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도 바울에 대한 벨릭스 총독의 재판이 정식으로 열리게 되는 내용입니다.
사실 재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전제는 무엇입니까?
재판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재판뿐만 아니라 삶은 언제나 공정하기를 원합니다.
무리하게 공짜를 바라고 원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내가 일한 만큼, 또 내가 투자 한만큼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예를 들자면
오늘 수요기도회에 참석한 만큼의 은혜와 응답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힘들고 어려운 것도 참고 참으면서 지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정함을 전제로 해서 오늘 사도 바울이 당하는 재판을 생각해본다면
사실 기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결론으로 말씀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에 기소된 것 자체도 이미 불공정한데다가
재판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미 사도 바울에게
그 어떤 공정함도 제공해주지 못 하는 악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은 사면초가입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형편과 처지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재판의 결과는 이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아니 죽기도 하겠다고 하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요, 사랑의 결과입니다.
우리라고 다를까요?
그러니 우리 모두 생각을 돌리고 바꾸심이 어떻습니까?
이빨을 깨물고 오늘의 현실을 이기고 극복하고 지나고 나면
꽃피는 봄이 올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허망한 상상에 불과합니다.
깨물고 살면
이빨만 더 빨리 상해서 틀니를 해 넣어야만 할 날만 빨리 올 뿐이고,
돈만 더 들어갈 뿐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공정한 삶이
결코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고 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고 살지만
그 전능하신 은혜가 우리 삶의 억울하고 힘들고 속이 상한 것을 해결하는 것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것이
어차피 하는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직접 해도
공정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오늘 사도 바울을 보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단순히 오늘 본문만의 사도 바울이 아니라
바울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행하고 있는 모든 사역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것들입니까?
그런데도 그의 인생에서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고 찾고 구하는 행복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엄청나게 힘들고 어렵고 답답하고 억울한 일만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역을 돕는 자들도 많이 보내셨지만
방해하는 자들을 훨씬 더 많이 보내주셨습니다.
방해하는 자들의 실력이 월등히 더 세고 강했고
방해하는 자들의 등장은 언제나 절묘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결정적인 곳에서만 등장을 합니다.
그 때는 돕는 자들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을 방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자들만 등장을 합니다.
로마 총독인 벨릭스가 그렇고,
사도 바울을 송사한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렇고
장로들이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사인 더둘로까지 등장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이용해서 로마의 법정에 서기를 원하니까
대제사장이 직접 고용을 한 사람입니다.
변사는 지금으로 따지면 변호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법뿐만 아니라 로마 법률에도 능통한 자입니다.
그런 자가 유대 종교 귀족들의 사주를 받고
바울을 로마의 법령에 따라서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먼저 벨릭스 총독의 귀를 간지럽게 해주고 있습니다.
3-4절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을 인하여 여러 가지로 개량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감사 무지 하옵나이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산다는,
또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구별되어서
선민으로 살고 있다는 민족적인 자부심을 갖고 사는 유대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로마 총독은 곧 자기들을 침공해서 점령하고 있는 로마 정부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을 침략한 로마 정부에 대해서
이처럼 입에 발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민족적인 자긍심이나 선민의식보다 자기들의 개인적인 삶을 더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민족의 그리스도인줄 이미 다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순간부터
자신들의 영역은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더라도 아마 인정하기 싫을 것입니다.
그것이 다 오늘의 현실에 대해서 만족하고 사는 어리석은 인생들의 안타까운 고집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가 좋다는 겁니다.
때문에 자기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에게까지 얼마든지 입에 발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 정부는 유대인들에게는 세상을 나타냅니다.
로마 정부에 대해서는 싸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리쳐서 이겨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원하면
이미 그것은 타락이요, 크나큰 범죄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가 욕먹고 있는 이유가 세상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지나쳐서
기독교의 절대적인 진리까지도 세상적인 가치로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목표를 삼아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더라도 그 본질을 꿰뚫어보면
몽땅 다 세상적인 가치요, 기준입니다.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교회를 키우고 그럴듯한 사역들을 한다고 하는 것이
모두 세상적인 기준에서 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신앙생활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에게는 온통 고통 밖에는 없습니다.
죽을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도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자신에게 닥친 고난에 대한 그 어떤 원망이나 한숨, 또는 대적하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그 어떤 개인적인 감정이나 원한을 갖지 않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고 모함하고 힘들게 하는 상대들에 대해서 왜 미움을 갖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삶은 이 땅에 국한 된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삶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아닙니다.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사도 바울이 바라고 추구하는 삶은 이 땅에서의 잠간 동안의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바라는 삶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환난이나 아픔이나 고통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개인적인 감정을 갖거나 연연해하질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거나 그 힘을 의지 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나 힘은 영원한 천국을 향한 삶을 위해서 원하고 바랍니다.
결코 이 땅에서의 필요나 원함이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를 바라질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송사하고 재판하는 자들에 대해서 자신의 삶을 두고 변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권세들에게 더 철저하게 당해버립니다.
기꺼이 자기를 세상의 어려움과 불편부당함에 던져버립니다.
그리고 차별 없고 구분 없고 정당하고 공평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머리 깎고 띠 두르고 사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오늘 겪는 불편부당함에 대해서 기꺼이 감수하고 사는 것이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우리들의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특권답게 누릴 줄 알아야만 합니다.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삶이 우리의 삶입니다.
때문에 우리 삶은 이 땅의 권세나 가치나 요구에 부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땅의 삶에 대해서는 더욱 철저하게 구경꾼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무시나 경멸이나 조롱 앞에 발끈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당연히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길입니다.
문제는 그 내용에 있어서 오늘 우리의 너무 초라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시당하고 조롱당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기준과 잣대에 의해서 무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세상에서의 힘과 권력을 쥐려 하고
물질을 가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무시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되돌아가야만 합니다.
오늘 더둘로가 바울을 송사하면서 고소하는 내용으로 우리 삶이 돌아가야만 합니다.
5-6절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저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여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예수에 미친 자라는 겁니다.
예수를 전하려고 작정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예수 때문에 완전히 미쳐서 세상 모든 것은 다 내려놓고 사는 또라이라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가장 악한 소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귀한 칭찬의 소리입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려면 우리가 내려놔야만 하는 것들이 뭘까요?
한 번 심각하게 생각들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작정하고 살더라도 하나님은 전혀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엄청난 어려움과 아픔과 고통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면
그 나머지 모든 것은 다 포기하고 살아갈 마음이 있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가 고소를 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누구도 미워하지 마시고 기꺼이 당당하게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추천 설교 > 나무목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세상 눈치 / 행24:24-27 (신230쪽) (0) | 2015.06.09 |
---|---|
[스크랩] 바울의 변론 2 / 행24:10-23 (신230쪽) (0) | 2015.06.09 |
[스크랩] 사람들이 오거든 / 행23:31-35 (신229쪽) (0) | 2015.06.09 |
[스크랩] 음모와 대책 / 행23:12-30 (신228쪽) (0) | 2015.06.09 |
[스크랩] 담대하라 / 행23:11 (신228쪽) (0) | 2015.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