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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2

“개인 무장을 위해 투자하라.”(1.11.2008)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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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무장을 위해 투자하라.”(1.11.2008)

  세상은 만만치 않다. 의욕만으로 이길 수 없는 것이 세상이다. 지혜로운 준비와 철저한 현실 감각이 필요하다. 다윗은 벅찬 상대인 골리앗을 물리쳤다. 다윗의 승리에서 배울 것은 무엇인가?
  첫째, 무장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 다윗은 골리앗과 맨 손으로 싸운 것이 아니다. 물맷돌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도구를 잘 사용하면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된다. 자기 무장을 위해서 투자해야한다. 황량한 벌판에서 곡캥이로 일하는 후진국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제한적이다. 포크레인이나 콤바인으로 일한다면, 혼자서 수백명의 노동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도구가 좋아야 효율이 높다.  미국의 의사는 1인당 20만불 정도의 기계로 무장한다고 한다. 청진기만 들고 있는 후진국 의사는 아무리 뛰어난 의술이 있다고 해도 비교가 안될 것이다. 대학원 시절 펜으로 원고지에 번역을 했었다. 열심히 뛰어야 하루에 50장 정도 쓸 수 있었다. 자료도 일일이 도서관에 가서 찾아야 했다. 지금은 컴퓨터와 검색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때보다 10배 정도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도구가 강하면, 사역도 강해진다. 나는 자전거를 좋아한다. 보통 자전거를 잘 타려면, 엔진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다리 힘이 좋아야 한다. 그러나 자전거도 좋아야 한다. 자전거의 황제라고 하는 랜스 암스트롱이 20만원짜리 자전거를 타고, 내가 랜스가 타는 2천만원짜리 자전거를 탄다면, 랜스는 결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만큼 기계의 차이가 실력의 차이를 가져온다. 쓸데없는 엑세서리에 돈 쓰지 말라. 외국어로 무장하고, 체력으로 무장하고, 도구로 무장하라. 자기 기능이 극대화되는 곳에 돈을 쓰라.
  둘째, 숙련도를 기르라. 똑같은 기계도 얼마나 숙련되었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다. 다윗은 물맷돌을 익숙하게 다루었다. 사울의 갑옷과 칼이 나빠서 안 입은 것이 아니다.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무기도 익숙하지 않으면 나쁜 것이다. 같은 설비도 숙련도에 따라 생산성이 다르다. 실력없는 음악팀은 항상 악기가 없어서 못한다고 말한다. 명필이 붓 가리지 않는다. 어떤 도구에 숙련되었을 때, 더 나은 도구를 요청하는 것이 순서이다. 높은 수준의 음향기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많이 본다. 어떤 것이든 숙련될 때까지 사용하라. 그래야 수준 향상이 가능하다.  있는 것도 쓰지 못하면 좋은 기계는 돼지 앞의 진주이다. 성경에 쓰임받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익숙한 사람들, 숙련된 사람들이었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창25:27)이었다. 히람은 “익숙한 사공”(왕상9:27)을 솔로몬에게 보냈다.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싸움에 익숙한 자”(대상5:18)를 보냈다. 이스라엘은 “찬송에 익숙한 자”(대상25:7)를 세워서 예배를 인도케 했다. 에스라는 “율법에 익숙한 학사”(스7:6)였다. 자기 분야에서 익숙한 것이 사명자의 자세이다. 뭐든지 익숙해 질 때까지 훈련하라.
  셋째, 믿음의 힘으로 무장하라. 다윗은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간다”고 외친다. 단순한 무기와 숙련도의 차이라면, 세상이 더 강할 수 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믿음을 의지한다는 것이 대책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 준비없이 기적을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삶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기적으로 살지 말고, 십자가로 살아야 한다. 내 힘 밖에 없는 듯이 준비하고, 하나님 외에는 아무 힘이 없는 듯이 기도하라. 그것이 성도의 삶이다.



“큰 시험은 큰 믿음을 낳는다.”(1.4.2008)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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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시험은 큰 믿음을 낳는다.”(1.4.2008)

  시험은 믿음을 낳는다. 작은 시험은 작은 믿음을 낳는다. 큰 시험은 큰 믿음을 낳는다. 무엇이 큰 시험인가? 제일 쉬운 시험은 인과관계가 있는 시험이다. 이유를 알 수 있는 시험이다. 납득할 수 있는 시험이다. 말씀을 떠나살다가 큰 시련을 만났다. 그러면 돌아가면 된다. 아무리 시련의 크기가 크다 할지라도 이것은 쉬운 시험이다. 탕자의 시험은 쉬운 시험이다.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외국에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었다. 정답은 간단하다. 아버지께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교만하고 기고만장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무너졌다. 내가 마음이 높았구나, 주 안에서 겸손해야겠구나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엎드리면 된다. 이 모든 것은 납득과 이해와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쉬운 시험, 작은 시험이다.
  큰 시험은 납득이 되지 않는 시험이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쉽게 납득 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만들어 준다고 했는데, 이삭을 죽이면 어떻게 하나?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라는 제사를 명하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은 신 수양으로 모든 긴장과 갈등은 풀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증명된다.
  아합을 피해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던 엘리야에게 시돈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합리성과 논리를 따지면 이것은 무모한 명령이다. 시돈은 어떤 곳인가? 엘리야의 대적 이세벨의 고향이다. 적대적인 장소를 도피처로 삼는 것은 무모하다. 찾아간 집은 과부의 집이었다. 혼자 사는 엘리야에게 오해가 따를 수 있는 과부 집에 간다는 것은 이상하다. 게다가 그 과부는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었다. 몸을 의탁하려면 넉넉한 집에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명령이다. 납득도 어렵고, 이해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한다. 우리는 자주 왜를 묻고, 무엇 때문인가를 묻는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왜 애굽에서 끌고 나왔냐고 물었다. 성경은 이것을 질문으로여기지 않고, 원망으로 여긴다. 결국 원망하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다 죽는다. 100% 이해되고, 납득되어야 움직인다고 한다면, 자기 수준으로만 살겠다는 의미이다. 나보다 더 높은 수준, 하나님의 수준으로 살기위해서는 반드시 자기의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는 알고 가는 것이 아니다. 믿고 가는 것이다.
  순종의 사람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남은 가루로 자기를 위한 떡을 만들라고 명한다.  사르밧의 과부는 마지막 양식을 엘리야에게 주는 순종을 한다. 그래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가루와 기름이 없어지지 않았다. 생명이 생명을 낳고, 순종이 순종을 낳은 것이다. 사르밧의 과부의 순종이 그렇게 힘든 것이었나?  사실 아무 것도 아닌 매우 가벼운 순종이다. 마귀는 성도들을 착각케 만든다. 굶어 죽겠되었다. 한끼 먹고 죽으나, 안 먹고 죽으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  순종이 어려워 보이는 이유는 배고픈 느낌과 한끼의 밥을 비교했기 때문이다. 순종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깨지는 길”(12.28.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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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는 길”(12.28.2007)

  맞으면 깨진다고 한다. 두꺼운 자아를 깨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통이 필요하다. 어떤 때는 병으로, 어떤 때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깨지기도 한다. 탕자는 아버지를 저버리고 허랑방탕하게 지낸다. 외국에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깨진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생각나서 돌아온다. 맞아서 깨지는 것은 아프다. 대부분 깨지는 길이 맞아서 깨지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찬양도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맞아서만 깨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뜨겁게 사랑하고, 의를 붙들고 제대로 살려고 발버둥쳐도 깨진다. 한번 철저히 말씀대로 살려고 애써보라.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도저히 자신은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산산조각이 나고, 철저히 깨진다. 마틴 루터는 철저히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다. 죄만 지으면 신부를 찾아가서 고해성사를 했다. 너무 자주 오니까, 신부가 “좀 한꺼번에 몰아서 가져오면 안되냐”고 외쳤다는 일화도 있다. 루터가 발버둥치면서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자신은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자각이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치며 일어섰던 것이다. 뜨겁게 사랑하고, 뜨겁게 순종하면,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하는 교만과 자부심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깨지는 길로 가게 된다. 종종 불효자를 만난다. 양심이 있어서 어떤 계기를 통해서 깨지곤 한다. 그러나 불효자만 깨지는 것이 아니다. 효자는 더 철저히 깨진다. 오랜 병상의 어머니를 10년 넘게 섬겼던 헌신적인 아들과 며느리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 정도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고 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불효자라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뜨겁게 효도해도 깨지는 것을 보았다. 효도하면 할수록 자신을 온전한 효를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깨지는 것이다.  뜨겁게 사랑할 때, 더 크게 깨진다.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는 남편이 있다.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랑의 뜨거움을 부인할 수 없는 진실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꽃같은 나이에 데려와서 험악한 손을 만들었구려.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구려.” 뜨겁게 사랑하는 남편의 깨지는 모습을 본다.
  보통 참회록은 죄인이 쓰는 것인 줄 안다. 그러나 참회록은 성자가 쓰는 것이다.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깨지면서 고백하는 것이 참회록이다. 그래서 성자 어거스틴이 참회록을 쓴 것이다. 깨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스며들 수 있다. 왜 믿는다고 하면서 메마르고 거친가? 깨짐이 없기때문이다. 왜 지속적인 능력이 임하지 못하는가? 맞아서 깨지는 것 외에는 깨지는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사사기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말씀대로 산다고 발버둥치고, 내가 말씀대로 살았다고 외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나는 올바른데, 남은 모두 거짓 선지자라고 외치는 것이 율법주의이다. 진정한 헌신과 뜨거운 사랑은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과 함께 깨지는 것이다. 이런 깨짐만이 교회에 새생명을 줄 것이다.



“사랑받으면 들린다.”(12.21.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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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으면 들린다.”(12.21.2007)

 사랑을 반복적으로 받은 사람은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사랑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많이 사랑받으면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생기면 들을 수 있다. 믿지 못하면 들을 수 없다. 어떤 여자를 의심한다. 그러면 뭘 마시라고 해도 독약 탄 것 아닌가하며 의심한다. 자꾸 보험을 들면, 무슨 음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하며 배후를 살펴본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들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중요 사역 때마다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너를 건져주겠다, 너를 보호해 주겠다는 말일 것으로 상상한다. 그런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였다. 한마디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의 기쁨이라”는 말이다. 위기의 순간에 주신 말씀은 사랑확인, 믿음이 확인이었다.
  요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많이 다룬다. 제스처, 억양, 유머 등의 기법을 배워야 제대로 전달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커뮤니케이션은 사랑의 관계, 믿음의 관계이다. 사랑하면 들린다. 믿으면 들린다. 사랑과 믿음은 얼마나 강력하지 죽음을 향해 나가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것은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게 한다. 돈벌고, 공부하고, 안주를 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두 죽음으로 부터 멀리 도망치려는 의도이다. 그런데 결국 죽음의 함정에 빠져 죽음의 밥이 된다. 그러나 사랑을 느끼면, 죽음을 향해간다. 희생의 자리로 간다. 십자가를 향해 간다. 바울은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울 수 있다”(고후4:11)고 외친다. 예수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하다고 외친다.(빌3:10) 사랑을 느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희생이 힘들지 않다.
  제니퍼 로페스의 “이너프”(enough)라는 영화가 있다. 식당 종업원인 로페스에게 어떤 멋진 남자가 꽃과 함께 데이트를 신청한다. 기쁜 마음으로 승락하려는 순간, 뒤의 남자가 소리친다. “저 사람과 데이트하지 마세요. 지금 친구랑 내기 중이예요. 데이트 성공하면 200달러 받는다고 하는 것을 봤어요.” 로페스는 자기가 한낱 내기의 대상이 될 뻔한 상황에서 구해준 그 남자가 고마왔다. 그러다 결혼한다. 그런데 남편은 폭력을 쓰고, 바람 피우는 나쁜 사람이었다. 도망 중에 알게 된 것은 식당에서 꽃을 준 남자가 남편의 친구라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무슨 말인가? 식당에서의 일이 모두 조작이었던 것이다. 조작을 폭로한 자체가 조작었다는 말이다.세상은 진짜 사랑이 없다. 진짜 믿음이 없다. 그래서 메마른 것이다.
  내가 강해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은 남자에게 줄 것이 없을 때 떠나고, 남자들은 여자에게서 얻을 것이 없을 때 떠난다.”는 말이 있다. 과연 진정한 사랑도 그런가? 부모님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질 때가 언제인가?  뭘 줄 때가 아니다. 좋은 것을 주고 싶지만, 없다. 그래서 안타까워할 때. 가장 진한 감동을 받는다.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것을 주려고 하나,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할 때, 가장 진한 사랑을 느낀다. 주고 싶으나 주지 못하는 마음이 진한 사랑이다. 사랑은 많이 가지고 있다고 잘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이 있으면 된다. 안타까워하면 된다. 사랑만이 치유케 한다. 사랑은 믿게 한다. 사랑은 들리게 한다. 그래서 사랑하면 아무 것 없어도 행복하다.



“특별에서 일상으로”(12.14.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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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에서 일상으로”(12.14.2007)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일상화시키기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성숙이란 특별에서 보통으로, 기적에서 일상으로 가는 것이다. 여리고 성의 승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한 승리였다. 일종의 기적을 통한 특별한 승리였다. 그러나 그 다음 전투 아이성에서는 매복과 전략에 의해서 승리하게 된다. 기적에서 일상의 전략으로 바뀐 것이다. 믿음 생활을 처음할 때에는 많은 기적이 있다. 어린 아이와 같이 날씨를 위해서 기도해도 응답되는 예가 많다. 유치해 보이는 기도를 해도 응답될 때가 많다. 왜? 믿음이 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하나님도 특별하게 다루신다.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게 되면, 이제는 말씀과 원리에 의해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특별은총에서 일반은총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로 먹이셨다. 농사지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자 만나는 그쳤다. 이제는 농사 지어서 먹고 살라는 뜻이다. 특별 은총의 삶에만 안주하지 말고, 일반은총 속에서 땀흘리며 열매를 거두라는 뜻이다. 사도행전에는 제법 많은 기적들이 나온다. 그러나 서신서에 가면 기적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말씀으로 대체가 된다. 무슨 뜻인가? 이제는 말씀을 붙들고, 원리를 의지하여 살라는 뜻이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과부들 사이의 문제가 일어났다. 교회는 기적으로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집사를 세우는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한다. 특별에서 일상으로 변화된 것이다. 한국교회는 여리고 전법 밖에 모르는 듯하다. 문제가 생기면 그냥 돈다. 가지고 싶은 땅이 있으면 그냥 돈다. 단순히 믿음으로 이룰 수 없다는 믿음 지상주의로 나간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신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전략을 추구하고, 준비해야 한다. 선교사도 처음에는 그냥 가도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준비하고 떠나야 한다. 특별은총의 힘에서 일반은총으로 가야 한다. 기적을 맛보았으면, 실력을 길러야 한다.
  일상의 능력을 기르는데는 현장만큼 좋은 곳이 없다. 현장은 봐주는 것이 없다. 냉정하게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고 평가한다. 그래서 현장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일수록 현실감각이 뛰어나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공부 잘하는 것 하나로 인하여 모든 분야에서 관대하게 처분을 받는다. 학교 다닐때 공부 잘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로 인정받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공부만 잘하면, 버릇이 없어도 용납된다. 공부만 잘하며 교만해도 용납된다. 공부만 잘하면 웬만한 문제를 일으켜도 용서받는다. 이런 아이가 사회에 나오면 문제가 된다. 이제는 공부만으로 봐주지 않는다. 공부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이제는 그의 인격, 그의 태도, 그의 근면성, 그의 관계성이 모두 철저하게 평가받는다. 이런 공격적인 압박에 견디서 못해서 몇번 회사를 옮기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공부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소위 말하는 늦깍이 고시생이 되는 것이다. 반면에 공부 못하는 아이는 봐주는 것이 없다. 철저하게 검증을 받는다. 용서가 없다. 용납이 없다. 실랄한 공격이 그를 괴롭힌다. 그러다 보니 굽혀야 할 때, 높혀야 할 때를 안다. 나가야 할 때, 머물러야 할 때를 안다. 고쳐야 할 것과 주장해야 할 것을 안다. 과연 누가 전체 인생을 놓고 볼 때, 더 복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실패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위기를 맞게 된다. 현장은 실패하는 곳이다. 현장에서 철저한 검증 속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진짜 실력이다. 현장이 없는 곳은 특별한 곳이다. 그곳은 보호받는 곳이다. 실제가 아니다. 언제나 특별은 일상으로 옮겨져야 한다. 현장을 통해서 온실이 아닌 현실에서 강력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12.7.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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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12.7.2007)

  은혜를 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모든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다. 솔로몬은 자기가 왕위에 오른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기가 왕이 된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핍박자요 훼방자였던 자기가 사도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기가 사도가 된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이다. 은혜를 아는 자는 항상 모든 복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원하는 직장, 원하는 학교에 들어갔다. 은혜로 된 것이다. 그렇게 된 모든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이다.
  어떤 부잣집 딸이 있었다. 부모의 경제력이 넉넉하니 좋은 반지, 좋은 시계를 차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떤 형제를 만나 교제가 시작되었다. 형제가 반지를 하나 사주었다. 내 눈에 분명히 이전에 끼던 반지보다 훨씬 값싸고, 좋지 않은 반지였다. 그런데 그 자매는 항상 그 형제가 사준 반지를 자랑스럽게 끼고 다닌다. 그리고 항상 그 오빠가 이 자켓을 사주었다, 이 가방을 사주었다고 말한다. 자기의 모든 것의 원인을 그 오빠라는 형제에게서 찾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은혜의 마음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나님께로 부터 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지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행동에서 항상 하나님이 원인이라는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른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잡혀간다. 아브라함은 군사들을 이끌고 롯과 그의 일행을 구해준다. 구출함은 받은 소돔왕이 아브라함에게 전리품은 가져가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은 소돔왕의 이런 제안에 정중하게 사양한다. 단순히 겸손, 겸양, 사양하는 마음때문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주변 사람들이 “소돔왕이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창14:23)는 말을 듣는 것인 싫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부자였다. 복의 근원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축복의 원인을 하나님 말고 다른 곳에서 찾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뭐든지 시작할 때는 약함을 토로하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약함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기 때문이다. 50대에 명예퇴직한 분이 고기집을 열었다가 실패했다. 왜? 잘나갈 때 일하던 방식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옷차림, 마인드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이 부담스러워서 더 이상 그 식당에 가지 않는다. 반면에 또 다른 분은 청소 대행업을 시작했다. 자신이 새로운 분야에서는 초년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 25세의 젊은 사람이라고 해도, 먼저 시작한 사람을 선배 대우하며 배웠다. 낮은 자세, 약한 자세로 출발하니 곧 그 분야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켜져 있는 회사 컴퓨터를 보고, 자신이 일하던 분야의 지식을 알려주었다. 그 기업 사장은 기쁨으로 그를 고문으로 세워주었다. 물론 하던 청소대행업은 계속했다. 동시에 두가지 직업을 가지며, 다시 재기했다는 이야기이다. 약함으로 시작해야 길이 열린다. 의지하는 자세로 나가야 은혜가 임한다.


열정은 copy 할 수 없다.”(11.29.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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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copy 할 수 없다.”(11.29.2007)

  중증 장애인 사역을 하는 자매가 있다. 장애인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물었다. “중증 장애인은 부족합니다. 반응이 느립니다. 학습효과도 없고, 가르쳐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교육할 수 있는 자세, 그것이 특수 교육의 기본 자세입니다.” 중증 장애아들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실망하고, 포기한 것을 기가 막히게 알아 본다고 한다. 일단 선생님이 실망하면, 교육은 불가능해진다. 교육의 내용이 무엇인가?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지도자가 할 일이 무엇인가?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부족하고 아무리 반응이 느리고, 아무리 학습효과가 없다 할지라도 끝까지 실망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지도자의 자세이다.
  꺼져가는 등불이 있다. 후 불어서 끄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꺼져가는 등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다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다 끝난 것을 품어서 다시 살리는 것이 능력이다. 다 포기해도 나는 저 사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 마음, 그것이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참 어리석다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 가능성도 없는 것을 왜 품고 있느냐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진정한 목자이다.
  월트 디즈니 사는 미국 사회에서도 좋은 기업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한번은 경쟁회사의 사원들을 자기 회사에 초빙했다. 그리고는 월트 디즈니의 모든 시설을 다 보여주었다. 기업 기밀에 속한 것 같은 내용도 서슴없이 보여주고, 설명까지 해주었다. 탐방을 마치고 난 후 한 사람이 물었다. “이렇게 회사의 아이디어와 노하우를 다 공개해도 되는 것입니까?” 월트 디즈니의 직원이 의미심장한 대답을 했다. “아이디어나 이런 연구시설은 모방할 수 있지만, 아이들을 사랑하는 월트 디즈니의 열정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얼마든지 껍데기는 베껴가라는 말이다. 가슴 속에 있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열정이 있기에 어떤 도전에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 사랑의 열정에서 피어나는 엄청난 자신감이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다. 정보는 넘쳐난다. 실제로 정보의 바다에서 산다는 말이 실감난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보가 아니다.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의 열정이다. 집중된 사랑은 불로서 일어난다. 가슴에 불이 있는가?  21세기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한다. 간단한 말로 표현하면, “영혼을 터치”하지 않으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열정은 분명히 능력이다. 일을 이루는 사람은 집중된 사랑을 통한 열정이 있다. 그 열정은 카피될 수 없다. 
  세상의 도전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다. 아이디어, 노하우는 얼마든지 베끼라고 하라. 우리에게는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 “나는 저들을 뜨겁게 사랑한다. 나는 저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 이 열정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사랑의 열정이 있는 사람은 아부 없이도 살아간다. 타협없이도 살아간다. 함정도 이겨낼 수 있다. 사랑의 열정으로 일하라. 그러면 영혼을 얻게 될 것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11.22.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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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11.22.2007)

  시험을 잘 보려면,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출제자가 묻고자 하는 내용을 알아야 한다. 출제자가 확인하고자 하는 내용을 언급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점수가 나온다. 자기의 의도를 말하거나, 자기의 의도대로 답안을 작성하면 성적이 나올 수 없다. 출제자의 의도를 맞춰주는 것, 그것이 시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종종 우리를 시험하신다. 그 말은 하나님이 보기를 원하는 내용이 있다는 말이다. 시험을 통과하는 비결은 출제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그 의도대로 순종해 나가는 것이다. 자기 중심이 되어서 자기의 의도대로 답을 풀어나가는 것은 자기의라고 말한다.
  사울 왕에게는 두번의 시험이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시험과 성공적인 상황에서의 시험이다. 삼상13장을 보면, 블레셋의 공격이 있을 때였다.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해야하는데, 사무엘은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외국으로 도망치고, 남은 백성들은 떨고 있다. 사무엘이 오는 시간이 더 길어지자 사람들은 흩어지기 시작한다.(삼상13:8) 하나님의 출제 의도는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말씀의 기준을 지키는가하는 여부였다. 그러나 사울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자기가 직접 드린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에서 탈락한 이유이다.
  한번 더 시험이 있었다. 이번 시험은 성공적인 상황에서의 시험이다. 삼상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다. 물론 압도적인 우위의 승리를 허락하신다. 이전의 시험이 위기 속의 시험이라면, 이번 시험은 승리 속의 시험이다. 사울은 이 시험에서도 실패한다. 아각 왕을 죽이지 않고, 좋은 것은 남기고 멸하지 않는다. 핑계 논리는 이것이다.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중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삼상 15:21) 백성이 원하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편으로 보면,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출제 의도는 철저한 순종을 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답변은 탈락이라는 것이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2-23) 하나님이 중요하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야 한다. 아무리 내가 보기에 좋아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닐 수 있다. 순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성 프란체스코가 제자들을 뽑았다. 시험 문제는 씨를 나누어주고 1달 이후에 꽃을 피운 모습을 통해서 선발하겠다는 것이었다. 여러명의 후보들이 씨를 가지고 정성껏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상은 씨를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씨같이 생긴 철덩이를 준 것이었다. 철덩이이기에 결코 자라날 수 없었다. 그런데 1달이 지나자 여러명의 후보들이 아름답게 자란 꽃을 가지고 등장했다. 유독 한 사람만이 빈 화분을 들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누가 합격했는가? 빈 화분을 들고 있는 사람이다. 왜? 출제자의 의도가 아무 꽃도 피지 못한 모습을 정직하게 가지고 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열매와 성공만을 보신다고 착각하지 말자. 험난한 상황 속에서 아무 열매 없는 것이 진실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사야는 거의 열매가 없는 선지자였다. 그런데 누가 이사야를 실패한 선지자라고 말하겠는가? 진실이 중요하다. 정직이 중요하다. 주어진 사명에 대한 충성이 중요하다. 순종하자. 무조건 순종하자. 그것이 하나님의 출제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인생의 정답을 풀어가는 지름길이다.

“터치의 원리”(11.16.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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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치의 원리”(11.16.2007)

  더러운 것을 접하면 더러워지고, 깨끗한 것을 접하면 깨끗해진다. 롯의 타락의 이유는 무엇인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후 더러운 세상 문화와 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돔 사람들의 위협 앞에 딸을 내어주겠다는 롯의 태도로 보건대 롯도 이미 소돔의 문화에 상당히 동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을 행하기 위한 방법 자체가 이미 악으로 기울어져 있다. 즉 선을 위해 악을 택하는 모습이다. 결국 잘못된 접촉은 롯으로 하여금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소돔을 도망쳐 나오게 되지만, 아내는 불순종으로 소금기둥이 되었다. 산 속에 숨어 사는 사이에 딸들과 부정한 방법으로 자손을 낳아 모암과 암몬 자손을 탄생케 한다. 한마디로 잘못된 접촉으로 인한 재앙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접촉이 중요하다. 로마의 시스틴 성당의 천정 벽화을 보라.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는 장면을 미켈란젤로는 천재성을 가지고 묘사한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을 아담의 손가락과 하나님의 손가락의 접촉으로 묘사한다.  사람의 감각 가운데 손끝이 가장 예민하다고 한다. 그 손끝의 만남을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묘사한 것이다. 영화 ET에서도 외계인과 지구인의 접촉을 손끝 접촉으로 묘사했다. 생명과 기쁨을 얻고 싶은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라. 하나님과의 접촉이 우리를 살리는 힘이다.
  영화 홀랜드 오퍼스를 보자. 홀랜드 선생은 꿈이 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 그는 꿈 속에만 살아간다. 먹고 살기 위해서 낮에는 선생을, 밤에는 오페라에 전념한다. 홀랜드는 항상 자기가 실패자라고 생각한다. 한번은 클라리넷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빨강 머리의 여학생과 만난다. 그만두라는 말에 우는 빨강 머리의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조언한다. 아무리 연습해도 안된다고 한다. 자기 빼고는 모든 가족이 다 명문 학교를 나오고, 우수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완전히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것이다. 홀랜드는 악보만 연주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감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악보는 배울 수 있지만, 감정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마치 한편의 설교를 듣는 듯하다. “연주는 즐거워야 한다.” “하트가 있어야 한다.” “악보를 버리라”  거울을 볼 때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이 뭐냐고 묻는다. “머리카락입니다. 아빠가 노을 같다고 해요.” “노을을 생각하며 연주해라. 눈감고, 노을을 연주해라” 선생님은 힘이 있다. 그 힘으로 실망한 한 학생을 터치해 주니, 그가 일어선다. 합주에서 클라리넷을 멋지게 연주한다. 나중에 그 아이는 주지사가 되어서 홀랜드의 노년의 은퇴식에 와서 멋진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부탁한다. 스스로 실패자라고 느낀 홀랜드에게 당신은 실패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꿈과 소망을 준 영웅이라고 말한다. “당신의 우리의 음악이요, 음표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심포니입니다.” 하나님의 터치로 새 생명을 얻은 존쟁이다. 이제 그 은혜의 부담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삶을 빛나게 해주라. 밀알처럼 다른 사람을 성공시켜 주라. 한 알의 밀알 되어 썩어지는 예수님처럼 살아가자.


“분수형 인간 vs. 폭포형 인간”(11.8.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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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형 인간 vs. 폭포형 인간”(11.8.2007)

  겸손함이 중요하다. 과거의 성공은 미래의 성공의 장애물이다. 작은 성공이 교만을 가져온다면, 미래의 성공에 크나큰 장애물이다. 특히 물질적 성공은 겸손에 대한 큰 시험이다. 성공이 왔을 때, 자기를 부인하고, 더 낮아지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성공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성공이 왔을 때, 더 낮아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왜 성공을 주셨는가? 그것을 재투자해서 진정한 열매를 거두라는 뜻이다. 성공만한 시험도 없다.

  인생에는 분수형 인생과 폭포형 인생이 있다. 분수형 인생은 자꾸 자신보다 더 높은 곳을 추구한다. 더 나아보이려고 치장한다. 500명을 감당할 사람이 자꾸 1,000명의 자리로 가려고 한다. 속에서 용을 쓰면, 뿌려대야 하기에 언제나 지치고 힘들고 불안한 인생을 산다. 그리고 언젠가는 고갈되어 분수는 멈추게 되어 있다. 언제까지나 뿜어대는 분수는 없다. 왜?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폭포형 인생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강력하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자기 위치보다 더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그 힘은 더 강력하다. 하나님의 힘은 폭포의 힘이다. 하나님의 힘은 내리 꽂는 힘이다.  추락하는 힘이다.  낮아지는 힘이다. 그래서 강력하다. 예수님보다 더 강력한 폭포의 힘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 거기다가 종의 모양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내리꽂고, 내리꽂는 강력한 폭포의 힘이다. 결국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신다.(빌2:5-11) 성도의 길은 폭폭의 길, 낮아짐의 길이다.

  최고의 낮아짐은 기도이다. 기도없는 사람은 자기 수준으로 산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수준으로 산다. 기도해야 수준이 높아진다. 기도없는 수준향상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누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는가? 기도하는 자이다. 모든 사람들이 막혔다고 할 때에 기도의 능력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시대의 지도자가 나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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