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자기의 생애에 있어서
모두 다섯 번 자기의 신앙과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변호를 합니다.
오늘이 바로 군중들 앞에서 하는 첫 번째 자기 변호입니다.
두 번째는 잡혀 가서 이스라엘 최고의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변호를 하고,
세 번째는 당시의 총독인 벨릭스 앞에서 하고,
네 번째는 그 벨릭스 후임으로 부임한 베스도 총독 앞에서 합니다.
마지막은 유대인의 왕으로 있던 헤롯 아그립바 2세 앞에서 변호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의 자기 변호를 보면서 생각해봐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관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절대로 오해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이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자기 변호가 철학적이거나 논리적인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로지 딱 한 가지의 내용에만 집중을 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사도 바울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다.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자기의 생각과 견해와 철학을 담아서
설명을 하거나 청중들의 이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일어난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전혀 복잡하거나 어렵거나 이해가 불가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순전히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단순하게 말하는 겁니다.
자기도 원래는 지금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왔다는 것과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의 모든 삶이 다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도 너희들과 똑같은 입장에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봐야만 하는 것은 뭡니까?
도대체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느냐는 겁니다.
어떤 차이가 있기에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들에게도 존재하고 있는 그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는 겁니다.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기독교와 세상의 종교들과 근본적인 차이는 뭡니까?
기독교는 우리가 믿는 그 대상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는 종교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언제든지 하나님께만,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의 우상 종교는 어떻습니까?
언제든지 사람들의 형편과 처지에만 우선을 합니다.
때문에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위해서는 우상은 모든 것을 다 해줘야만 합니다.
우상은 언제든지 사람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만을 위한 종교인데 반해 우상은 오로지 사람만을 위한 겁니다.
때문에 성도라고 하면 그 삶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시키시고
오로지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모든 결론을 내는 겁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바로 그렇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 시키신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셔서 시키신 일이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12-15절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너의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통해서 멀었던 자기의 눈이 떠지면서
하나님의 뜻을 듣게 되어 그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이것이 옳고 그르고를 판단해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인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에 자신을 기꺼이 따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그 뜻을 따르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오히려 더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바울을 부르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저것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옳은 것 같고
그것이 바람직한 것 같으니까 따른 것이 아닙니다.
종교 하나 정도는 가져도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니까 가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인도하시고 따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만이 뭡니까?
나도 말 좀 하자는 겁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하시지 말고 내 의견도 좀 존중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분이나 감정이나 형편을 내세웁니다.
‘내가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
좀 더 먹고 살만하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는 겁니다.
반대로
나는 예수 믿을만한 실력이 있고 능력이 되고 마음 자세는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때문에 ‘나는 너하고는 차이가 있지, 네 수준이 내 수준하고 같느냐’ 는 겁니다.
이것이 지금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인식입니다.
자기들은 남들보다 더 우월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 되었는데
지옥 불에서 불쏘시개나 될 이방인들까지 덩달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야기가 유대인들의 귀에 몹시 거슬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하나님보다 자기들의 생각과 감정과 위치가 우선인 겁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습니다.
내 기준과 조건에 맞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질 않습니다.
우리들끼리도 순서를 정하고, 서열을 정하고, 무리를 지어서 서로 편 가르기를 일삼고 있습니다.
은사가 왜 은사인 줄 아십니까?
그것이 우리들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가지고도 우열반을 가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잘난 척을 하고 혹은 못난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듣는 이야기가 뭡니까?
좋은 설교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설교를 듣고 좋은 교회를 다녀도
정작 본인 자신의 삶은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냥 다니기만 할 뿐 다니면서 자신의 삶이나 가치관이 도무지 달라지질 않습니다.
그저 그 안에 다니고 있고,
그 설교를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기는 좋은 성도라고 위로를 삼고 사는 것뿐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달라져야만 하는 겁니다.
어디까지 달라져야만 하느냐면
주변에서 나를 인정해주는 자리까지 가야만 합니다.
무엇으로 인정을 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다움이 삶의 자리에서 팍팍 나타나는 자리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오늘 사도 바울이 선 자리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저주하거나 욕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변명을 말하거나 이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시키신 일이라는 것만 말합니다.
자기도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끌고 가시는 것을 자기가 죽기까지 감당을 하는 겁니다.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는 그 끝이 내가 죽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도 내가 죽을 때까지 하는 겁니다.
봉사를 해도 내가 죽는 곳까지 가는 겁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도 없습니다.
죽기까지 참는 겁니다.
세상은 우리더러 뭐라고 말을 합니까?
왜 그렇게 바보같이 참고 사느냐?
인권을 찾고, 권리를 찾고, 자기 삶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애매히 맞더라도 참고,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내가 전혀 원하지 않은 고난의 파도 가운데서도 견디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곧 나를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자기 변호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는 원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붙드셔서
오늘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받고 어려움을 겪는 자리에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신다면
오늘의 내 자리의 형편이 어떤 것이든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의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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