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세상 살아가시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보셨습니까?
그 때의 심정이 어떠셨습니까?
스스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직접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점점 더 억울한 일을 만나는 것입니다.
12-13절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 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단식을 하겠다는 사람이 무려 사십 여명에 달합니다.
솔직히
지금 사도 바울을 도와주는 사람이 사십 여명이라고 하더라도
복음 전하는 일이 벅찰 것입니다.
그런데 돕는 사람은 고사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고 하는 사람이 사십 명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기껏 사울을 불러서 이름 하나 바울로 바꿔주고서는
그가 하는 충성스럽고 헌신하는 일에 도와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도와주신 일이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까?
특별하게 생각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습니까?
그런 일은 별로 없고 하여간 언제나 죽지 않을 만큼만 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한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 스스로 자신의 고난과 고통에 대한 고백을 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고후11:22-28절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한마디로 여러 번을 죽을 뻔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죽지는 않았다는 거죠.
솔직히 이런 경우에는 죽지 않는 것이 더 고통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었다고 말을 합니다.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가 그에게는 더욱 큰 고통이었습니다.
교회를 염려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믿음의 반석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지켜 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는 것은
결국 여러 사람 속에서 자신 만의 믿음을 지키기가 더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떤 문제냐면 관계의 문제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오늘 우리들에게도 힘들게 느껴지는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가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만 사십 여명의 특공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들에게도 다 있다는 겁니다.
인간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닌
성도로서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절망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바라고 그렇게 유혹해가는 어려움들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이런저런 인간적인 조건들만 해결이 되면
다 좋아질듯 싶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죠?
우리가 복음을 붙들고 살고 나누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갖고
영적으로는 이 세상과는 단절해서 사는 거룩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은 어려움이 없을 수 가 없습니다.
없다면 우리 존재 자체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만 하는 겁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영광을 위해서는 고난의 길이 동반되는 겁니다.
고난을 생략한 영광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는 동안 고난만 받다가 죽는 거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끔 숨을 쉬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바울의 생질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생질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십 여명의 자객들이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소리를 듣고 나타나서
즉시 바울에게 알려줍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즉시 자기 조카를 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그랬더니 이 천부장이 어떻게 합니까?
22-25절 “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천부장에게 딸린 군대의 숫자는 원래 천 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을 호위하기 위해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470 명을 동원하는 겁니다.
솔직히 천부장에게 있어서 사도 바울이 귀찮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그가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바울 자체는 유대인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천부장은 사도 바울의 목숨을 지키려고 갖은 애를 쓰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을까요?
두 말하면 잔소리고 또 말하면 입만 아픕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사도 바울이야 그렇다 치고
그럼 우리는 어떻게 누가 지키고 있을까요?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 대한 해결이 우리에게는 제대로 되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도 지키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사실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내 눈을 돌려서 쳐다보고 있을 때가 많은 겁니다.
대하20:12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대 왕 여호사밧이 모압과 암몬과 세일산 거민들이 유대 땅으로 쳐들어오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내용의 일부입니다.
내용으로는 일부이지만 핵심으로는 결론입니다.
그냥 하나님만 쳐다보고 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는 겁니다.
어제 노회에 다녀왔습니다.
워낙 그런 정치적인 것이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더 관심 없게 만드는 일이 있었습니다.
노회 개회 예배의 축도를 여든은 훨씬 넘기신 것 같은 원로 목사님이 하셨습니다.
그 분은 혼자서 걷기도 힘이 드시는지 주변에서 젊은 목사님이 부축해서 강단에 올라오셨고,
축도도 옆에서 붙들어줘서 겨우 하셨습니다.
그것도 축도의 내용 중에 중요한 성령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도 그 연세와 건강에도 나오셔서 축도를 하신다는 것이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의 순서에서 그런 존경심이 깨끗하게 사라졌습니다.
그 분의 잘못이 아니라 후배 목사들의 잘못이었습니다.
노회의 순서 중에 갑자기 목사회에서
은퇴, 원로, 공로 목사님들께 감사의 선물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까 축도하신 목사님들을 비롯한
열 분 정도의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강단으로 오르게 하신 겁니다.
축도할 때도 힘드셨던 그 목사님은 또 다시 젊은 목사들의 부축을 받고 오르셔서
선물봉투 하나씩을 받고 박수를 받고 다시 들어가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장면이고 귀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평생을 주를 위해서 헌신하신 것을
사람들의 선물 하나와 박수소리로 바꾸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고 서야만 하는 분들을
굳이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 안에 머물게 할 까 하는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대책은 다른 것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 외에는 다른 필요가 없습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목회를 하셨다면
더 이상 사람의 박수는 사양해야만 옳습니다.
보세요.
오늘 바울이 무엇을 어떻게 합니까?
아무 것도 하질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앞에만 서겠다고 하는 겁니다.
세상은 어찌하든지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합니다.
그 음모를 이기는 유일한 대책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입니다.
남편이 나중에 잘 되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대학 들어가고 취직하면 되는 일도 아닙니다.
사업이 잘 되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어서의 유일한 삶의 대책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조금 없다고, 반대로 조금 있다고 세상을 기웃거리고 잘난 척 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 삶의 유일하고 완벽한 대책입니다.
그 은혜에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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