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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3

“하루의 중요성”(10.26.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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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중요성”(10.26.2007)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서 일하신다. 남은 자를 통해서 일한다는 말은 수를 의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깨끗하고 순수함이 진짜이다. 단순히 수가 많다고 정통일 수는 없다. 북한교회와 남한 교회가 있다. 지금은 남한교회가 수도 많고, 넉넉함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후 어느 교회가 정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순수하게 믿음 지킨 북한 교회가 존재한다면, 오히려 북한의 핍박을 통과한 지하교회가 정통일수도 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가 있다. 크기로만 정통을 논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순수하지만 작은 교회가 정통일 수도 있다. 소아시아 7교회 중에 빌리델피아, 서머나 교회는 작은 교회였지만, 생명이 있었다. 정통성는 그런 교회들에게 있었다.
  교육관 건축이 마무리 되고 있다. 별 관심이 없어 보이던 사람들이 헌물하겠다고 나온다. 복잡하고, 중복의 가능성이 있기에 건축 헌금을 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굳이 헌물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왜? 생색을 내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름을 날리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깨버리고, 드러내는 것이 개혁일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옳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보라. 석수장 이반 데니소비치는 10년 징역형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반에게 10년은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반은 “하루가 중요함”을 깨닫고, 하루를 잘 보낸다. 하루를 소중하게 보냄으로 10년의 감옥생활을 비인간화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다.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 희망을 가지면서 10년을 견디어 냈다. 그는 동료들에게 존엄성을 지키라고 외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간수 보는 앞에서 밥그릇을 핥는 모습을 보여주지 말라.” 콩알 하나라도 나누어 먹는 동료애를 발휘한다. 분위기가 바뀐다. 죄수들끼리 수갑 찬 손으로 모자를 벗겨준다. 작지만 의미있는 친절과 예의가 인간성을 되살려 주었다. 좋은 보직은 혼자 독식하지 않고 나누었다. 감옥 안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간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하루를 잘 살면, 평생을 잘 살 수 있다.
  많은 것을 잘하려고 하지 말라. 오늘 하루 잘 살면 된다. 웃으라. 친절을 베풀라. 용서하라. 예배하라. 헌신하라. 10년을 잘 살 수 있다. 평생을 잘 살 수 있다. 한순간이라도 진실되게 살면, 그것이 생명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진실된 삶을 살라.
  진정한 힘, 진정한 능력은 “복원력”에 있다. 낙심을 이기는 힘, 실망을 다스리는 능력이 진짜 힘이다.  1등만 하는 것이 아니다. 꼴찌를 해도 허탈감을 이기고,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능력이 힘이다. 범죄하고, 넘어진다. 그래도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옛날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려고 시도하는 능력이 진짜 힘이다. 입학하자 마자 캠퍼스 커플이 되는 멋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바람 맞고도 자살하지 않는 모습, 수없이 차이고도 다시 선보러 나가는 강인한 정신,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왜 그렇게 정신이 약해졌는가? 피하면 다냐? 도망치면 다냐? 다시 시작하라.  주여, 다시 일어나는 힘을 주옵소서. 남은 자는 생명에 집중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만이 아니라 “전병욱의 하루”, “아무개의 하루”도 중요하다.


“사랑은 아픈 것이다.”(10.12.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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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아픈 것이다.”(10.12.2007)

  사랑은 고통을 수반한다. 깊은 사랑은 기쁨과 동시에 고통도 같이 느끼는 것이다. 로마서8장 후반부에서 사도바울은 구원의 기쁨을 찬송한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외친다. 그런데 기뻐하던 사람이 갑자기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근심을 말하고, 고통을 말하고 있다. 왜? 사랑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감격한다. 자기 동족의 죽음을 보니, 암담하고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 신음한다.
  강한 빛에는 짙은 그림자가 있다. 큰 사랑에는 큰 그림자가 있다. 너무 사랑하면, 보고 있는 사이에도 슬픔이 깃든다. 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면 어떻게하나하는 슬픔이다.  대화 나누는 사이에도 슬픔이 있다. 이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못 나누면 어떻하나하는 아픔때문이다. 그게 사랑이다. 진짜 사랑에는 기쁨 속에 슬픔이 있다. 사랑하는 아이를 바라본다. 아프면 어떻하나?  내가 죽으면 불쌍해서 어떻하나? 보는 순간에 그런 느낌이 든다.
 어떤 여자가 한 남자를 진하게 사랑한다. 존재가 크다. 부재의 빈공간도 클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기쁨과 동시에 사랑의 아픔을 느낀다. 결국 사랑은 아픈 것이다. 아픈 것이 싫어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처이다. 상처때문에 사랑을 거부하는 병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아픔이 큰 것은 사랑이 큰 것이다.
  교회가 커졌다. 그러다 보니, 즐거운 일이 많다. 예배도 재미있고, 소그룹 모임도 재미있고, 율동도 재미있고, 행사도 재미있다. 즐거움과 기쁨만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교회는 사랑의 모임이 아닌가? 진정한 사랑 속에 어찌 기쁨만 있을 수 있는가? 진정한 사랑에는 슬픔도 알아야 한다. 예배의 기쁨은 알면서,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아픔이 전혀 없다. 지금도 이렇게 많은데, 또 전도해라는 태도를 갖는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 쾌락주의이다. 진짜 사랑이 없는 교회이다. “교회에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는 슬픔이 있다.” 슬픔을 모르는 대교회는 무너져야 한다. 그런 대교회는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 깨져야 한다. 가슴에 사랑이 터져나오지 않으면, 무너져야 한다. 기쁨만 있고, 아픔이 없다면,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사랑에는 유일성이 있다. 오직 너만이라는 생각이다. 어떤 여자가 A라는 남자와 아주 기쁘게 즐겼다. 좋은 관계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떠나가니까, B란 남자하고도 너무 잘 지낸다. 부재의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쾌락이다. 사랑은 대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사랑은 세련되지 않고, 촌스러워진다. 심지어 거칠어진다. 하숙집 아줌마와 어머니의 차이를 아는가? 어떤 청년이 밤 4시까지 컴퓨터로 게임을 한다. 이것을 본 어머니는 호통을 친다. ‘야 이 놈아 잠 안자고 뭐해. 중독에 빠졌구나. 몸 상하면 어떻게 해.’하면서 소리친다. 정말 촌스럽게 나간다. 교양과 세련됨이 없다. 왜 사랑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숙집 아줌마는 간섭하지 않는다. “학생 빨리 자지. 전기값 많이 나와” 이것이 하숙집 아줌마의 반응이다. 생명에는 관심이 없다. “하숙집 아줌마의 마음으로 리더하면 안된다.” 목자는 “엄마의 마음으로” 양육해야 한다. 지각은 작은 것 같지만, 큰 차이를 낳는다. 별것 아닌 것이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그래서 거칠게 몰아가는 것이다. 왜 사랑하기 때문이다. 거칠어도 좋다. 사랑으로 일하라. 아파도 좋다 사랑하면서 살자.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감사는 축복을 머무르게 한다.”(10.5.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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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축복을 머무르게 한다.”(10.5.2007)

  누구나 복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복있는 사람이란 복이 머무르는 사람이다. 받은 복을 빼앗기지 않는 사람이다. 스쳐 지나가는 복을 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멋진 남자가 많이 스쳐지나간 여자를 복있는 여자라고 하지 않는다. 상처 많은 여자라고 부른다.  많은 돈을 벌었다가 망한 사람을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돈이 머물러서 좋은데 사용할 수 있을 때 복이라고 말한다.
  어느 여자대학 교수님이 학생의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좋은 남자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재수가 좋아야 해. 운이 좋아야 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지 않는 사람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운이 좋다”는 말은 “은혜 받았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예쁜 옷 입고 나간다고 좋은 남자가 걸리거나, 화장 잘하고 나간다고 좋은 남자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운이 좋아야 한다.  그럼 운이 좋다, 은혜받았다는 말이 말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원인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 개국 신화가 있다. 한국에는 단군 신화가 있다. 로마에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로스 신화가 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신화가 없다. 민족의 시작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서 찾는다. 무슨 말인가? 모든 원인이 하나님께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 손으로 이루었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래서 성공의 이유를 내가 잘해서, 내가 공부해서,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선택을 잘해서라고 우긴다. 그러나 성경은 원인은 하나님께 있다고 선언하고,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은혜는 1차 복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좋은 교회를 만나고, 좋은 이성을 만나는 것은 은혜이다.

  그러나 1차복이 머무르는 것은  운, 재수, 은혜와는 차원이 다르다. 머무름에는 “실력”이 필요하다.  영적 실력, 정서적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 실력이 감사와 찬송이다.  왜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좋아하는가? 잘 놀라서, 반응을 잘하기 때문이다. 맛있는 것에 아 맛있어요. 이런 것 처음 먹어봐요, 혀가 놀랬어요라고 반응한다. 좋은 경치를 보면, 아 놀라와요, 바다 봐요, 물감을 풀어 놓은 듯해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좋은 남자가 머물러 있는 것이다.  머무름은 실력이다. 그 실력은 “감격과 놀람”에서 나온다. 감사와 찬송이 떠나지 않는 인생을 살라. 그러면 항상 좋은 것이 머무르고, 축복이 떠나지 않는 인생이 될 것이다.

“죄를 지으면 멍청해지는 이유”(9.28.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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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으면 멍청해지는 이유”(9.28.2007)

  도시마다 죄악이 더 많은 도시가 있다. 이상한 것은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나 지역을 가보면, 멍청해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역사에서도 이것을 증명해준다. 말씀과 경건의 세력이 강력할 때는 문화의 융성기가 왔다. 사람들이 똑똑해지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곤 했다. 그런데 죄로 인해서 오염된 영혼이 되었을 때는 문화도 몰락하고, 사회도 저급하게 되곤 하였다. 왜 그런가?

  성령은 생각을 자극하는 분이시다. 성령이 함께 하면 이성이 자극받는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게 되고. 똑똑해진다. 베드로는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이후 사람들이 그의 지혜에 대해서 놀랐다. 성령이 이성을 자극하고 생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 이성이 마비되고, 어리석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 생각하긱 싫어진다. 왜? 자꾸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고, 죄의식으로 인해서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지을 수록 깊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자꾸 생각나면 스스로 생각을 마비시키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한다. 죄와 술이 같이 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짓을 술도 안먹고 어떻게 해요?”  술없이 어찌 죄를 짓느냐는 말이다. 왜? 죄의식을 이기면서 죄를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국의 명문대를 나온 사람이 너무 나도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본다. 어떻게 저렇게 똑똑한 사람이 저런 어리석은 결정을 할까하고 의구심이 생긴다. 그런데 왜 그것이 가능한가?  죄 지을 당시에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을 마비시키고, 생각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한 이후에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회피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하나님은 그의 생각을 자극시키신다. 그리고 회개케 하신다. 이것이 복이다.

  왜 정결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래야 치열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자유로울만큼 깨끗한 인생을 살아야 지성과 영성의 발전이 있다. 죄는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반면에 회개는 우리의 진로를 더 빠르고 강력하게 만든다. 죄를 즐기면 바보된다.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라.


“만사를 좋게 보라.”(9.13.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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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를 좋게 보라.”(9.13.2007)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의 눈을 바꾸어 놓는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좋게 보기 시작한다. 성령은 적용의 영, 해석의 영이시다. 성령의 눈으로 보면, 좋지 않은 것이 없다. 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인생의 많은 자극이 있다. 고난, 환란, 원수의 공격, 극심한 시험 등이 있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좋아보인다. 고난이 악으로 보이지 않고, 뿌리를 강하게 만드는 자극으로 보인다. 나를 넘어 뜨리는 사람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연단해서 성공시키는 사람으로 보인다. 신앙이란 것은 바로 자동적으로 이런 성령의 시각을 갖는 것이다. 무조건 반사라는 것이 있다. 공이 날라오면 눈을 저절로 감고, 아픔이 있으면 저절로 손을 뗀다.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없이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무조건 반사가 우리를 보호해 준다.

  양쪽 귀에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의사를 찾아왔다. 얼굴은 멀쩡한데, 양쪽 귀만 화상을 입은 것이 이상했다. 그래서 의사가 물었다. “어떻게 양쪽 귀에 화상을 입었습니까?” 환자가 대답했다. “다림질을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착각해서 수화기 대신 다리미를 귀에 댔지요.” “그런데 또 한 쪽 귀는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전화가 또 왔거든요.”  이것은 지어낸 이야기이다. 인간은 이럴수 없다. 왜? 무조건 반사가 있어서 뜨거움이 있으면, 바로 떼게 되어 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동제어 시스템이 있는 것이다.

  성령과 동행하면, 성령이 자동적으로 만사를 좋게 해석하도록 이끄신다. 그것이 성도의 삶과 영성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긍정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 성령은 모든 힘으로 도우신다. 그래서 최종승리한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 중에 하나가 성도가 비관에 빠지는 것이다. 제대로 믿고, 제대로 성령과 동행하면, 결코 비관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언제 공부를 잘했는가? 선생님이 좋을 때였다. 신앙성장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좋아지고, 목사가 좋아질 때 성장한다. 성령은 주변을 좋아하도록 이끄신다.  삶이 언제 변화되었는가? 금식이 아니다. 고행이 아니다. 찾아오는 자극이 좋았을 때이다. 좋으면, 변화한다. 좋으면, 성장한다. 성령의 시각으로 바르게 해석하고, 모든 자극이 성장의 디딤이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란다.


“염려 기어를 기도 기어로 바꾸라”(9.7.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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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기어를 기도 기어로 바꾸라”(9.7.2007)

  많은 사람이 걱정하며 산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있듯이, “일용한 능력”이 있다. 그날 감당할 분량이 있다. 하나님은 하루하루 마주치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에 충분한 은혜와 힘을 주신다.  쓸데없이 그날의 분량을 넘는 것을 고민하며 살지 말라.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죽음의 사자가 어떤 마을에 들어가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오늘 이 마을에서 “100명의 목숨”을 가져가려 한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마을에 가서 죽음의 사자가 100명의 생명을 가져간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그날 실제로 1,000명이 죽었다. 그 다음날 죽음의 사자를 다시 만났다. 항의투로 말했다. “왜 100명이라더니, 1,000명이나 죽었냐?”  죽음의 사자가 말했다. “나는 100명을 데려갔는데, 걱정이란 놈이 900명을 데려간 것이다.” 걱정으로 죽는 사람이 항상 더 많다.
  언제나 얼굴에 근심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은사도 걱정이고, 특기도 걱정이고, 취미도 걱정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그래서 왜 그런가 물었다. “나 대신 걱정해 줄 사람을 고용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했다. “어떻게?” “신문 광고를 냈지. 나 대신  걱정해 주면, 하루에 100만원을 주겠다.” “어떻게 하루에 100만원이란 큰 돈을 줄 수 있냐?” “그건 그 사람이 걱정할 문제야.”
  어떤 할머니는 40년동안 자기가 암으로 죽게 될까봐 걱정했다. 항상 암검사받고, 암에 걸리지 않으려고 탄 것도 안 먹었다. 그러다가 폐렴으로 죽었다! 걱정은 쓸데없는 일이다. 성경은 걱정 대신 기도하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모든 일’이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 아니다. 크고, 작은 문제, 가정, 교회, 국가 문제, 육체의 문제, 영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 기어를 바꾸어야 한다. 염려의 기어를, 기도의 기어로 바꾸라. 운전할 때, 백기어 넣으면, 뒤로 간다. 드라이브 기어를 넣으면 앞으로 간다. 기어가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는가? 무조건 기도 기어를 넣으라. 그러면 이길 수 있다.
  걱정이 밀어닥칠 때, 감사하라. 항상 감사가 넘치게 하라.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 사람의 신앙의 절정은 감사이다. 빈 공간을 다 감사로 채우라. 감사의 사람이 되라. 예수님도 미리 감사하는 분이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요 6:11) 오병이어 기적은 미리 감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채워주실 것을 미리 감사하자. 한 사람의 미래는 원망이냐, 감사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0명의 정탐군과 여호수아 갈렙을 보라. 원망하면 죽는다. 감사하면, 가나안의 주인공이 된다.
  걱정 대신 기도와 감사로 채우면, 하나님이 마음을 지켜주신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지키시리라’는 군사용어이다. 요새를 지키듯이 지킨다는 뜻이다. 마음은 걱정이 일어나는 곳이다. 잘못된 감정, 잘못된 사고가 일어나는 곳이다. 하나님은 그 생각을 지켜주신다. 안되는 사람은 항상 안되는 생각을 한다. 되는 사람은 되는 생각을 한다. 기도와 감사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되는 생각을 심어 주신다. 그래서 되는 것이다. 마음에 문제가 있는가? 기도하고, 감사하라. 하나님이 되는 마음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다.

“절차를 무시하지 말라.”(8.31.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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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를 무시하지 말라.”(8.31.2007)

  절차 속에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다. 절차는 순서와 절대로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몸이 아파서 약을 먹을 때가 있었다. 의사가 하루에 3번 먹으라고 약을 주었다. 귀찮다는 생각에 한꺼번에 몰아서 먹었다. 그랬더니 병은 낫지 않고, 배만 아팠다. 나중에 물으니, 그렇게 먹으면 약효가 없다고 말했다. 아침약은 기능이 시작될 때, 점심약은 기능이 최고조일 때, 저녁 약은 먹고 쉴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절차를 무시하면 약도 효과가 없다. 의사를 만드는데도 절차가 필요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레지던트, 전문의의 절차를 밟아야 좋은 의사가 된다. 1년만에 속성으로 나오는 의사에게 몸을 맡길 사람은 없다. 목사도 속성은 안된다. 대학교 4년, 신학대학원 3년, 강도사, 목사 고시 2년으로 9년은 공부해야 목사가 된다. 그런데 이 절차를 무시하고 1-2년안에 목사가 되는 사람이 있다. 절차를 무시한 이런 사람을 제대로된 목사라고 인정하기 힘들다.
  최근에 허위학력으로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비인가대학이란 아예 신고도 되지 않은 유령대학이다. 물론 가짜대학이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신고만 하면 대학 허가가 나오는 곳이 많다. 그래서 비인증대학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공인 기관에서 학교의 수준을 인정받는 곳을 말한다. 비인증대학이란 허가된 대학이지만, 그 수준은 인정받을 수 없는 대학을 말한다. 통상 이런 대학까지 가짜 대학, 가짜 학위라고 말한다. 절차를 무시하고 속성으로 학위를 주는 학위 공장들이다. 미국 박사학위 신고자 4천199명(324개 대학) 가운데 5.6%인 237명이 비인증 대학에서 학위를 딴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아마도 이런 가짜 학위 중에 신학교가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목회를 하면서 몇번 가지도 않은 학교에서 멀쩡히 학위를 받는 것이다. 사회 통념상 모두 가짜 학위인 것이다. 절차를 무시하면 가짜되는 것이다.
  기하학의 대가 유클리드(Euclid)가 있다.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수학과 교수이자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수학학교의 설립자이다. 한번은 이집트의 왕인 톨레미가 유클리드에게 기하학을 터득하기 위한 지름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유클리드는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고 대답했다. 절차를 무시한 깨달음은 없다는 유명한 말이다. 쉽게 가는 길은 없다.
  삼일교회는 새신자 교육 5주를 받아야 정식 교인이 된다. 괜히 늦추다가 낭패에 빠지는 사람이 많다. 일단 장로, 집사, 권사 투표에 입후보할 수 없다. 선교를 떠날 때, 등록도 할 수 없다. 나중에 5년이상 다닌 후에 등록하려면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도 생긴다. 절차를 무시하면,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조기 교육 열풍이 분다. 어린 아이를 외국으로 유학 보낸다. 교회 안에도 조기 유학 출신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오직 외국어 하나만 잘한다. 기본적으로 국어도 모르고, 국사도 모른다. 15세기 표기법으로 글을 쓰고, 상식적인 내용도 잘 모른다. 사춘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산 사람은 외상후 스트레스 현상(트라우마)에 빠진다. 뭔가 정서적인 결함들이 있다. 회사에 취직해서도 리더로는 쓰임받지 못하고, 스탭으로만 쓰임받는다. 왜? 외국어만 잘하는 기계일 뿐, 종합적인 인성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한 자식을 스스로 망치는 일이다. 절차가 중요하다. 열외 인생이 되지 말라. 뭐든지 착실하게 절차를 밟을 때, 풍성한 열매맺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은사의 원리”(8.24.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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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의 원리”(8.24.2007)

  사람들은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있다. 은사의 내용도 다양하다. 은사의 분량도 다양하다. 쉽게 정의하면 은사란 무엇인가? “잘하고, 좋아하고, 옪은 것”이 은사이다.

  첫째, 옳아야 한다. 옳다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진리이다. 옳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목표가 틀리면 아무리 열심을 낸다고 해도 틀린 것이다. 죄라는 단어에는 ‘과녁을 벗어났다’라는 의미가 있다. 과녁이 틀리면 정확하면 정확할수록 틀린 것이다. 목표가 틀리면 정확함과 열심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바른 목표를 가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잘한다. 도둑질을 좋아한다. 그런데 도둑질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은사가 될 수 없다. 도박을 잘하고, 도박을 좋아하나 옳은 것이 아니다.그래서 도박은 은사일 수 없다. 삶과 말씀이 충돌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말씀과 충돌이 일어나면 괴롭다. 일종의 성령의 인도하심이다. 삶을 회개하고 변화시키야 한다. 이것이 옳은곳으로 이끄는 인도하심이다.

  둘째, 잘해야한다.  잘하는 것이 은사이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개념이다. 노래를 잘하면, 노래의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미술을 잘하면 미술에 은사가 있다고 말한다. 은사는 같은 일을 해도 월등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박태환 선수는 수영의 천재이다. 같은 노력을 해도 결과는 월등하다. 힘든 노력의 결과 2007년 일본 국제 수영대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은사가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벽부터 열심히 뛰어도 은사 없는 분야에서 뛰면 열매가 없다. 달란트 비유에서도 보면, 남긴 것을 강조한다. 남긴 것이 있다는 말은 잘한다는 말이다. 열심이 좋은 점은 여러가지 시도를 하다보면, 잘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잘하는 것을 발견하고, 잘하는 것을 하라. 남긴 것이 나올 것이다.

  셋째, 좋아하는 것을 하라. 좋아하는 것을 할 때의 장점은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일을 많이하는데도 잘 지치지 않는다. 타고난 체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면 지치지 않는다. 몸도 잘 망가지지 않는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은 좋아하는 것을 마음에 심으시고, 그것으로 살기를 원하신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 분야의 대가들은 대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나타난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간다. 은사 아닌 것에 매달려 낭비하지 말라. 자기에게 맞는 은사를 발견하고, 은사대로 살라. 인생이 쉬워지고, 열매는 더 많아질 것이다.

“편작의 수준에 머무르지 말라.”(8.16.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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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작의 수준에 머무르지 말라.”(8.16.2007)

  중국에서는 천하의 명의로 편작을 꼽는다.  천하의 명의였던 편작에게서는 의사인 형이 두 명 있었다고 전한다. 위(魏)나라 왕이 편작에게 물었다. “삼 형제 중에 누가 가장 실력이 좋은가?”  편작은 맏형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며 둘째 형님이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위나라 왕은 의아해하면서 편작이 명의로 소문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편작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맏형은 증상을 느끼기도 전에 얼굴만 보고 앞으로 병이 나타날 것을 압니다. 병이 생기기 전에 미리 치료해 주지요. 그러다 보니 아무리 잘 해 주어도 형이 낫게 해 준 줄 모릅니다. 둘째형은 병세가 미약할 때 병을 알아내어 치료해 줍니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은 둘째형이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위나라 왕은 더욱 궁금해 편작이 유명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저는 병이 커져서 심한 고통을 느낄 때 비로소 알아봅니다. 중한 병이기에 맥을 짚어야 했고, 또 처방하고 아픈 곳을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곤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믿고 존경합니다. 이것이 삼형제 중 가장 실력이 모자라는 제가 명의로 소문난 이유입니다”
  인간의 심리를 잘 묘사하는 이야기이다. 병주고 약주는 존재를 제일 의존하고 존경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사전에 은혜로 건강을 주시면, 그 은혜를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을 병에 걸렸다가 살려주어야 비로소 감사가 나온다. 지혜는 사전 경고와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것이다. 작은 사인을 주실 때, 헌신하는 것이다. 제일 어리석은 것은 온통 얻어 맞고 난 다음에 깨닫는 것이다. 누구나 깨닫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경고 사인에 깨닫고, 어리석은 사람은 망한 이후에 깨닫는다.
  나이가 들면서 직언하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성숙해졌다느니, 부드러워졌다느니라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오히려 변질되고 타협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괴롭다. 직언이 없으면, 대개 넘어져서 찾아 온다. 그때 친절하게 이야기해주고, 기도해 주면 무척 고마워한다. 반응은 좋은데 양심은 괴롭다. 듣기 싫은 소리지만, 상대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말하는 것이 참된 목자이다.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삯군의 모습이다. 변질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듯이, 나도 이런 지혜를 구하고 싶다. 듣기 싫은 직언을 기분 좋게 전달하게 하옵소서. 모든 성도들이 욕심낼만한 귀중한 은사이리라!


“바보 설득”(8.9.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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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설득”(8.9.2007)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은 바보를 설득하는 것이다. 바보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 욕심 때문이다.
  어떤 성도가 있었다. 정직한 마음으로 설렁탕을 끓여서 팔았다. 뭐든지 최고급 재료를 썼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는 태도로 장사했다. 하루는 뼈를 끓이는데 하얀 국물이 나오지 않고 검은 국물이 나왔다. 나쁜 품질의 뼈가 들어온 것이다. 도저히 장사를 할 수 없었다. 뼈를 판 사람에게 연락했더니, 사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딴집 갈게 잘못 갔네요. 오늘만 커피 프림 타시지요.” 아마도 커피 프림을 타면 검은 국물이 하얀 국물로 변화가 되는가보다. 재료를 다 버리고, 이렇게 정문에 붙였다. “오늘은 재료가 나빠서 장사하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욕심을 이긴 지혜이다. 바보는 절대로 이것을 못한다. 눈 앞에 이익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 토끼를 키운다. 종종 토끼에게 먹을 것을 주러간다. 그런데 나를 무서워한다. 어리석게도 자기를 도우러 가는데 도망친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러 오시는데 나는 도망친다. 욕심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사는 것 같지만, 내게 손해되는 행동이다. 강아지를 사람들이 좋아한다. 왜? 그를 사랑해주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단지 기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다.  바보는 기뻐하지도 못하고, 감사하지도 못한다. 심지어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바보는 단지 두려움 속에서만 살아간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바보는 선의를 가지고 남을 돕지도 못한다. 도우려면 내 입장을 버리고 상대의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친절도 전달된다. 얼굴 밑에 화상을 입은 자매가 있었다. 아픔과 낙담으로 괴로워할 때, 어떤 성도가 위로해 주려고 했다. 담당 목사에게 “지선아 사랑해”를 사주고 싶다고 말했다. 목사는 자기가 쓴 “자신감”을 추천했다. 속으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자기가 쓴 책을 추천할 수 있는가하며 분노했다. 서점에 갔더니, ‘지선아 사랑해’는 잘 팔려서 품절이 되었고, 그 목사의 책은 쌓여 있었다. 기분 나쁘지만 할 수 없이 그 목사의 책을 샀다. 화상으로 고통 당하는 자매에게 포장된 책 선물을 주었다. “혹시 지선아 사랑해 아니죠?” 뜨뜸했다. 사려던 책이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이 책은 자신감이야” “감사해요. 나는 또 그책 인줄 알았어요. 그 책은 이미 16권이나 받았어요.” 자기 욕심, 자기 입장에서의 선물은 오히려 짐이 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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