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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1

명품 옷에 피뿌린 이유 

  제사장이 입는 옷을 에봇이라고 한다. 이 옷은 최고 의류 디자이너가 만들고, 온갖 보석을 달아놓은 명품 옷이다. 에봇을 연구한 사람에 의하면, 에봇 한 벌은 지금 가치로 적게 잡으면 2,000만원, 많이 잡으면 2억에 해당되는 아주 좋은 옷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귀한 에봇에 피를 뿌리라고 말씀하신다.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에 뿌리라 그와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출29:21) 물론 속죄로서의 피를 의미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인 의미도 있다고 생각한다. 에봇은 비싼 옷이다. 제사장들은 매일 때묻을 걱정, 더러워질 걱정하느라 사역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표백제도 없었다. 드라이 크리닝도 없었다. 피자국은 쉽게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에봇을 입는 제사장은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옷에 피를 뿌린다. 기왕에 버린 옷이기에 부담감이 다 사라졌을 것이다. 피뿌린 옷은 제사장의 행동에 자유로움을 주었을 것이다.  물건 중에 제일 불편한 것이 새 것이다.  새 옷은 불편하다. 너무 잘 다려진 것도 불편하다. 좀 구겨지고, 좀 망가지고, 좀 더러워져야 편안함을 느낀다. 삼일교회가 편안한 이유가 있다. 더럽기 때문이다. 건물도 오래되었다. 기자재도 고급스럽지 않다. 카페트에 커피를 조금 흘려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다. 원래 버리기 직전의 카페트같기 때문이다. 거기서 오는 여유, 자유로움이 있다. 사진을 찍을 때, 굳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라고 해도 잘 못한다. 자유로움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그래서 좋은 사진은 스냅으로 찍어야 한다. 자유로움이 살아 있어야 살아있는 사진이 나온다. 자유로움이 힘이다. 후배 목회자들이 설교에 관해서 묻는다. 자유로움이 있는 설교가 가장 좋은 설교라고 설명한다. 준비가 철저하면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책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온 자유로운 이야기같은 설교가 좋다. 관원들이 제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한다. 그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20) 설교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것이다. 읽은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들은 것을 잘 전하는 사람이 좋은 설교가이다. 교역자 수련회로 필리핀에 간다. 교역자들에게 미리 주문한다. 여행 중에 보고 들은 것을 돌아와서 제일 잘 전하는 사람이 최고의 수련을 한 사람이라고! 보고 들은 것을 전하면 자연스럽다. 보고 들은 것을 전하면, 사람들은 졸지 않는다. “홀란드 오퍼스”라는 영화가 있다. 홀랜드 선생님이 나중에 시장이 되는 여자 학생에게 클라리넷을 가르친다. 이 여자 아이는 열심히 클라리넷을 연습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틀린다. 자신감을 다 잃어버린다. 왜 그런가? 연주를 수학공식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여자 아이는 실력은 있다. 그런데 그 실력이 매어있다. 자유가 없다. 선율에 생명이 없다. 홀랜드 선생님이 말한다. “눈을 감고, 네가 가장 기쁠 때, 아름다울 때를 꿈꾸어라. 눈을 감고 마음으로 연주하라. 들판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연주해 봐라.” 그때부터 연주가 되기 시작한다. 자유로움을 찾기 시작하니까, 실력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자유로움이 생명이다. 머리만으로는 안된다. 자유로운 가슴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제일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라고 한다. “지금 즉시 머리에서 가슴으로 30센티 내려오라”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될 것이다.


      
                                                                                                         
 

“영적 사이코패스”

  최근에 영화 “숙명”을 보았다. 깡패인 4명의 친구 중 한명이 배신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이다. 송승헌은 주인공으로, 권상우는 배신한 친구 깡패로 나온다. 배신자인 권상우는 유독 자기 여동생에게만은 뜨거운 사랑을 베풀고,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정하고, 잔인하게 대한다. 깡패의 마음은 무엇인가? 남의 아픔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이다. 실제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남의 아픔에 대해서 무감각하다면, 그는 깡패의 마음을 가진 것이다.
  10살, 8살짜리 예슬, 혜진 어린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범인이 있다. 또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는 정황도 나오고 있다. 이 범인에 대해서 “사이코 패스”(psychopath)라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사이코패스는 반사회성 성격 장애이다. 생활 전반에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거나 침해하는 성격적 장애를 말한다. 양심이 거의 작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니까, 죽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자기의 아픔으로 느껴지면 결코 타인을 공격할 수 없는 것이다. 점점 자기 밖에 모르고,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사회적인 사이코패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외상 없는 심리적 타격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이 “중독”이다. 중독은 집착의 문제이다. 들어갈 때는 자유롭게 들어갔지만,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다. 술에 대한 집착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알콜 중독이라고 한다. 일에 대한 집착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일 중독이라고 한다. 오직 그것 아니면 안된다는 집착이 중독이다. 자기 사랑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 보이지 않는 중독이 사이코패스이다. 하나님은 중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서 여러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추수 이후 첫열매를 바치라고 한다. 농부의 마음은 어버이의 마음이다. 자식같이 귀한 곡식을 거두면 집착이 생긴다. 그런데 첫열매를 드리는 순간 집착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돈에 대한 욕심이 있다. 십일조를 드리는 순간에 돈에 대한 집착과 중독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일에 대한 집착도 안식일을 지키는 순간에 일에 대해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순종의 삶은 언제나 중독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성령충만하면 다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의 아픔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최근 남미에 부흥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은혜를 깨닫게 된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한 찬양이 있다.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라는 찬양이다. 은혜 이후 가장 절박한 소망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과 같은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을 갖게 해달라는 간절한 찬양이다. 은혜없는 메마른 마음은 영적 사이코패스이다. 그러나 은혜가 넘치고, 타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느껴지는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결국 메마름은 죽음으로 이끈다. 그러나 눈물이 있는 은혜의 마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으로 이끈다.

                                                        
                                                                 
                                                                       

                   

 

“실패의 정화작용” 

 욥기를 읽으면, 욥은 100% 순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온갖 고난 중에서도 결코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다. 이런 순수한 욥의 믿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단과 내기를 한다. 하나님의 공명심(?)때문에 어쩔수 없이 욥이 고난을 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완전한 오해이다. 욥은 결코 완전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
 고난을 당하면, 속에 있는 것이 나온다. 왜 십자가 형이 무서운가? 육체적 고통, 수치심이 오랜 시간 지속된다. 그러면 사람은 속에 있는 모든 악한 것들, 궤사, 더러움이 나온다. 십자가형은 자기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들을 다 쏟고 죽는 형벌이다. 그래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흔들며 더러움을 참지 못하고 피해간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형을 당하면서 더러움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 용서, 기도, 생명이 나왔다. 여러 차례 십자가 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은 이런 특이한 현상 때문에 두려워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하나님의 사람에게 왜 고난이 있는가? 자기 속에 있는 진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무의식 세계 속에 숨겨진 진실된 자아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고, 자신의 건강을 잃었다. 그때 그의 아내가 이렇게 외친다. “아직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는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 욥의 아내는 악처이고, 욥은 탁월한 신앙인으로 비춰지는 장면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닐 수 있다. 욥의 아내는 고난 중에 여러 가지 말을 했을 것이다. 아픔, 괴로움, 신앙적인 갈등 등을 토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말 중에 욥이 기억한 것은 “아직도 믿음을 지키는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이었다. 자기 가슴 속에 없는 것은 들리지 않는다. 가슴 속에 흔들림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이야기가 들린다. 자기 가슴 속에 욕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욕하라는 말이 들리는 것이다. 속에 교만이 있는 사람이 교만이 보인다. 속에 음욕이 있는 사람이 음욕이 보인다. 욥은 실제로 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속에 욕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 말이 가슴에 남은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까지도 변화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오랜 기간 세 친구들과 논쟁하면서, 욥의 순전치 못함이 드러난다. 자기의 공로와 선행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던 욥의 태도는 산산히 무너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중보자를 찾는다.(욥16:19) 그리고 그 내면 깊숙이 있는 죄악을 철저히 회개한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장난의 산물이 아니다. 성도의 고난은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다. 내면 깊숙이 묻혀 있던 연약의 침전물들을 들춰내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쉽게 인식하지 못한 부족한 것들까지 완전히 정화시켜 버린다. 실패를 겪으면 깨끗해 진다. 실패를 겪으면, 부족한 것들이 채워진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2-4) 고난과 연단을 통해서 ‘괜찮은 성도’(good christian)에서 ‘성숙한 성도’(best christian)로 변화될 것이다.


          
                                 
                                     

                 

 

“메마름이 가시를 만든다.” 

  미국 여행 중 LA에서 팜 스프링스로 운전을 하게 되었다. 동쪽으로 갈수록 사막이 된다. 사막으로 갈수록 점점 나무들의 모습이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큰 잎사귀에서 사막 쪽으로 가면 갈수록 잎사귀가 작아졌다. 급기야 사막에 이르러서는 모두 가시로 변화되었다. 가시는 원래 잎사귀였다. 메마름이 가시로 만든 것이다. 사막을 가보라. 온통 기시 선인장 뿐이다. 원래 잎사귀 였던 것들이 메마르게 되어서 가시가 된 것이다. 메마름은 재앙이다. 메마름이 가시를 만들어 나를 찌르고, 남을 찌르고 되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를 보면, 이생의 염려가 많은 사람을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로 비유한다.(눅8:14) 자꾸 염려하면 메말라진다. 자꾸 염려하면 가시가 된다. 메말라지면 날카롭게 되어서 공격하게 된다. 염려를 버리라. 가시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염려의 반대 개념은 기도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염려하면 가시 되지만, 기도하면 가시가 변하여 잎사귀된다. 주변에 완전히 선인장같은 사람을 보게 된다. 너무 날카로워서 대화가 안되는 사람이 있다. 메말라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너 선인장이냐”라고 묻는다. 흘러넘치는 기도로 가시에서 잎사귀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자기도 살고, 남도 산다.
  살다보면, 죄의 앙금이 있다. 여러 상처가 있다. 못 볼 것을 보고,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 독으로 남는다. 먼지 많은 곳에서 일하던 사람은 저녁에 돼지고기 삼겹살을 먹는다. 기관지에 쌓인 먼지를 씻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과학적으로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시도는 지혜로운 것이다. 나쁜 것이 쌓인 것은 씻어내야 한다. 인생에서 쌓인 독을 씻기는 길은 기도 외에는 없다. 독이 올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왜? 기도가 없으니 해독이 안되기 때문이다. 독이 있으니 자꾸 날카로워진다. 자꾸 가시를 낸다. 자꾸 폭발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간다.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 때문에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다. 요셉보다 더 독기가 넘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 되고, 자비의 사람이 된다. 왜? 기도가 그의 독기를 사라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기도는 독기를 없앤다. 기도는 가시를 없앤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습기가 없어서 말랐다’(눅8:6)고 한다. 습기가 있어야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워야 품을 수 있다. 수분이 들어가면 부드러워진다. 성도에게 고난이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상한 마음이 되라는 것이다. 금간 항아리가 되라는 말이다. 습기가 넘치는 인생이 되라는 뜻이다. 고난이 있어야  습기가 있는 삶,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는 인생이 된다. 자꾸 마음에 습기를 제공해야 한다. 감동을 받아야 한다. 눈물을 흘려야 한다. 깨진 마음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연약을 토로해야 한다. 자복하는 심령이 되어야 한다. 메마름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그러면 마음이 바위된다. 마음이 돌이 된다.  기도를 통해서 가시를 변화시켜 잎사귀 만들라. 습기를 통해서 돌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라.


“연단을 위한 광야”(2.28.2008)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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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을 위한 광야”(2.28.2008)

  요셉, 다니엘, 여호수아 등은 눈에 띄는 허물을 발견할 수 없다. 허물없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지만, 성경은 그들의 허물에 대해서 침묵한다. 이들에게서 큰 허물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 광야의 연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요셉은 노예와 감옥이라는 광야를 통과했다. 다니엘은 풀무불과 사자굴의 위협을 통과했다. 여호수아는 오랜 기다림의 광야를 통과했다. 광야는 지나기에는 힘든 곳이지만, 인생의 유혹과 시험에 대한 백신 역할을 감당한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둘다 시작할 때의 배경은 비슷하다. 둘 다 겸손했고, 둘 다 출중한 외모가 있었고, 둘 다 리더십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무너졌고, 다윗은 세워졌다. 다윗에게는 광야가 있었고, 사울에게는 광야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야의 연단이 없는 인생은 약하다. 광야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넘어졌다가 일어서는 힘이 없다. 광야가 없으면, 광야의 시간 이상으로 그의 삶에서 대가를 치루게 된다.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팔 수 있는가? 물론 있다. 실제로 에스키모에게는 냉장고가 필요없다. 그러나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문화인은 냉장고 정도는 있어야 된다, 선진국 시민은 냉장고는 필수라고 계속해서 광고하면 된다. 그들의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욕망을 계속 자극하면 에스키모도 냉장고를 산다. 필리핀의 이멜다는 구두가 3,000켤레였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그만큼의 구두가 필요없다. 그러나 욕망으로 살면 이멜다 같은 행동이 가능하다. 이멜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필요가 아닌 욕망에 이끌려 산다. 그래서 쓸데없는데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초점없는 인생을 산다. 왜 광야의 사람이 강한가? 광야는 우리에게 필요에 의해 사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필요로 살면, 많은 것이 없어도 된다. 진짜 중요한 일에 집중해서 살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수도원에 방문했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무엇을 요청할까 한참 기대했다. 수도사가 말했다. “그것없이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필요는 크지 않다. 욕망이 크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영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왕이 엘리자베스 1세이다. 1644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력화시키기고 대서야 제해권을 장악한다. 엘리자베스의 강점은 그의 광야에서 찾을 수 있다. 생후 3달만에 어머니와 떨어져 살게 되었다. 3살 때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 앤볼린을 참수시킨다. 그러고 어머니의 시녀인 제인 시무어와 결혼한다. 얼마나 한이 맺힌 인생이었겠는가. 이후 피의 메리라 불린 언니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엘레자베스 1세를 런던 탑에 가두었다. 자신도 어머니처럼 언제 참수형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위기의 순간들이었다.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영국의 왕이 되었다고 통보받는다. 말 그대로 ‘감옥에서 왕좌로’ 옮겨진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감옥에서 왕좌로 옮기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그의 평생 그 광야의 연단을 잊지 않는다. 모든 정책에 있어서 욕망의 결정이 아닌 필요의 결정을 한다. 광야가 영국 최고의 왕을 만든 것이다. 언제나 인물은 광야에서 나온다. 광야는 하나님의 최고의 학교이다. 광야는 욕망을 죽이는 곳이다. 필요에 집중하게 만드는 곳이다. 겉멋을 죽이는 곳이다. 광야의 연단을 기뻐하라.


사랑의 빚진 자”(2.22.2008)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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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진 자”(2.22.2008)

  최근에 주목받는 CEO가 있다. KTF의 조서환 부사장이다. 젊은이들에게 그의 강연과 책을 소개했을 때,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다. 휴대전화 번호이동 서비스, 샴푸와 린스를 합친 하나로 삼푸, 20세의 치아를 80세까지 유지하라는 2080치약, 휴대전화 서비스 Show 등 여러 히트상품을 제조해 내었다. 그러나 그의 출발은 유복한 것은 아니었다. 23살 때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군에서 사고로 오른쪽 손을 잃었다. 왼손 하나로 온갖 역경을 딛고 대한민국 최고의 마케터가 되기까지 많은 역경 극복의 치열함이 있다.
  사고로 오른쪽 손을 잃었을 때, 뇌가 깡통 찌그러지듯 오그라드는 아픔을 느꼈다고 한다. 너무 심한 고통에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나니 육군 통합병원이었고, 엄격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픈 중에도 사귀고 있던 22살의 여자친구가 보고 싶었다.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망설이다 전화를 했더니 왔다. “당신 그래도 나를 사랑해”라고 묻고 싶었지만,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30분넘게 머뭇거리다가 물으니, 고개를 두 번 끄덕 거렸다. 그것이 힘이 되었다. 여자친구는 아예 병원 옆으로 이사를 와서 병간호를 해 주었다. 손은 잃었지만, 여자친구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오히려 행복감을 느꼈다. 그때 여자의 아버지가 나타나 딸을 끌고 가려고 했다. 저항하는 딸에게 아버지와 그 남자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그때 딸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아버지가 손을 잃었다면, 엄마가 어떤 태도를 보이기를 원하세요. 나는 이 남자의 전부를 사랑한 것이지, 손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조서환 부사장은 이때부터 평생 이 여자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살겠다는 결심을 한다. 사랑의 빚진 자가 된 것이다.
  사랑의 빚진 자가 되면, 어떤 수모도 이길 수 있다. 장애인이라고 취업도 쉽지 않았다. 낙심될 일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빚진 자는 물러서지 않는다. 종종 자존심이 상해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다. 자존심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이다. 사랑은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다. 선교 현장에 가보면, 이유없는 핍박이 많다. 정말 자존심 상한다. 그러나 사랑의 빚진 자이기에 기쁨으로 극복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랑이다.
  사랑의 빚진 자는 겸손하다.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찌 아내 앞에서 교만할 수 있겠는가? 모든 희생을 감수하고 자기에게 결혼해 준 것만해도 감사한 일이다.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 누구나 겸손해진다. 기고만장해서 사는 사람이 있다. 묻고 싶다. 사랑을 아는가? 사랑 받은 자는 자기를 부인한다. 기독교는 구호의 종교가 아니다. 뜨거운 사랑을 맛보고, 사랑의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헌신하자”가 아니라 “사랑을 체험하라”이다. 사랑받은 빚진 마음에서 헌신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최고의 마음은 ‘상한 심령’이다. 범죄 후 다윗은 자신의 상한 심령을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눈물이 있는 마음, 감사가 있는 마음이 최고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다는 큰 아들보다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탕자의 고백이 아버지의 마음에 더 와닿았다.(눅15:21) 금식하고 십일조한다는 바리새인의 자부심 어린 기도보다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세리의 기도를 더 기쁘시게 받으셨다. 사랑을 모르니 눈물이 없다. 눈물이 없으니, 날카로워지는 것이다. 사랑을 아는 자는 위대하다. 사랑은 장애를 넘고, 따뜻하게 만들며, 감사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사랑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아이디어”(2.14.2008)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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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하나님의 아이디어”(2.14.2008)

  루터는 친구와 같이 걷다가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경험을 했다. 나는 살고, 친구는 죽었다. 왜 하나님은 나를 살려 두셨을까?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것은 살려두셨기 때문이다. 살려두신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사명자는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로 살아간다.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남쪽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크게 돌아 동쪽에서 들어가도록 인도하셨다. 왜 이렇게 멀고 험한 길을 가게 하셨는가? 가나안 입장에서 보면, 허리를 치고 들어온 것이다. 허리가 잘린 것이다. 중간이 잘린 상태에서 남쪽을 정복하고, 북쪽을 정복하니 속수무책이었다. 기가 막힌 하나님의 아이디어였다. 마치 인천 상륙작전을 보는 듯하다. 맥아더 장군도 가나안 정복 작전에서 인사이트를 얻어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도 우회하는 것 같아 답답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실수가 없다. 빙빙 돈 것 같다. 이상한 곳으로 이끈 것같다. 그러나 사실은 최상의 경로, 최고의 아이디어인 것이다. 당장 직장의 길도 보이지 않는다. 결혼의 길도 보이지 않는다. 인생이 너무 우회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름길이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인생의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하다. 역전이 가능하다.
  이런 아이디어는 기도하면 주신다. 지혜가 부족하면 구하라고 하신다. 최근 두바이가 주목받고 있다. 100층 이상의 건물들이 들어선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높은 빌딩은 1시간마다 한번씩 GPS를 통해서 정확한 수직인지를 확인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실공사가 되기 때문이다. 5층 짜리 건물을 지으면서 GPS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100층 건물은 다르다.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기도없이도 살아간다. 그러나 비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결코 기도없이 살 수 없다. 하나님과의 교신없는 위대한 인생은 불가능하다. 인생의 100층 건물을 짓고 싶은가?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교신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문제가 커보이면 안된다. 문제에 눌리면 문제를 이길 수 없다. 문제가 작아 보일 때까지 기도하라. 기도와 비전으로 무장된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먹이다, 우리 밥이다”라고 외친다. 반면에 문제에 눌린 10명의 정탐군은 “우리는 메뚜기”라고 외친다. 문제는 문제 밖에서 오는 힘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다. 기도해야만 오는 자금이 있다. 기도해야만 오는 사람들이 있다. 기도해야만 오는 환경이 있다. 기도해야만 오는 아이디어가 있다. 이런 초특급 지혜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부르심은 성공 이상의 개념이다. 세상은 성공과 출세를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사명자는 성공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 출세의 자리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모든 능력, 모든 경험, 모든 노하우를 다 쏟아 부어서 사명을 이룬다. 에스더는 왕후의 자리가 끝이 아니었다. 그 자리를 사용해서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부르심은 성공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더 나가는 것이다.  대부분 어려우면 포기한다. 사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명자는 죽더라도 간다. 손해보더라도 간다. “어려운가 쉬운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를 묻는다. 생명은 굳이 격려할 필요가 없다. 그냥 놔두어도 생명은 생명된다. 어머니에게 아기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한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사명자에게 굳이 충성하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충성하지 말라고 해도 충성한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격려와 구호로 움직이지 않는다. 생명으로 움직인다.


“산소 마스크 이론”(1.31.2008)            

“산소 마스크 이론”(1.31.2008)

  비행기를 타면, 비상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알려준다. 산소 마스크가 떨어지면, 먼저 어른이 착용하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아이나 노약자에게 마스크로 착용하라고 한다. 노약자를 먼저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상식을 깨는 제안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성인이 먼저 건강해야, 약자를 제대로 돌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산소마스크 이론이다.  관계를 온전히 누리는 길은 친밀감이다. 친밀감을 이루는 사람은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이다. 열등감, 낮은 자존감은 친밀감으로 가지 못한다. 건강하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종종 예수님을 영웅화시키는 사람이 있다. 신앙의 위인들을 모두 영웅화시켜 버린다. 왜? 내가 싫기 때문이다. 자신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는 전혀 가까이할 수 없는 영웅만을 숭배하는 것이다. 영웅을 좋아하고, 자기 분야의 특출난 사람만을 지나치게 추종하는 사람치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영웅숭배의 이면은 자기 멸시이다.
  사람들이 즐겨보는 드라마가 병든 자아를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겨울새”를 보자. 1986년 소설로 처음 나오고, SBS에서 아침 드라마로, 지금은 MBC에서 드라마로 방영되고 있다. 주인공 영은은 현실적이지 않은 모든 고난을 다 당한다. 엄마의 병사, 아빠의 횡사, 약혼, 파혼, 결혼, 이혼으로 이어진다. 아마도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치고 이 중에 하나의 고난과 연결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주인공 영은의 불행과 자신의 불행을 동일시해 버린다. 자신의 불행의 이유는 환경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행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있는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홀로서기를 하라고 선동한다. 있는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이것은 유혹적인 메시지이다.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하는 뱀의 유혹과 같다. 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한다. 물론 눈은 밝아졌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렸다. 낙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우울함을 느낀다. 행복을 위해서는 기존의 틀을 깨야한다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듣는다. 이것이 유혹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강하다. 하나님의 렌즈로 보는 순간부터 높은 자존감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자신을 귀중하게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귀중하게 바라볼 수 있다. 깡패가 왜 무서운가? 병을 깨서 자기 팔을 긋는다.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소름이 끼치는 것이다. 자기 몸도 저렇게 함부로 다루는데, 남의 몸을 얼마나 하찮게 다룰까를 생각하니 무서운 것이다. 믿음은 자신의 가치를 드높인다. 그래서 상대를 인정하고 친말감의 단계까지 가게 만든다.
  자존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에서 꽃을 피우게 만든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다녔다. 일종의 자기의 은사, 자기의 사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되었다. 가치없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것이 되었다. 다시 뱀 꼬리를 잡았을 때, 지팡이가 되었다. 내 손에 사명의 지팡이를 쥐고 있을 때, 홍해도 가른다. 사명의 지팡이를 내던질 때, 뱀이 되어서 나를 공격한다. 마귀는 사람의 귀를 얇게 만든다. 드라마의 인물과 동일시되어서 자신을 비참하게 이끈다. 반면에 성경의 요셉같은 사람과 동일시 하는 사람은 믿음과 함깨 난관을 극복하고, 뜻을 이루는 인생을 산다. 나를 우울하게 만들고,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모든 매체로 부터 떠나라.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의 가치를 발견하게 만들고, 자신감을 심어주고,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게 만드는 말씀을 붙들라.



                                                    
“노예근성에서 벗어나라”(1.25.2008)
“노예근성에서 벗어나라”(1.25.2008)

  출애굽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는데에는 40년이 걸렸다. 왜? 해방은 순간이지만, 노예의식을 버리는데는 40년이 걸렸기 때문이다. 겉사람의 변화는 쉽다. 그러나 속사람의 변화, 의식의 변화는 오랜시간이 걸린다. 의식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진정한 변화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한다.(출22:28) 재판장을 존경하라. 처음 것을 드리라. 안식을 지키라. 그냥 단편적인 명령같다. 그러나 본질은 노예근성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이스라엘은 오랜 기간 노예 생활을 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았다. 의식 변화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첫째, 재판장을 존경하라. 노예의 특징은 항상 주인을 욕하는 것이다. 압제 당하는 사람은 뒤에서 주인 욕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이런 반복적인 행동은 정신을 짐승같이 만들어 놓는다. 끌려다니는 사람은 권위를 인정하는 것, 존중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좋은 가정 교육을 받은 사람은 질서존중과 예의를 안다. 반면에 제대로된 가정교육없이 자란 사람은 예의도 없고, 권위에 대한 존중도 없다. 하나님은 노예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존경하는 태도부터 가르친다. 우리는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일제와 독재를 경험했다. 당시에는 정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애국이었다. 경찰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것이 정의였다. 이제는 우리가 세운 권위가 있다. 관성의 힘은 무서운 것이다. 지금도 기존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애국이요 정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존경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권위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첫걸음이다.
  둘째,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노예의 특징은 자기 것이 없다. 항상 받는 것에 익숙하다. 드림이 없다. 주는 것이 없다. 그것이 노예의 삶이다. 하나님은 주는 것을 훈련시킴으로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셨다. 없는 사람은 한번 생기면 그 애착이 대단하다. 절대로 놓지 않는다. 그것이 거지 의식이다. 손에 쥔 것을 줄 줄 알 때, 진정한 자유민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한다. 무슨 뜻인가? 집착의 노예가 되지 말고, 풀어 놓을 줄 아는 자유민이 되라는 뜻이다. 제일 좋은 것은 드려도 된다. 우리는 둘째, 셋째 것을 가지고도 넉넉하게 살 수 있다. 그것이 은혜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요즘 청년들이 왜 힘이 없는가? 받기만 했기 때문이다. 많은 나이가 들도록 부모 밑에서 받아쓰기 때문에 그렇다. 과거에는 가난해서 부모의 공급을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어린 자식이 가정의 짐을 짊어져야 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강한 인물이 나온 것이다. 주는 순간부터 자유민이다. 노예로 살지 말고, 자유로운 백성으로 살라.
  셋째, 안식해야 한다. 안식의 목적은 무엇인가? 노예가 아니라는 뜻이다. 노예는 일에 매어 있다. 일하지 않으면 죽는다. 휴식이 없다. 억지로 일한다. 그러나 자유민은 쉴 줄 알고, 일할 줄 안다. 안식할 줄 모르는 사람은 중독이거나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내 힘으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식할 수 없다. 그러나 은혜로 산다는 사람은 안식이 가능하다.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진 것이다. 국가, 부모, 외모, 성격, 공동체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다. 지금의 좋은 상황도 내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저절로 된 것이 많다. 은혜로 살았다는 뜻이다. 안식은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는 사람이 사는 방식이다. 노예가 아닌 자유민의 삶이다. 맡기고 살라. 은혜를 구하면서 충실한 삶을 살라. 그것이 자유민의 삶이다.


                                                    
“전략적으로 살라”(1.18.2008)            

“전략적으로 살라”(1.18.2008)

  전략적으로 사는 사람은 버릴 줄 안다. 전략적인 삶은 선택과 집중의 원리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광야에 있는 에돔, 모압, 암몬을 건드리지 말고, 그냥 통과하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가나안이기 때문이다. 전략적인 사람은 사소한 것을 차지하는데 목숨 걸지 않는다. 예수님을 사역을 보라. 이 땅에 33년을 살았다. 그러나 공생애는 단 3년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16장 중에 마지막 일주일의 기록이 7장이다. 어찌보면, 예수님은 1주일을 위해서 사신 분이다. 좀더 확대하면 3년을 위해서 사신 분이다. 제자훈련과 십자가를 위해 사신 전략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실 수 있는 일을 다 하지 않았다. 큰 교회를 세울 수 있었지만 세우지 않았다. 대형집회를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학교를 세울 수 있었지만, 세우지 않았다. 버릴 것과 잡을 것을 명확히 구분하셨다. 전략없는 사람은 일을 닥치는대로 한다. 그러나 전략있는 사람은 일을 가려서 한다. 그 차이가 인생의 결과를 다르게 만들어 버린다.
  서툰 석공은 돌을 다룰 때 망치부터 든다고 한다. 노련한 석공은 돌의 결부터 본다. 돌의 결을 보고, 정을 대고 내리쳐야 단박에 돌을 쪼갤 수 있다. 망치들고 설치면 열심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열매는 없다. 분주하게 뛰는데, 결과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일의 결을 보는가? 시대의 결을 파악하고 있는가? 기도와 묵상은 결을 파악하는 시간이다.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정을 대고 한번 내리치면 갈리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무서운 전략적인 사람의 강력함이다.
  유혹은 무엇인가? 핵심 아닌 것에 매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윗의 위대성은 그가 이룬 많은 업적에도 있지만, 성전을 건축하지 않은 점에 있다. 다윗은 자신의 사명의 결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결에만 집중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어떤 일을 한 것 만큼이나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기 전에 큰 형 엘리압의 유혹을 만나게 된다. 엘리압은 다윗을 비난하면서 전쟁을 구경하러 나왔다고 놀린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 분노할 수 있지만, 다윗은 엘리압에게 반응하지 않는다. 다만 목표인 골리앗에게만 집중한다. 골리앗을 죽이니 엘리압은 사라진다. 다윗은 버릴 줄 알았기에, 얻을 수 있었다. 작은 것을 버리라. 작은 것에 손해보라. 바둑에서도 하수는 항상 아다리치고 따먹기 바쁘다. 결국 대마를 잡혀서 지고 만다. 소탐대실이다. 고수는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어서 승리하곤 한다. 중요한 것, 핵심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핵심에 집중하는 것이 전략이다.
  아파트 수위 아저씨가 한 말이다. “아침에 일찍 나가는 차는 대부분 비싸고 좋은 차입니다.” 나쁜 차일수록 늦게 나간다. 좋은 차는 일찍 나간다.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치고 게으른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하루를 잘 살기를 원하면, 새벽을 잡아야 한다. 새벽이 핵심이다. 새벽에 깨면, 기도하는 인생이 된다. 새벽에 깨면, 공부하는 인생이 된다. 새벽에 깨면, 주도권을 잡는 인생이 된다. 밤의 몽롱한 판단과 새벽의 명확한 판단은 비교할 수 없다. 새벽 하나를 붙잡으면 인생에 필요한 대부분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 그것이 핵심이요 결이다. 밤이 주는 다른 유익들을 버리고, 새벽에 집중해 보라. 삶 전체의 변화와 감당못할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인생은 선택과 집중으로 살아야 한다. 인생은 전략적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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