, 잠깐 없는 동안 제가 대신 서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당
신의 맹인 친구는 어디에 간 거요?" "저 앞에 있는 영화관에 영화 구경하러 갔습니
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맹인이라도 이렇게 조금 웃어가면서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는 아직 맹인들이 여
유를 가지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배려를 해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것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시대에는 더욱 심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부모로부터도 버림을 당하
여 혼자서 구걸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목숨을 부지하다  죽으면 그만인 그런 쓰
레기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군중들이 그 말씀에 반발하며
손에 돌을 들고 치려고 하자 그 살벌한 분위기를 피해서  성전 밖으로 걸어 나오셨
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에 나면서부터 봉사된 사람이  막대기를 가지고 더듬거리
면서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가리키며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
니다.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사람이 맹인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자
기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아니면 조상들의 죄가 많아 저렇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은 유명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가 맹인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
도 아니요, 그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큰 일을 나타내시
려고 맹인이 되게 하셨다." 이렇게 대답하시고는 그 사람을 불러 침으로 진흙을 이
겨 눈에 발라준 다음 실로암 못에 가서 씻게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 말씀대로 실
로암 못에 가서 그 눈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
서 그 눈을 열어주셔서 밝히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기쁘고 감격한 나머
지 춤을 추면서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사례하는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너무 불
쌍해서 주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사람의 눈을 고쳐주신 데는 또 한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
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구원자  되심을 드러내어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믿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이 환자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사실을 39절부터 41절에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
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
은 소경 되게 하려함이니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
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자라도 눈을 뜨고, 예수님을 거역하는 자는 본다고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눈을 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볼 사람은 보
게 하고 감아야 할 사람은 감게 함으로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내용이  영적인 눈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것
은 저나 여러분이나 너무 잘 압니다. 우리 중에 육신의  눈을 뜨지 못해 고통 하는
사람은 가끔 있을 수 있지만 영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고통 하는 사람은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압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경적
으로 말하면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
자 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
광을 본다고 말합니다. 또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말
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닫고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이 영적으로 보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이 영적으로 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하고 한평생을 캄캄한 데
서 헤매다가 가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 이  사람들만큼 불행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겠지만 평생을  눈을 뜨고 살면서도 예
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할 숙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8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을 주셨다." 하나님이
혼미한 심령을 주신 사람은 평생을  못 봅니다. 그래서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다고 해
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맹인 중에 자기가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
무도 없습니다. 빛을 더 환하게 밝혀준다고 해서 볼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맹인 앞에서는 빛이 밝게 빛나는  대낮이나 빛이 없는 칠흑과  같은 한밤중이나 못
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맹인이 보려면 시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눈이
열리려면 하나님이 그 눈을 열어주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상
하게 열어주시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더욱이 스스로 눈을 열고 싶어하지도
않고 보고싶어 하지도 않는 그런 불행한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어떤 글을 읽으니까 정말 마음 아픈 이야기가 하나 있더군요. 오래 전에 독
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부인이 해산이 임박해서  산부인과에 입원을 했습니
다. 그런데 분만 대기실의 침상에 누워서보니 벽에 예수님의  사진이 하나 걸려 있
었습니다. 그 부인은 간호원을  급히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시오.
간호원 선생, 나는 벽에 걸려있는 저 사진이 정말 보기  싫으니 저것 좀 안 보이는
데로 치워줘요." 그러자 간호원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제
권한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병원에서 결정해서 걸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 윗사람을 한번 데리고 와 봐요." 그래서 그 간호
원은 수간호원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수간호원 역시  마찬가지 대답을 했습니
다. "저 역시 저 사진을 뗄 권한이 없어요." "그래요? 우리 남편은 고급 장교예요.
며칠 후면 이 방에 올텐데 분명 저 사진을 몹시 싫어할 거예요. 좋아요. 그럼 우리
남편이 오면 그 때 병원 책임자하고 이야기해서 떼도록 하지요."
  며칠 후에 그 부인의 남편이 병원을 찾아 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벽에 걸
린 그 사진을 보고, 또 자기 아내의 설명을 듣고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는 식식거리며 그 병원의 최고 책임자를 찾아가서  자기는 예수라는 유대인이 싫으
니 그 사진을 빨리  치워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한참  흥분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간호원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부인이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긴 낳
았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나면서부터 앞을  전혀 못 보는 맹인
으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가 될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 사진을 보기
싫어하고 또 애가 나면 더욱이 저 사진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아
예 영원토록 그 사진을 보지 못하는 아이를 낳고 만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이들 두 부부처럼 불행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육신의 눈을 뜨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그보다 영의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더 불행
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환하게 비치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는데도 그분을  보지 못하는 캄캄한 눈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히 그 눈을 뜨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
런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모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령께서 우리 영안을
활짝 열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의 눈으로 예수님을
확인한 적도 없고, 손으로 예수님을 만져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갑바
도기야 교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믿으면서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사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
을 때마다 그 말씀이 꿀 송이와 같이 달게 느껴지고, 깨달아져서 벅찬 감격과 기쁨
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이 혼탁한 세상을 하나님
의 말씀으로 빛을 비추어 가면서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신  우리 하나님 앞에 감사해
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안을 뜨게 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주의
은혜로 영의 눈을 떴습니다만,  이 영안이라는 것은 너무  예민해서 자칫 잘못하면
흐려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다시 감길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몸의 지
체 중에서 눈만큼 예민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상한 방법으로 눈이
항상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눈은 하루에 25,000번 이상
깜박인다고 합니다. 깜박이는 중에  눈물샘에서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절한
량의 눈물이 끊임없이 나와서  눈을 항상 깨끗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야만 눈이
흐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불행하게도 눈앞에다가  안경을 끼고 다녀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늘  포켓에 안경 닦는 수건을  넣고 다닙니다. 한두
시간만 안경을 끼고 있으면 안경알에 먼지가 앉아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밝
히 보려면 자주 닦아줘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눈도
안 닦아주면 그 만큼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9장은 예수님께서 나면서 봉사된 사람을 고쳐주는 매
우 감격스러운 이야기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전개되는 내용은
이상하게도 너무너무 살벌하고  답답하고 숨막히고  고통스러운 이야기들뿐입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눈을 뜨고 본 일이 없는 사람을 주님께서 고쳐주셨다면 축제 분위
기가 되어야 마땅할 텐데  9장에서 오가는 대화들을 보면  살벌하기 그지없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의 눈이 감겨있
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예 처음부터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무
엇이 그들의 영의 눈을 멀게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달리 하
나님의 은혜를 입어 영의 눈을  뜨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의 눈
역시 잘못하면 흐려지거나 심한 경우 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
리가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그들의  영안을 어둡게 했는지를 분명히
알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철저하게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눈을
열어 깨닫게 하시도록 마음을 열고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잘못된 생각이 영안을 흐리게 한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영의 눈을 흐리게 할  수 있을까요? 본문은 세 가지요소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 첫 번째 요소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잘못된 생각이나 지
식, 통념, 시각은 우리의 영안을 흐려놓을 수 있습니다.  심하면 우리의 눈을 가려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더듬거리면서 지나가는 눈먼  사람을 보고 무엇이라
고 말했습니까? "주님 저 사람이  누구 죄 때문에 저런 불행을  겪습니까?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  죄 때문입니까?" 이것은 제자들을  위시해서 그 당시
유대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지식이요, 생각이었습니다. 잘못된
관념이었습니다. 그들은 앞 못보는 사람을 보면 무조건 죄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
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안쓰러워 하는 고통이나 불행을 전부 죄 값
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사람 죄도 아니다. 부모 죄도 아니
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이 남의 고통에 대해 가지고 있는 통념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통 당하는 사람을
놓고 죄값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그들로 더 큰 고통을  당하도록 정신적인 압력을 가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유대나라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이 아닙니
다. 어쩌면 전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통념인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불교 문화권과 유교 문화권에 젖어 있는 동양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일종의 윤회설
로 설명이 됩니다. "조상의 죄를 뒤집어쓰고 자녀가 그  고생을 한다." "전생에 무
슨 죄가 있어서 내가 이런 고생을 하나?" 모든 불행을  인과응보로 해석을 하는 것
입니다.
  특별히 태국 같은 나라는 불교가 국교로 되어  있는 나라가 아닙니까? 그 나라에
서는 선천적인 장애를 겪고 있는 자들은 전부다 전생의 죄 값이라고 해석을 한다고
합니다. 태국에서 국제 맹인 선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는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
니다. 태국에서는 부모들이 애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주의를  시킨다고 합니다. "눈
먼 사람하고 절대 악수하지 말아라. 눈 먼 사람하고는 가까이 있지도 말아라. 가까
이 있다보면 병에 걸리거나 액운을 당하게된다." 안  그래도 보지 못해서 세상에서
이런 저런 고통을 당하면서 괴롭게 살고 있는데 그들의 불행을 잘못 해석하고는 이
처럼 잔인하게 학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이지메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는 전생에서나 이 생에서 아무런 죄도 없기 때문에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 불행이나 고통이 들어와서 앉은뱅이가 생기고 눈 먼 사람이 생기고
문둥병이 생기고 나중에는 병들고 죽고 하는 이 모든 비극의  연속은 죄 때문에 온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모든 불행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
디까지나 본질적인 설명이지, 구체적인 적용에 해당하는 설명은 아닙니다. 다시 말
해 그와 같은 본질적인 해석을 모든 사람의 고통과 불행에  일일이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9장에 등장하는 눈먼 사람을 보십시오. 만일 그가 봉사가
된 것이 본질적인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왜 그 사람만 그런 불행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인류의 모든 죄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세상에 태
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죄로 인해서 이렇게 슬픔과  고통이 많은 세상을 살
고 있습니다. 만일 그 죄 때문에 당해야 하는 불행이라면 똑같이 당해야 하지 않겠
습니까? 왜 저 사람은 눈을 감고 있는데, 우리는 눈을 뜨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오
히려 우리가 봉사가 아니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남의 불행에다 본질적인 설명을 적용하며 죄 값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
니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못된 관념이나 지식이 우리 마음을 가리우면 바로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이나 유대나라 사람들처럼, 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처럼
잘못 해석을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9장에 등장하는 맹인을 보고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자기
죄도 아니요 자기 조상의 죄 때문도 아니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
이니라"(3절).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선하신 어떤 일을 이루
기 위해서 그를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이며, 그래서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앞
을 보지 못하는 불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여러분, 그 맹인이 당하는 고통에 이렇게  굉장한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
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도대체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
저 사람이 맹인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구나. 그래서 몇십 년 동안
저 사람이 저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기다렸구나. 이제 드디어  때가 되자 하나님이
저 사람의 눈을 열어주셨구나.' 이것을 미리 깨달았더라면 누가 그를 천대했겠습니
까? 그의 부모가 자기 자식을 왜 그런 식으로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도록 내버려뒀
겠습니까? 그들의 영안이 잘못된 생각으로 어두워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고통을
바로 해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잘못된 말을 많이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도 보면 잘못된 생각
이나 지식 때문에 영안이 흐려져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
람들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잘못된 정보
나 지식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그런 것들로 인해 예수  믿는 우리의 판단력도 충분
히 흐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랫동안 불교와  유교의 문화권 속에 살아오
는 동안 우리 의식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된 통념들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10
년 이상 신앙생활을 해도 마음에서 잘 씻겨지지 않는  고약한 기질이 있습니다. 그
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영안이 뜬 다음에도 안  믿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왕왕 생기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토정 비결이
니 사주팔자니, 궁합이니, 관상학이니 하는 잘못된 통념들의  영향을 받아 영의 눈
이 잘못된 크리스천들이 꽤 많습니다. 이제 인터넷을 통해서 매일 사주팔자를 봐주
는 프로그램이 다 등장을 하고, 젊은이들 가운데는 아예 컴퓨터 앞에 앉아 자기 사
주 팔자를 보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기가 막
힌 현실을 놓고도 영안을 바로 뜨고 이와 같은 무서운  사탄의 도전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은근히 끌려 다닙니다. 점치는  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도 자주 듣습니다. 예수  믿는 집사 중에서 인터넷을 켜  놓고 오늘 내
팔자가 어떨까 하고 쳐다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번 주에 나온 모 일간지에서  출판하는 주간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
도 우리 나라에서는 꽤 수준 있는 주간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에 보면 버젓이
대선 후보자들과 10대 재벌 회장들의 토정비결에 관한 기사가 크게 실려 있습니다.
그들의 토정비결을 보고는 금년 운수가 어떨 것이다 하고 분석해 놓은 내용입니다.
우리 나라의 최대 재벌 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고기가 못의 물을
잃으니 활기가 다 빠졌구나. 올해에는 횡액을 조심해야  할 운수로다."하고 써놓았
고, 또 다른 재벌 회장에 대해서는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니 기쁜 일이 겹치리로
다."하고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겠다는 모 후보에 대해서는 "49세 이전
은 큰 발전이 없었지만 49세 이후부터 복이  터져 79세까지 대길하리라."하고 예언
해 놓았습니다. 참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엉터리  같은 소리인데도 믿는 사람들이
그런 말에 많이 오염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통 잘못된 생각만 품고 있
는 것입니다. 이런 사탄의 이  잘못된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제가 이
글을 읽고 엊그제 저녁에 잠을  자다가 잠시 깼는데 나도 모르게  "고기가 못 물을
잃었으니 활기가 다 빠졌구나."하는 말이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야, 이
것 정말 무서운 사탄의 역사구나!'하고 생각을 했는데, 목사가 이렇게 헷갈릴 정도
라면 평신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것을 물리치고 영안을 똑똑히 뜨고 인생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가 거짓된 정보나 지식  때문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 지, 그리고 영안이 흐려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솔직하게 살펴  봅시다. 그리
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갑시다.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19:8).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을 환하게 닦아주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 이외의 다른 모든 지식들
은 거짓된 것이고,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  눈을 어둡게 합니다. 그
러므로 눈이 밝기를 원한다면 거짓된 정보나 지식에 마음을  쏟으면 안 됩니다. 오
로지 하나님의 말씀에만 우리의 마음을 쏟아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눈을 흐리게 한다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하는  두 번째 요소는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을 고쳐주시자 곁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물고 늘어졌습니다. 안식일에 왜 소경을  고치느냐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침을 뱉어서   손으로 진흙을 이겼으니
이 얼마나 큰 일입니까? 게다가 그 진흙을 들어서 소경의 눈에 발라 주기까지 했으
니 이것보다 더 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안식일을 범할 수
있느냐고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들은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손수건도 던지지 못하게 합니다. 안식일에는 손톱도 못  깎습니다. 발을 삐어도 찬
물로 냉수 마찰도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는 행동이 곱게 비쳤
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동안 앞을 못  보던 자가 광명을 찾는 경사
를 만났는데도 율법을 내세우며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주의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란 법이나 형식을 앞세워서 남을  판단하는 일체의 태도를 말합니다. 본
질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고, 내용보다는 외형을, 정신보다는 법을 우선에 두고 사
람을 잡으려 드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주의는 그 당시
에만 성행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에  매어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평신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까지도 율법주의에
매여 영의 눈이 흐려져서 잘못 보는 일들이 왕왕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에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배의 형식
이나 예배 순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비판을 합니다.  벌써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주일성수의 본질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기쁘게
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조건
들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비판하며 괴롭힙니다. 기도의 본질은  은밀히 보시는 하나
님 앞에 마음을 쏟고 구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몇 시에 일어나서 얼마나 기도
했는가'를 가지고 사람을 비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의 본질은 그 말
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받아먹고 순종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성경을 몇 번이나
읽었으며 얼마나 아느냐'를 가지고 판단하려 듭니다.  제자훈련의 본질은 그리스도
를 닮고 그를 따르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누구한테 제자훈련을 받았으며 언제
어디서 받았느냐'를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하려고 달려듭니다. 헌금의 본질은 기쁨
으로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데 있지만 어떤 사람은 액수를 가지고 헌금의 경중을 따
집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 안에도 율법주의가  아직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에 사로잡히면 우리의 영의 눈이 흐
려집니다. 기도를 많이 합니까? 나름대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성경을 많이 압니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들 가운데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생활도 열심히 하고
온갖 일들로 충성한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의 전통에 매여서 눈이 흐려진 사
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본질을 보는 눈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 눈이
형식과 법 때문에 흐려지지 않도록  은혜를 주셔서 항상 밝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
다.
 
  교만이 눈을 흐리게 한다
  우리의 영안을 흐리게 하는 세 번째  요소는 교만입니다. 9장 마지막으로 가봅시
다. 예수님께서 자신은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기
위해 왔노라고 하시자 이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40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경이냐? 저런 말을 다하게."하며  코방귀를 끼었습니다. 자신
들은 다 안다고 하는 교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성경을 가장 많
이 아는 지식 계급이었습니다. 성경에 관한 한 그들은  책임을 지기에 충분한 지식
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 살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
취어도 그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앞에 놓고도 그
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리석게도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고 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별 수가  없습니다.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아는 것만큼 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빛이 비취어도 여전히 죄 속에 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 안에는 성경을 많
이 가르쳐서 손해 보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무슨 소린지 아십니까? 성경을 너무
많이 가르쳐 가지고 손해 보는 목사들이 많은가 하면, 성경을 너무 많이 배워서 손
해 보는 교인들도 많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아예 교인들 가르치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설교만 들으면 된다. 설교만  듣고 다른 것은 공
부하지 말라."고까지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차라리  조금 무식해도 순종
하는 것이 조금 안다고 교만해져서 나중에 영적으로  잘못되어 비참한 결과를 초래
하는 것보다 백 배 낫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 잘못 배웠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진
리를 아는 지식은 끝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어서
하나님을 더 알게 해 주시고 마음 눈을 밝히사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소망이 어떠
하며 그 성령의 능력의 역사하심이 어떠함을 알게 하옵소서." 왜 그가 로마 감옥에
서 무릎을 꿇고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더 알
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
는 다 알았다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십자가의  사랑의 풍성함을 다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오묘함을 다 통달한다고 말할 수 있
습니까? 우리는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주님의 영광의  자리 앞으로 더 가
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더 모르는  자가 되고, 더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계속 자라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 안다고 교만을  부린다면 그것은 벌써 영적으로  눈이 가리워졌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성경을  너무 많이 알아서 누가 무
슨 소리를 해도 '또 그 소리냐, 나도 다 안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
니까? 성경을 펴고도 '다 아는  내용인데 뭐' 하면서 자세히 읽지도  않고 몇 장씩
넘기며 거만을 떠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한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만 만에 하나라
도 여러분 마음속에 은연중에 그와 같은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면 벌써 여러분의 영
안이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 그러한 교만을 속히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금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필
요한 것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몸이 건강해야겠고,  가정도 평안해야겠고,
이 사회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지 않아야 되겠고, 내가 하는  일이 뜻대로 잘 풀려
야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똑바로 보
는 것입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못 보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교회 주변 도로를 걸어가다가 가게를 뜯어고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그런 공사가 벌어집니다. 저는 여기서 하도 오래 살다보니 이 지역을 환
히 꿰뚫고 있습니다. 이곳에만 벌써 20여 년을 살았으니 어떤 면에서 이 지역의 터
줏대감이 아닙니까? 그래서 척 보면 장사될 만한 곳인지 아닌지, 무슨 장사가 되고
무슨 장사가 안 될지 지나가면서  봐도 다 압니다. 눈으로 보는  게 있기 때문입니
다. 그러니 가게문을 열려고 한다면 제게 와서  자문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히 헛돈들일 필요 없잖아요? 그러나  제가 지나가면서 보고 '아이고  저 양반 또
눈이 멀었구만. 아마 반년도 못 갈걸.'하고 생각했던 가게들은  정말 반년도 못 가
더라구요. 그러니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차이가 큽니까?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바로 봐야 됩니다. 눈이 흐려지면 안됩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무엇인지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과
악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질과 형식이 어떻게 다른 지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는  눈, 이것이야말로 금년을 우리가  건강하게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잘못된
생각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율법주의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
지지 않도록 합시다.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에 우리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합시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의 눈을 닦고 날마다 성령의 손수건으로 눈을 씻
어내서 정확하게 보고 우리 주님이 계시는 그 나라까지 바로 걸어가기에 조금도 어
려움이 없는 멋진 생활을 금년 한해 동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그리스도의제자들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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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목사  (0) 2015.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