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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 사람 바울 / 행22:16-29 (신226쪽)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흥분한 군중들 앞에서

자기의 신앙과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변호를 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미리 인간적인 결론으로 보자면

사도 바울의 이런 자기 변호는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이번 변호뿐만 아니라

무려 네 번의 변호를 더 하게 되었고

결국은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의 이런 삶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갖고 있는 신앙생활이나 목회에 있어서의 성공한다고 하는 개념은

상당히 차이가 있는 겁니다.

 

아니 상당한 차이가 아니라 아예 그 길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도 이 땅에는 사도 바울의 삶을 따른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도대체 사도 바울의 어떤 삶을 따르고 있는 걸까요?

또 정말 사도 바울을 따르고 사는 삶이 무엇이어야만 할까요?

 

사도 바울의 삶을 생각해보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찾아봐야만 하는 것은

그가 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받았고

핍박을 받았고 방해를 받았는가 하는 점을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인간적으로 살려고 했더라면

유대인들에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과 같은 변호를 전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까?

따지고 보면 유대인들이나 사도 바울 모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녀로서 산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영적인 자존감을 갖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과 마찰을 빚게 됩니까?

사도 바울과 마찰을 빚고 있는 이유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따라가고 배워가고 본받아야만 할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때문에 딱 이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만 오늘 바울의 말씀 속에서 그 이유를 다소나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17-18절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오늘 이 말씀에서 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을 하셨다는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하셔야만 하는데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잠잠하시고

오히려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신 바울에게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사실 오늘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는 한계를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오만방자한 소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구나 다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바울에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정말 혁명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 외는

절대 말씀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외에 다른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이방인들도 유대인이 되는 길은 있습니다.

때문에 이방인들은 먼저 유대인이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이방인이 유대인이 되는

중간과정 없이-유대인과 전혀 다를 바 없이-곧 바로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이

속된 말로 머리끝까지 스팀이 차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유대인들의 그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22-23절 “이 말 하는 것까지 저희가 듣다가 소리 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유대인들은 즉시 그들의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겁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말씀은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들의 판단과 생각과 경험에 근거하면 이단의 소리인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도

복음을 복음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사도 바울의 차이는 뭡니까?

유대들도 열심히 기도합니다.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빠지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못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고서라도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이미 그들의 신앙생활은 굳을 대로 굳어버린 자기들 잘난 맛의 종교생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짝 엎드려서 그 말씀만을 듣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생활의 가장 큰 특징이 뭡니까?

기독교가 기독교다운 뭡니까?

무엇이 우리를 기독교인다운 모습이 되게 하고

교회다운 교회가 되게 하며

신앙생활다운 신앙생활이 되게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절대적인 권위와 절대 주권 아래에

우리의 무릎이 꿇리는 것입니다.

 

이것에 있어서 흔들리게 되면 그 모든 주권이 곧바로 내게로 오는 겁니다.

 

모든 주권이 내게로 오게 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서로 나 잘났다고 하는 싸움이 생기는 겁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우월감이 생기게 되고,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열등감이 생기는 겁니다.

 

남들보다 우월감을 갖는 자들은 절대로 남의 말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목사, 전도사의 말도 듣지 않고,

장로, 집사, 권사의 이야기도 듣지 않습니다.

 

그저 언제나 자기 주장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내 고집을 부리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절대적으로 섬기는 겁니다.

섬긴다는 말은 무조건이라는 명제를 이미 포함한 말입니다.

상대의 형편 처지 여하에 관계없이 무조건 섬기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은 어떻습니까?

자기 맘에 드는 대상에 대해서만 섬기는 겁니다.

 때문에 언제나 조건적입니다.

내 맘에 들어야만 움직입니다.

그러니 상대의 맘에 들려고 별의별 애를 다 쓰는 겁니다.

 

어제 모임에 갔더니 제 앞에서 인사를 하는 개척교회를 하는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교회 주변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서 열심히 부흥을 하는데

자기가 아직 전도사라서 축도를 못하니까 교인들이 왔다가 이상하게 생각들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회의 마치고 점심을 먹는데

그 전도사님 주변에 꽤 많은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모여서

전도사가 그냥 축도해도 된다는 말들을 하는 겁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대략 여덟 명의 목사님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영적인 현실입니다.

 

전도사가 슬그머니 축도를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라는 겁니다.

선배 목사라고 권면하는 말들이 기껏 해서 전도사 때부터

벌써 사람 비위 맞추는 것만 배우는 겁니다.

그것이 교회성장의 지름길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사도 바울은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갈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자기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큰소리를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들이미는 카드가 뭡니까?

 

25절 “가죽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섰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 된 자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 하니”

 

28절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로라 하니”

 

자기는 로마 시민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와 사도 바울의 결정적인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세계최고의 나라인 로마 시민권은

천부장의 이야기처럼 돈을 주고 사야할 만큼의 가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행사하고 있는 로마시민권의 가치는

세상적인 그런 가치가 아닙니다.

 

단순히 매 몇 대를 맞기 싫어서 로마시민권자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겠다고 하는

사도 바울의 의지적인 다짐이고 헌신이면서 충성인 것입니다.

로마시민의 파워를 자랑해서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을 내어놓고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하겠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예수 십자가를 앞세우고서라도 로마 시민권을 갖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하는 기도가 언제나 어떻습니까?

내가 뜻은 내고 그 뜻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셔야 한다는

엉뚱한 고집을 하는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자기 삶의 전 영역을 다 내려놓고서라도

하나님의 뜻 앞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골 1:24-29절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방인들이 유대인이 되는 과정 없이 구원을 받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납작 엎드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임을 고백하고 서야만 하는 겁니다.

 

로마 시민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천부장, 백부장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하고,

또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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