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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말할 기회 / 행21:37-22:1 (신226쪽)

원래 우리 사람은 존재의 근거 자체가 불안합니다.

근거 자체가 불안하다는 것은 우리 사람 자체가 불안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불안한 존재입니까?

죄악으로 오염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사람의 생각이나 지혜는 언제든지 많은 문제가 동반되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문제가 사고의 편협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까지도 폭 넓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이해와 사고를 하지 못합니다.

한치 앞도 제대로 못 내다보는 근시안적인 사고와 해석을 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는 동안 그토록 지적을 하셨던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바리새적인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적인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자유하지 못하고 변화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일정한 틀과 사고 안에 갇혀 살면서 오로지 그것만 고집하고 사는 겁니다.

때문에 쉽게 남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과 같은 주장과 생각에만 이해를 할 뿐 그 외에는 몽땅 다 적으로만 간주를 해버립니다.

기본적인 사고와 생각이 아군과 적군으로만 구분하고 나누는 이원론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모두가 아니면 모두입니다.

때문에 세상을 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삶의 끝에서 너무 편협하고 좁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자기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말을 시작하는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좀 다릅니다.

달라도 확실하게 다릅니다.

 

22;1 “부형들아 내가 지금 너희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하더라”

 

우리말 성경으로만 들으면 사도 바울이 붙잡혀 온 상황에서도

반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은 반말이 아니라 진실함과 겸손함을 담은 정말 따뜻한 표현입니다.

 

원래는 “사랑하는 나의 부모 형제 여러분!”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오해하고 자기를 어렵게 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훨씬 더 따뜻한 마음을 담아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오해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은 이런 표현이 사도 바울의

자기가 살기 위한 비굴한 표현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마인드요, 가치관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따지자면 누가 잘못을 하고 있는 겁니까?

사도 바울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를 끌고 가서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잘못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려와 예의와 존중의 태도를 지키고 있는

사도 바울의 태도를 통해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만 하는 영적인 인간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우를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적인 인간관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판단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사실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거의 모든 성도들에게서 대부분 무시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왜 무시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신앙생활은 사람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고 한다.’ 는 말입니다.

솔직히 교회를 좀 다녔다 싶으면 누구든지 몇 번쯤은 다 들어봤을 이야기입니다.

때문에 존중받고 사랑받고 이해받아야만 할 사람이

오히려 더 무시당하고 미움 받고 오해받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때문에 교회 안에서 들리는 부정적인 소리는 언제든지

누구 때문에 못살겠다, 못 다니겠다, 못 내겠다, 못하겠다는 소리들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은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에는 그 어떤 차이도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성도, 즉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존재 앞에 누구나 다 대등하게

못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봐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출발점입니다.

 

때문에 성도들이 갖는 대인간관은 언제든지 평등입니다.

우리들 중에 가장 크게 오해되고 있는 것이 뭡니까?

우리들의 열심의 정도를 가지고 서로를 구분하고 편 가른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열심을 갖고 살면 괜찮은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이고 못난 사람으로 치부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이 갈수록 끼리끼리 업적을 쌓아두고

견고한 성을 만들어버리는 바리새적인 경향으로 가버리고 있습니다.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의 열심을 갖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야만 하는 것으로의 기준을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나 마음이 어떻든지

그냥 교회 짬밥만 좀 먹으면 장로가 되어야 하고

남녀 선교회 회장은 해야만 하고

뭔가의 감투를 써야만 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입니다.

 

업적주의,

실적주의,

성공주의로 가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어디에서 하는 일들입니까?

몽땅 다 세상에서 하는 짓들입니다.

 

때문에 교회도 돈이 있어야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게 되어 버렸습니다.

돈이 없으면 뻔뻔한 낯짝이라도 있어야만 큰소리할 수 있는 곳이 됐습니다.

복이 되고 편안해야만 할 신앙생활이 좀 비참해져 버린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 하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감사하고 감사할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내 자랑이 되어버리면 안 되는 겁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예배드리는 것이 먼저인데 넌 먹고 산다는 것 때문에 예배도 안 드리냐?’

고 따지면 안 되는 겁니다.

누구보다도 못한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듯 서게 된 것이

감사하고 고맙고 행복한 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이 단순히 신앙적인 열심을 가졌기 때문에

오늘 이런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아니 안 된다기보다는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세상을 만들고 품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사도 바울에게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수 1:1-9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당부하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짓밟고 정복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들어가서 누리고 살라는 말씀도 되지만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서 맡기셨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살면서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삶이 좀 더 확대되고 넓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 삶의 자리부터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고 실천되어야만 합니다.

 

제가 군대에 들어갔을 때 신병교육대 6주 훈련을 마치면 이등병 계급장을 달아줬습니다.

자대를 배치 받는 동안 몇 시간을 대기하게 됩니다.

모두들 PX로 달려갑니다.

꼭 PX에서 말썽이 납니다.

PX 당번병이 원래 방위입니다.

비록 방위이긴 해도 군대짬밥은 금방 이등병을 단 신병보다는 훨씬 더 많이 먹었는데

이등병이 그 방위한테 반말하고 욕지거리를 합니다.

그래서 방위병하고 다툼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만촉광이 빛나는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가장 먼저 하는 짓이 고작 PX 방위병하고 싸우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신앙생활이 그렇지 않은지 한 번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고작 하는 것이 우리 주변을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는 더 크고 넓은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넓고 크게 원수까지도 사랑으로 품고 서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면,

아니 그렇게 믿고 산다면 원수까지라도 품고 사랑해서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인생답게 살아보라는 겁니다.

 

멀리 가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 말고,

교회 안에서 큰 소리 하지 말고

오늘 우리 살아가면서 당하는 모든 일들과 사람 앞에서 그리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결과를 다 책임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절대 절명의 말할 기회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으로 서있는 것입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갈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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