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사셨기 때문에 인간이신 예수님께 대한 논란은 역사적으로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그 논란은 모두 기독교의 절대적인 가치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하는,
예수님의 신적인 가치가 가장 크게 드러나는 이적은 모두 3가지입니다.
하나는 동정녀 탄생을 통한 성육신입니다.
다음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셋째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키고 있는 대림절은 바로 성육신,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은 이미 그 시작부터가 뭔가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예수님은 탄생은 성경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오실 것이 미리 다 말씀되어졌습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오늘 본문의 제목처럼 말씀대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대로 오신 것이 무슨 논란이 됩니까?
그리고 왜 성경을 믿었다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외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어제 날짜의 인터넷 뉴스에 오른 내용에 뉴질랜드의 무신론자들이
'신은 없다'는 내용의 광고를 버스에 하기 위해 광고비 모금 운동에 들어가자
모금 목표액이 불과 하루 만에 달성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언론들은 뉴질랜드 무신론자 버스 광고 운동 본부가 지난 10일
광고비 모금 운동에 들어간 지 30여 시간 만인 11일 오후 목표액 1만 달러가 모금됐다면서
이에 따라 운동 본부가 목표액을 2배로 상향조정했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자 버스 광고 운동 본부의 사이먼 피셔 대변인은
'필시 신은 없다. 이제부터 걱정 그만하고 인생을 즐겨라'는 내용으로 광고한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무신론자들이 대거 동참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광고 규모도 당초보다 2배로 늘리기로 하고
광고 시기도 내년 3월에서 1월로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뉴질랜드 가톨릭 주교 회의의 존 듀 의장은
"표현의 자유는 우리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권리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버스 광고의 초점을 신에 맞추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광고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광고를 하기 위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보세요,
왜 그들은 굳이 신이 없다는 광고를 해야만 했을까요?
그냥 자기들이 무신론자니까 신이 없다고 생각하고 즐기고 살면 되는데
왜 남들에게 손을 벌려서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신이 없다는 광고를 하는
비교적 복잡한(?) 과정을 거치려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딱 한 가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불안요인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 법규를 위반해서 교통경찰에게 단속을 당하면 공연히 불안해집니다.
범칙금 딱지를 떼고 다시 운전을 하고 가지만 마음이 동동 급해집니다.
단속이 되었다는 불안감이 스스로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공연히 심장이 막 뛰고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호흡이 가빠집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혼자 말이라도 해야 하고 소리라도 질러야 하고 노래라도 불러야만 합니다.
이게 범칙금 딱지를 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사실 이런 건 그리 큰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더 큰 죄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듣지도 따지지도 않는 범죄가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가 불안해져서 누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하나님을 향해서 일어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안 계신다고 소리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겁니다.
그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 같은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직접 오심으로서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살아계신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들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계시는지 깨닫게 해주려고 하신 겁니다.
요14:8-9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직접 보는 사람들을 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나님,
곧 예수님이 오늘 다윗의 자손인 요셉이라는 사람에게 결혼을 하기로 한
마리아라고 하는 처녀의 아들로 태어나신다는 예고가 주어집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하는 말이 이미 성경에 나온 대로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전혀 동요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사실 천사의 이야기는 마리아 개인으로 볼 때는 엄청난 것입니다.
아무리 그녀가 요셉과 정혼을 한 사이이지만
정식으로 결혼을 하기 전이기 때문에 육체관계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예수님이 태어난다는 가브리엘 천사의 이야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여자의 혼외정사나 임신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듣는 이야기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현장에서 간음하다 들킨 여자처럼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것을
각오해야만 하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남편 요셉에게 파혼을 당하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리아가 천사에게 다시금 확인을 합니다.
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정혼을 한 처녀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질문입니다.
아니 마리아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임신을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남녀의 육체관계로부터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정상인데
어떻게 육체관계도 없는 가운데서 예수가 태어났다는 엉터리 주장을 하느냐는 겁니다.
오늘 마리아의 이 질문에 대해서 가브리엘 천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5절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지금 마리라가 임신을 하게 되는 것은 정혼한 남편 요셉과의 정상적인 관계에서
갖는 임신이 아니라 성령이 그녀에게 오셔서 성령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루어지는 특별한 임신이라는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진리의 가치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그런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씀을 대부분 무시하고 삽니다.
자기하고 관계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남들에게 부추키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과연 계십니까?
아니 하나님은 우리 중에 과연 계시기는 하십니까?
일부의 광적인 성도들만의 하나님은 아닐까요?
아니면 반대로 분명하게 계시기는 하는데 모든 사람들에게서
너무 무시당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아니실까요?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을 통해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만 하는 것은
동정녀 탄생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내용을 기록하는 누가의 직업이 사실은 의사라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누가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직접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이 놀라운 기적 앞에
감히 자신이 과학적으로 인간적으로 규명하고 따질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귀한 생명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 다행힌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장례식을 인도하면서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가풍에서
살았나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는 죽기 전에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숙제를 남겼습니다.
그에게 있는 수많은 믿지 않는 가족과 형제간들을 우리에게 영적으로 맡기고 갔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에
우리들의 영적인 숙제들을 한 번 확인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맡겨진 숙제인 예수님의 잉태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들에 대한 숙제를 기꺼이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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