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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4

“승부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

  힘은 이기는 것만이 아니다. 승리주의, 결과주의가 아니다. 실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 휴가를 갔었다. 막내 아이와 달리기를 했다. 내가 이겼겠는가, 졌겠는가? 내가 간발의 차리로 졌다. 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이와 뛰어서 충분히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져주었다. 그래야 아이에게 의욕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5판을 했으면, 아마도 3대 2 정도로 져 주었을 것이다. 그래야 제일 재미있고, 흥분되기 때문이다. 힘은 무엇인가?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기고 싶을 때 이기고, 지고 싶을 때 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승부를 조절할 수 있는 것이 힘이다.

  얼마전에 박지성이 소속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한국에 왔다. 수준 높은 팀이었다. 서울 FC가 4:0으로 졌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경기를 보았다. 처음 3골을 넣을때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뛰는 것 같았다.  그 이후에는 골을 더 넣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볼을 돌리는 식의 유치한 방식으로 시간끌기를 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는 것같이 보였으나 더 이상 골을 넣으려고 하지 않았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선수가 4번째 골을 넣었을 때, 선수들이 축하해 주기보다는 핀잔을 주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때 힘을 느꼈다. 저것이 진짜 힘이구나. 저게 실력이구나. 이를 악물고 이기려고만 하는 것은 천박함이다. 진짜 힘은 질 줄 아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 가운데 자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왜? 복권 당첨으로 인해서 자기의 수준은 높아졌으나 동료의 수준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값싼 식당에서 먹던 사람이 호텔에서 식사하게 된다. 이제까지 자신과 교제하고, 교류하고 즐기던 공동체와 단절하게 된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깊은 고독감에 빠지게 된다. 제자의 삶이 왜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다. 제자의 삶은 아무리 많은 돈이 생겨도 자기 분수를 지킬 줄 안다. 100억이 생겨도 1억 수준의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주변의 관계가 전혀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중에 남은 99억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된다. 이 섬김을 통해서 주변이 오히려 유익을 얻고 풍성해진다. 나의 축복이 주변의 넉넉함으로 변화된다. 사람들이 몰려든다. 나중에는 이 사람을 복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축복이 사람을 썩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썩지 않는다. 힘을 갖추었으나 져줄 줄 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힘은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힘으로 인해서 썩지 않는 성숙함의 열매를 맛보자.

                                                    

        

“믿어주는 능력”

  시 에스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못생긴 남자가 있었다. 눈 작고, 머리카락 없는 못 생긴 사람이었다. 고심 끝에 잘 생긴 사람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다녔다. 가면 쓴 생활을 10년 넘게 했다. 나중에 가면을 쓰지 않았는데도 남자의 얼굴이 그 가면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가면에 눌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위장이 현실이 된 것이다. 시 에스 루이스는 이것을 복음의 본질과 연결시킨다. 복음은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간주해 주는 것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데 친한 척하면 진짜 친해진다. 기쁘지 않은데 기쁜척 하면 정말 기뻐진다. 윌리엄 제이스는 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그렇다고 생각하고 가장하면 현실이 되곤한다.
  1살이 되지 않는 갓난아기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런데 아기를 키우는 엄마는 아기가 마치 알아듣는 것처럼 말한다. ‘젖 많이 먹었니???배불러???기분 좋아??못 알아들어도 알아듣는 것같이 계속 말해 줄때, 비로소 아이가 말을 배우는 것이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몰라도 알아듣는 것처럼 능청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이 언어를 금방 배운다. 자기 나라 사람끼리 외국어를 배우면 쉽게 배우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내국인끼리는 서로의 수준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수준에 맞게 말한다. 그래서 성장이 없다. 반면에 원어민은 상대의 수준을 잘 모르기 때문에 유창하게 원어를 쏟아 붓는다. 들리지 않는 말이지만, 마치 듣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들리는 것이다. 가장해야 현실이 된다.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성도들이 모든 것을 다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모든 것을 다 알아듣는 듯이 힘차게 설교하면, 나중에는 깨닫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가장하면 현실이 된다.
  일상에서 키우는 동물중에 개가 가장 똑똑하다. 신문을 가져오기도 하고, 공을 잡기도 하고, 대소변도 가리는 개가 많다. 왜 개가 이렇게 똑똑할까? 개를 사람 취급해 줘서 그렇다. 개를 좋아하는 집에서는 개에게 옷을 입힌다. 어떤 집에서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자기 한 입 먹고, 개 한 입 주는 것도 보았다. 개를 사람취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가 자기 정체성 혼돈이 빠지는 것이다. 자기가 개인지, 사람인지 구분을 못한다. 가장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종종 사람을 개취급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사람도 개같이 덤비거나, 물거나, 공격한다.
  믿음이란 인식의 변화이다. 복음은 정죄, 비판이 아니다. 복음의 시각은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복음은  믿어주는 능력, 기대하는 능력, 인정하는 능력이다. 부족하더라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믿어줘라. 믿는대로, 인정한 대로 변화된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지혜의 바른 사용”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명의 선생님이 10명 정도의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다.  공과공부를 마친 후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공평하게 똑같은 선물을 주곤한다. 그런데 미국 교회는 개성을 강조해서 그런지 10명 모두에게 다른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선물을 받고 만족한 아이도 있고, 만족하지 못한 아이도 있었다. 그 중 똑똑해 보이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옆에 조금 우둔해 보이는 아이가 받은 선물이 탐이 났다.  똑똑해 보이는 아이가 제안했다. “우리 게임하자. 이긴 사람이 선물을 고르기로 하자.” 놀아준다는 말에 우둔해 보이는 아이가 동의했다. 원래 게임의 주도권은 하자고 하는 아이에게 있기 마련이다. 자기가 잘하는 게임을 하지 못하는 게임을 할 리가 없다. 조금 지나 보니, 똑똑해 보이는 아이는 원하는 선물을 들고 만족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면에 우둔해 보이는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낙심해 있었다. 우리도 능력을 이렇게 쓰지 않는가?  내가 지닌 지혜와 능력으로 꼭 갖고 싶은 것을 손에 쥐고야 만다. 스스로 기고만장해서 내 지혜와 능력으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자부심을 갖는다.
  그 옆에 또 한그룹의 모임이 있었다. 선생님이 공과공부를 마치고 10명의 아이들에게 서로 다른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여기서도 역시 선물에 만족하는 아이와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지혜롭게 생긴 어떤 아이의 선물을 옆의 친구가 자꾸 갖고 싶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친구의 선물을 만지작 거리고,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지혜롭게 생긴 아이는 그냥 친구에게 갖고 싶은  선물을 줘 버리면 친구의 자존심이 상할 것으로 생각했는가 보다. 그래서 게임을 제안했다. “우리 게임하자.” 물론 그 게임에서 져 주었다. 조금 지나고 나니, 지혜롭게 생긴 아이의 친구는 원하는 선물을 들고 만족한 모습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친구의 기쁨을 바라보며 흐뭇해 하는 지혜로운 아이가 있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것이다. 양보하고 얻은 기쁨, 이것이 진짜 기쁨이다. 희생하고 얻은 만족, 이것이 진짜 만족이다.
  두명 다 지혜로운 아이, 명석한 아이이다. 그런데 한명은 그 명석한 머리를 이용해서 남의것을 빼앗고, 자기의 만족을 누리는 인생을 살았다. 반면에 한 명은 지혜로운 머리를 사용해서 친구의 기쁨을 채워주고, 섬기는 기쁨을 누리며 산다. 이 두 영혼 중에 어느 영혼이 위대한가? 누가 더 강한 자인가? 성경이 말하는 인재는 지혜와 능력을 사용해서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일어나고, 세워지고, 기뻐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지혜로 섬기라.

         
                                          
 

                                                                            

“사자도 뛰고, 가젤도 뛰어야 산다.” 

  일전에 동물의 왕국을 보았다. 사슴같이 생긴 아프리카 가젤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젤은 약한 동물이다. 그래서 깨어나자 마자 달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눈뜨지 마자 달려야만 하는 약한 동물의 슬픈 운명을 보는 듯했다. 그런데 해설자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약한 가젤 뿐만 아니라 가젤을 사냥하는 사자도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뛰지 않으면 가젤 사냥은 불가능하다. 가젤은 생명 걸고 뛰기 때문에 사자에게 쉽게 잡히지 않는다. 사냥에 계속 실패하면 굶어서 쓰러진 사자가 나온다고 한다. 약해진 사자는 종종 하이에나의 공격을 받아서 먹이감이 되곤한다. 마지막 결론은 이랬다. 사자가 되었든 가젤이 되었든 열심히 뛰어야 한다. 뛰지 않는 자는 죽는다. 사자는 굶어 죽고, 가젤은 잡혀서 죽는다.
  최근 들어서 열심히 뛰자는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열심히 뛰는 것이 범죄인양 말하는 경우도 있다. 사자가 되었든 가젤이 되었든 열심히 뛰어야 한다. 교회나 성도를 크기로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충분히 커져 있으니까, 열심 내지 말아도 충분하다는 접근도 있다. 안주하다가 커다란 덩치들이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사자의 죽음인 것이다. 내적 근육을 기르고, 속도를 기르고, 날렵합을 유지 하지 못하면, 덩치만 큰 공룡의 마지막을 맞이 하게 된다. 사자도 뛰어야 산다.
  작은 것은 도움이 없거나, 환경 때문에 성장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당부분 근거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생존을 위해서는 핑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력이다. 가젤은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약하니까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 삼일교회 초창기에는 100명도 안되는 성도였다. 조금 양육하면 떠나가고, 아이들이 있으면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떠나갔다. 가젤의 심정이었다. 그때에 살아남는 길은 더 많은 헌신과 더 많은 은혜, 더 많은 기도 외에는 없었다. 가젤의 절박함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했다. 만약 그 때 더 뛰지 않았으면 죽었다. 가젤의 죽음인 것이다.
  늑대가 사냥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가을이라고 한다. 먹이감들이 가장 살이 많이 쪄서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먹을 것이 많은 여름을 지났다. 많이 먹고 살이 찐 것은 일종의 축복이다. 그런데 그 축복이 오히려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애가 될 수 있다. 축복이 독이 되지 않도록 안주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속도가 줄어드는 것을 최악의 상황으로 인식해야 한다. 최적의 속도는 적당히 먹고 일하는 것이다. 축복을 사명으로 여기고 나누고 섬기는 것이다. 사자도 뛰고, 가젤도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래야 산다.

“배려하는 마음”(7.5.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8.04.2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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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하는 마음”(7.5.2007)

  고난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든다. 내 코가 석자라는 생각때문에 내 문제에만 매몰되곤 한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 중에도 자기 중심적이지 않았다.  소통하는 삶, 관계를 맺는 삶을 살았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는지라”(창40:6) 요셉은 감옥 안에서도 동료들의 얼굴빛을 살폈다. 그리고 고난 중에도 그들을 도왔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말한다. 진짜 믿음은 옆사람의 표정도 살필 줄 아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살피는 자가 되라. 돕는 자가 되라. 그것이 리더이다.
  나는 피난민의 아들이다. 그래서 전쟁의 참상을 여러 차례 들었다. 전쟁이 왜 무서운가? 인간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 굶는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살펴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데 전쟁의 절박함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버려두고 떠나야 할 때가 많다. 이같은 매정한 행동을 몇 번 반복하게 되면, 별 가책도 없이 덤덤해 진다. 타인의 필요을 저버리는 사이에 인간성은 파괴되어 가게 된다. 외할아버지는 남한에 정착 이후 의도적으로 자녀들에게 베푸는 삶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구제하고, 희생하는 자리로 자녀들을 이끌었다. 왜? 그래야 인간성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야 피가 흐르는 사람,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배려하는 삶은 인간성을 회복시킨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인간성이 깨지지 않았다. 왜? 어려움 당한 이웃을 돌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파괴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의 메마른 마음이다.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 아이의 부모의 가정교육이 부럽다. 기독교 명문 가정의 자녀교육이 어떠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이 아이는 무척 용의주도한 아이이다. 생각없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이 아니다. 광야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면 먹을 것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도시락을 준비했다. 예상대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남들은 먹지 못해서 괴로워할 때, 보란 듯이 준비된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아이였다. 아이는 자신의 도시락을 예수님께 가져온다. 오병이어는 기적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한 아이의 배려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한 메시지이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의 배려하는 마음에 축복해주신 것이다.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따뜻한 인간미는 살아난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인재의 조건이 아니다.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자녀로 키우는 것이 바른 교육이다. 언제나 주변을 살피는 인물로 키워야 한다. 요셉의 배려하는 마음이 결국 자기 자신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난 중의 배려는 자기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상업주의 신에게 굴복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 없는 강한 바알의 매력은 무엇인가? 바알은 물질신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풍요를 가져다 준다는 농경신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상업주의 신, 또는 시장 신(market god)이다.
  중국의 보물전에 갔었다. 특히 토기로 만든 당나라 여인상이 눈에 들어왔다. 당나라 시절의 미인은 매우 뚱뚱하고, 얼굴도 크고, 배도 약간 나온 모습이었다. 양귀비가 뚱뚱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옆의 바비 인형같이 마른 여자들은 시녀들이었다. 왜 지금은 날씬해야 미인인가? 누가 그것이 미인이라고 말했는가? 상업주의 신 때문이다. 날씬하고, 키 큰  바비인형같은 모델이 미인이라고 열심히 상업주의 신이 외치고 다녔기 때문이다.
  뉴저지에 갔었다. 다국적 제약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을 만났다. 신약 개발에 투입되는 자금 규모에 놀랐다. 작은 회사는 상상도 못한 규모였다. 이 회사들의 목표는 이익이다. 이익을 제대로 내지 못하면 도산한다. 제약회사는 자연히 돈이 되는 약을 만들게 되어 있다. 인간의 복지와 건강한 삶을 추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에이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 천연두 백신같이 원천적으로 병에 걸리지 않게 만드는 예방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백신을 만들면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회사들은 치료제를 만든다. 그래야 죽어가는 병자가 많은 돈을 써가면서 약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워런 버핏을 비롯한 몇 몇 독지가들이 에이즈 치료제가 아닌 에이즈 백신 연구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업주의 신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도전이다.
  상업주의 신에게 몸을 내맡기면 목마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순간의 만족을 위해서 영원한 만족을 포기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시작된다. 미국에는 지하철이 많이 없다. 자동차 회사와 정유회사의 로비때문이라고 들었다. 면도날이 1개인 면도기는 1달 정도 사용할 수 있었다. 면도날이 2개 되고는 보름, 3날 면도기는 10일도 사용하기 힘들다. 기술적으로는 얼마든지 1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면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회사는 망한다. 상업주의 신은 이익을 추구하지, 복지를 추구하지 않는다. 독일의 어떤 미싱회사는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서 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와 성도는 돈으로도 얼마든지 일할 수 있다. 이익을 위한 투자가 아닌 복지를 위한 투자를 해보자.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자. 성직은 목사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연구실에서 에이즈 백신을 만드는 것도 일종의 성직임에 틀림없다.



                                                    

“암소 8마리”

  스티븐 코비의 오늘 내 인생 최고의 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남태평양의 키니와타 섬에 자니 링고라는 사람이 있었다. 주변에서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약간의 비웃음을 사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니 링고는 최근에 결혼을 했는데, 장인에게 암소 8마리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 섬에서는 결혼을 할 때, 남자가 여자의 아버지에게 암소로 대가를 치르는 풍습이 있다. 보통 예쁘게 생긴 여자라면 암소 4마리 정도를 준다. 그리고 조금 매력이 떨어지면 암소 3마리를 준다. 물론 기도없이는 살 수 없는 힘든 여자라면 암소 1마리를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자니 링고의 아내 사리타는 그리 예쁜 여자가 아니었다. 태평양에서는 주로 뚱뚱한 여자가 인기있는데, 사리타는 마른데다 어깨가 구부정한 빈약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암소 8마리를 주었으니 주변의 비웃음을 살만했다.
  선교사가 자니 링고의 집을 방문했다. 선교사는 자니 링고의 아내 사리타를 보는 순간 놀랐다. 소문과는 달리 너무 나도 아름다운 모습의 여인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턱이 아름다왔고, 빛나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당당한 걸음의 멋진 여인이었다. 선교사는 자니 링고에게 물었다. “아내의 모습이 왜 소문과 이토록 다르죠?” 자니 링고는 말했다. “결혼 전에 여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한 여자가 나는 암소 4마리에 시집왔다고 말하면, 다른 여자는 자기는 암소 5마리에 시집왔다고 자랑합니다. 암소 1마리에 시집온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습니다. 나는 아내 사리타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부심을 가지라고 암소 8마리를 주고 결혼한 것입니다.” 
 자니 링고는 암소 8마리의 가치를 지닌 아내를 원했다. 그래서 장인에게 암소 8마리를 준 것이다. 그랬더니 부족해 보이던 아내 사리타가 암소 8마리에 걸맞는 멋진 여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다르게 행동한다. 특히 자기를 가치있게 여기고, 기대하는 환경에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암소 4마리쯤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를 암소 2마리 정도의 수준으로 대해 주면 분노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상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준다. 암소 4마리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암소 6마리의 존재로 대우해 주면 그는 감격한다. 그리고 그 기대와 평가에 걸맞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다. 가치있게 봐주는 눈, 넉넉하게 평가해주는 따뜻한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스스로 잘난 것으로 착각하는 시대에 되새겨볼 이야기이다.


완벽을 기대하지 말라”(6.14.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7.07.0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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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을 기대하지 말라”(6.14.2007)

  성경은 노아에 대해서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창6:9)고 묘사한다. 이 말은 노아가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죄악이 넘치는 시대에 살았지만, 순간 순간 믿음의 반응을 보였다는 말이다. 노아는 아직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홍수에 관한 경고를 듣는다. 당장 벌어질 일도 아니고 120년 이후에 벌어질 일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산에 올라가 도끼를 들고 나무를 내리찍는다. 말씀에 대한 이런 작은 반응이 믿음이다.
  삶은 하루 아침에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작은 자극이 있을 때, 그 자극에 반응하면서 조금씩 변화되는 것이다.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고, 변화와 성장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싸우면 오래간다. 어린 시절 다니던 교회는 20년 넘게 싸웠다. 교회 문제를 가지고 대법원까지 올라간 대단한 교회였다. 반면에 술꾼들은 싸우다가도 술자리에서 술 한잔 마시고는 풀어지곤 한다. 왜 그런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기대 수준이 너무 높다. 거의 예수님 정도의 도덕성을 기대한다. 그러니 항상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술집에서는 서로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없다. 서로가 죄인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웬만큼 잘하면, 그 잘하는 것을 보고 용서하고 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잘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실망스런 한 부분을 보면, 그 상처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신자가 저럴 수 있나?"라고 되새기며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결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장의 과정에 있을 뿐이다. 기대를 낮추고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휴스턴에 있는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교회에 상당한 지위를 지닌 어떤 성도의 변화 이야기였다. 한번은 목사님이 실물 설교를 했다. 예쁜 장미 한 송이를 들고 강단에 올라갔다. 이 장미꽃 예쁘죠라고 말했다. 잠시후 잎을 하나씩 하나씩 뜯어 냈다. 화사하게 웃던 모습의 성도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하나씩 뜯겨나간 장미는 나중에 볼성 사나운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인생에도 꽃과 같이 예쁜 전성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잎이 떨어진 추한 모습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원하십니까? 전성기는 멋대로 살다가 힘을 다 잃고 난 다음에 잎이 다 떨어진 모습으로 부끄럽게 나오시겠습니까? 이 도전에 충격을 받고 변화되었다고 한다. 장미라는 복음성가가 있다. “나의 모습이 가장 싱그러운 그때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삶 전체를 드린다는 거창한 구호만 외치지 말자. 깨달음이 있으면 그 시점에서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이 헌신의 삶이다.


사냥감처럼 생각하라.”(6.7.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7.07.03.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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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감처럼 생각하라.”(6.7.2007)

  사고로 인해서 퇴직한 형제가 전망 있는 직업을 찾고 있었다. 21세기는 레저의 시대니까 자전거 정비를 배우라고 했다. 장차 자전거 판매상을 염두에 둔 조언이었다. 좋은 자전거 상인의 조건을 물었다. “일단 자전거를 많이 타 보라.”고 말했다. 자전거를 팔려면 실제로 많이 타봐야 한다. 그래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욕구, 필요, 불편, 바라는 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냥을 잘하려면, 사냥감처럼 생각해야 한다.
  좋은 사냥꾼이 되기 위해서는 사냥군 의식만으로 부족하다. 사냥감 의식이 필요하다. 과거 사냥하던 시대의 그림을 보라. 사냥감의 가죽을 쓰고 무리 가운데서 춤추는 그림이 있다. 왜 그런가? 사냥을 잘하려면, 동물처럼 행동하고, 동물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호주 원주민들은 브롤가라는 새를 잡아서 산다. 그들은 새처럼 날개를 펴는 동작의 춤을 춘다. 새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이다. 낚시 전문가 강태공의 말이다. “물고기처럼 생각하는데 3년 걸렸다.” 낚시의 고수가 되는 길은 물고기 의식을 갖는 것이다.
  종종 목회자들 가운데 별로 경건해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이 몰려드는 경우가 있다. 왜 그런가? 그들의 삶이 평신도와 가깝기 때문이다. 평신도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말, 그의 행동, 그의 생각이 평신도에게 전달된다. 반면에 경건해 보이는데, 사람들이 떠나가는 경우가 있다. 너무 훌륭한 사냥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종 고난의 체험을 하게 하신다. 고난의 골짜기에서 사냥감의 경험을 해보라는 의미이다. 상처를 주시는 이유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뜻이다. 고난이 오히려 삶의 이해와 삶의 지평을 더 넓게 만든다. 어느 분야든지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사냥감 체험을 통과해야 한다. 얼마전 인기를 끌었던 타짜라는 영화가 있다. 고니라는 주인공은 도박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도박 분야에서 사냥감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래서 최고의 도박 전문가 타짜가 되었다. 최근에 쩐의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인기 있다. 주인공 금나라는 사채 빚 때문에 부모를 잃는 피눈물을 경험한다. 사채업계에서 사냥감의 경험을 한 것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사채업계의 대가가 되게 만든다. 사냥감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냥감 의식 없이는 결코 훌륭한 사냥군이 될 수 없다.
  성경을 읽거나 고난 당할 때, 피상적으로 대하지 말라.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라는 흑인 영가가 있다. 2,000년전의 십자가 앞에 바로 내가 서 있다는 의식이다. 바리새인이 죽었다 깨어나도 느끼지 못할 십자가의 감동과 뜨거운 눈물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사냥감처럼 생각하라. 그러면 깊이와 넓이와 뜨거움을 누리며 사는 넉넉한 삶이 될 것이다.
“좋은 사람의 조건”(5.31.2007) 전병욱목사 칼럼

2007.07.0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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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의 조건”(5.31.2007)

  많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나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곤한다. 왜? 마음은 원했지만, 행동이 틀렸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좋은 목자 이야기가 나온다.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1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 수고해야 한다. 양 1마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양 99마리에 비하면 큰 것이 아니다. 1마리는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좋은 사람은 자기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작은 일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이다.
  타고난 재능도 많고, 열심도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실제로 맡겨진 일도 잘한다. 그런데 ‘좋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는 부족하다. 왜? 1마리 양에 대한 배려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아무리 은사가 많고, 아무리 유능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해도, 1마리 양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좋은 사람이 되는 조건은 작은 1마리에 집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얼마전에 체육대회를 했다. 소속한 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운동 잘하는 사람에게 집중해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일이다.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그런데 좋은 사람은 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못하는 사람에게도 마음이 가 있어야 한다. 항상 반대를 지향하며 살면 균형이 잡힌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발버둥쳐야 한다. 그것이 성장의 길이다. 그러나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갔으면, 정상의 기쁨을 누리려고만 하지 말고, 낮은 곳을 향해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안전하다. 그것이 좋은 사람의 마음이다.
  얼마전 미국 집회를 갔었다. 3군데 교회의 집회를 약속했다. 미국의 어느 교회든지 중간에 있는 주말 집회를 제일 좋아한다.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 많은 성도들이 쉽게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중에서 제일 작은 교회에서 주말 집회를 했다. 교인이 50명되는 교회였다. 왜? 큰 교회에서 주말 집회를 하면, 몇천명이 모일 수 있다. 뜨거운 지역적 반향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작은 교회는 주말이 아니면, 집회 자체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상태였다. 큰 교회는 힘이 있기 때문에 주중에 집회를 해도 조금만 힘을 쓰면 어렵지 않게 좋은 집회가 될 수 있다. 나는 이런 결정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작은 몸부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되다 보니, 약한 자녀들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고맙다. 예수님의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하고 잘나가는 사람을 보는 것도 좋지만, 좋은 사람을 보는 것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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