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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람들이 오거든 / 행23:31-35 (신229쪽)

공자가 가르치는 사상 중에 가장 으뜸 되는 가르침이 바로 중용의 도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면 이도저도 아닌 가르침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냥 쉽게 말하면 자기 좋은 대로 자기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최고입니다.

선거철을 앞에 두니까 그동안 정치권으로부터 잘 듣지 못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중도 우파, 중도 좌파니 하는 말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않았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말입니다.

 

이런 주장을 들고 나오는 그 근본의 이유가 뭡니까?

자기들을 지지해 달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표 하나 더 얻기 위한 술수입니다.

그냥 선거 때만 들고 나오는 순수 100% 이상 자기들을 위한 말일 뿐입니다.

자기 잘되려고 주장하는 내용일 뿐입니다.

좌니 우니 중도니 하는 것들이 다 자기를 위한 자기 명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 오면 이런 생각들이 들어오면 이건 정말 엄청나게 큰 범죄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470명의 로마 군대의 호송을 받으면서 가이사랴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총독 벨릭스 앞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습니다.

총독은 천부장이 보낸 편지를 읽고 나서 사도 바울에게 간단하게 어디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사도 바울이 길리기아 사람이라고 말하자

총독의 심문은 그것으로 끝이 나버립니다.

그리고는 35절입니다.

 

 

“가로되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사도 바울을 송사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입니다.

그들이 와야만 심문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도 바울을 헤롯 궁에 가두어 지키라고 말하고는 끝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떤 생각들이 드십니까?

벨릭스 총독은 그가 아는 한 법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절차상으로도 아무런 이상 없이 잘 처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주 심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떤 아쉬움이 남습니까?

사도 바울이나 벨릭스 총독이나 서로 침묵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침묵을 하고 말았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럴 때 정말 복음에 열심 있는 자의 모습이 사도 바울에게서 드러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다음 주에 보겠지만 24장에 가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사도 바울을 송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송사하는 날이 사도 바울이 헤롯 궁에 갇힌 지 무려 5일이나 지나서 열리게 됩니다.

이 5일 동안 사도 바울은 벨릭스 총독하고 아무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에게는 로마에 가야만 할 사명과 책임감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는 시간들도 사실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사명과 책임의 시간입니다.

 

어디는 가고 어디는 못 가고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서는 하고 어디서는 못하고가 없습니다.

 

그러니 약간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총독이 사람들이 오거든 그 때 가서 모든 말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만

개인적으로 총독에게 할 말이 있다고 복음을 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는 너무너무 완벽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과 마음이 넉넉하게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완벽했던 사도 바울에게도 아쉬운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것에 게으르기 쉬운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너무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저 놀기만 하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언제든지 달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보다 더 아쉬운 것은 벨릭스 총독입니다.

이렇게 아쉬울 때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사도 바울이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위대한 사도를 통해

복음을 들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복음에 대해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그저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일에 대해서 강한 자신감과 프라이드를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복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이 없습니다.

 

오늘 벨릭스 총독이 사도 바울을 볼 때는 정말 이상한 사람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물론 24장 후반부에 가면 벨릭스 총독이 사도 바울을 불러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듣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때도 벨릭스 총독은

복음에 대한 궁금증이나 사도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관한 것 때문에

그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벨릭스 총독에게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그저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일 뿐입니다.

 

 

요즘도 벨릭스 총독 같은 사람들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만나서 복음을 전할까 봐서 염려이고 걱정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중도요, 중용이요, 중간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벨릭스 총독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훨씬 더 불신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치만 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벨릭스 총독은 사람들이 오거든 그 때서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과 의견을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생각에 맞추겠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있는 대다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이 다 이런 것들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평가와 의견에 맞춰서 움직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가 우리의 염려가 되어야만 옳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갈 1:10-12절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복음의 출처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코 우리에게서 시작하질 않습니다.

 

창세기 3장에 가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자신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나뭇잎으로 치부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는 옷을 지어 입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은 수치를 자신들의 힘으로 가리려고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가죽옷을 입히시려면 동물 중에 누군가는 희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희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직접 지어 입히신 가죽옷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직접 만들어 입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그런데 그 기회 앞에서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바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들을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는

그 때 당시 그 사람의 마음이나 삶을 기준으로 해서 구원을 하십니다.

 

 

오늘 벨릭스 총독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사람의 판단을 더 존중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봐야만 할 핵심이 바로 이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와 우리의 판단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왕상18:20-4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그런즉 두 송아지를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저희는 한 송아지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며

나도 한 송아지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놓지 말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고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 번 그리하라 하여 세 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함께

갈멜 산에서 제사를 통해서 대결을 한 내용입니다.

 

두 번 말할 것도 없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라고 중용의 도를 따를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야 옳은 것입니다.

거기에 살 길이 있습니다.

 

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람들이 오거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하나님의 은혜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그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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