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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두 번째 변호 / 행22:30-23:10 (신226쪽)

오늘은 사도 바울이 공회 앞에서 두 번째로 자기를 변호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예수 믿는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우리는 그냥 무조건 사도 바울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저들 유대인들이 열을 내고 화를 내고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말을 하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23:1절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사도 바울 자신은 자기의 양심을 따라서 지금까지 하나님을 잘 섬겨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속을 박박 긁는 악한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은 지금 자기들이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산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전하신 복음이나

지금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이

모두 유대인들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유대인들에게는 열 받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쌓아 놓은 모든 종교적 권위를 다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 바울이 지금 유대인들에게 권고하는 모든 것은

사실 자신들을 변절자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겁니다.

 

 

왜 유대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과 유대인들의 가장 큰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와 믿지 않는 사람들 간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수요일 저녁까지 나오는 열심당인 우리와

주일 예배도 그럭저럭 빼먹고 사는 선데이 크리스챤과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이 드십니까?

 

딱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뭐죠?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열심당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선데이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확하게 압니다.

때문에 아무리 환경이 우리를 두렵게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를 벗어날 수 가 없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아무리 중하고 급해도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으로 가면

아무리 유대인들의 협박과 박해와 고통이 심하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만난 하나님으로 인해서 결코 복음 전하는 일을 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누가 강제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감격의 힘이 강제로 시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을 위한 절대적인 목표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절대적인 목표가 있으니까 결코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를 가리켜 배타적이라고들 합니다.

기독교 자체가 배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죠?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두 점을 잇는 직선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다른 선들이 난리를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한 가지 선 밖에는 없습니다.

때려죽인다고 협박을 해도 그것 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태도가 이런 겁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왜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이 예수 밖에 없다고 하느냐 입니다.

그래요.

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무지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지 않으면 유대인이라는 것으로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절대적인 배타성입니다.

여기에는 전혀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 믿는 자들에게 필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배타적인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포용성이라는 사실입니다.

폭 넓게 모두를 아우르면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포용성의 바탕 안에 도덕성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세상도 물론 도덕성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윤리도 있고 도덕의 기준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은 세상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느 정도까지 다릅니까?

그 차이를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존재의 가치가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없다면 이 세상은 어두움에 잠길 것이고,

우리가 없다면 이 세상은 맛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 빛과 맛을 내는 존재로서 우리를 부르신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존재의 본질에 충실하느냐는 겁니다.

 

오늘 사도 바울처럼 죽음의 위협을 앞에 두고서 까지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충실하게 감당하느냐는 겁니다.

여기에 충실하려면 물론 도덕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도덕의 기준이 세상의 것과는

완전히 차원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 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어떠십니까?

이 도덕적 잣대의 깊이가 느껴지십니까?

 세상의 도덕적 잣대는 GIVE & TAKE입니다.

준만큼 하고 받은 만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도덕적 잣대는 그 이상입니다.

안 줘도 줘야하고 안 받았어도 줘야만 하는 겁니다.

훨씬 더 그 깊이와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기준만큼 해서는 택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 사도 바울의 모습이 이해가 되어야만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기만 하는 유대인들 앞에서

이 정도의 열정과 정열을 보이기란 쉽지 않는 겁니다.

그냥 침 한 번 뱉고 돌아서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준과 가치 안에 상대방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 죄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내 기준과 가치를 과감하게 버리고 상대방에게 맞춰줘야만 하는 것이

우리가 행하고 가져야만 하는 기독교적인 도덕성입니다.

 

그 상대가 어떤 태도로 나오는지에 관계없이 그렇습니다.

물론 진리는 소유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절대적인 가치는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타협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는

여타의 모든 것은 다 내버릴 수 있어야만 하고

내버려야만 합니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성품이나 원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설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남들더러 내게 맞추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남들에게 먼저 맞춰주는 자세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자들의 마땅한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절대적 과제요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한 내 삶의 가치나 자세나 태도는

모두 다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아직 하나님을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두 번째의 변호를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변호를 한다는 것은

이 싸움이 결코 쉽게 끝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전혀 서두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통해서 절대적인 목표를 이루실 하나님을 더욱 소망하면서

더욱 자신감 있게 변호에 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던져 넣고

자기 자신도 변화되고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담대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인격적으로

성품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더욱 더 성숙해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차분하게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더욱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참을 줄도 알고

견딜 줄도 알고

포기할 줄도 알고

손해 볼 줄도 알아야만 합니다.

언제까지요?

 

천국 가는 그 날까지요.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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