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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그립바 왕 앞에 / 행25:13-27 (신231쪽)

그동안 유대인들은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해온 베스도에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사도 바울을 처리하라고 압력을 넣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스라엘의 왕인 아그립바가 친히 베스도 총독을 만나러 와서

역시 사도 바울의 처리문제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한 조속한 처리를 원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 맞춰서 총독에게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그립바 왕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성경에 나오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제 스타일이지만

특별히 이 아그립바에 대해서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아그립바는 원래 아그립바 2세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그립바 1세는 행12장에 나오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칼로 쳐 죽인 헤롯입니다.

아그립바 1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 잘난 척을 하다가 벌레가 먹어 죽어버린 왕입니다.

또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아래 남자아이를 다 죽인 헤롯이

아그립바 2세의 증조할아버지입니다.

또 베스도 직전의 유대 총독인 벨릭스의 아내였던 드루실라가 바로 아그립바 2세의 누나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름이 나오는 버니게라고 하는 여자는

바로 아그립바 2세의 여동생이면서 그의 정부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잘라 말하자면 아그립바의 가문은

대대로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반대의 길에 서있는 악한 가문인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세상과 사탄을 상징하는 가문입니다.

 

그런 자에게 영적으로 얻을 것이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런 그가 왜 사도 바울의 재판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빨리 사도 바울을 죽여 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죽이려고 하는 것에 가장 큰 걸림돌이 뭡니까?

사형을 내릴 수 있는 로마의 법에 따르자면 사도 바울의 죄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총독을 찾아와서 사도 바울의 재판에 대해 간섭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유대의 왕이기 때문에

총독도 그의 의견에 대해서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뭡니까?

세상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세상을 절대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각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엄청난 능력과 실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충분히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변화하고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정말 말 그대로 기대일 뿐입니다.

 

세상은 절대도 달라지질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애써도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역사에서 드러나고 있는 증거입니다.

 

예수님도 못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못했습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공항에서 종종 필리핀에 단기선교를 가는 팀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 같이 단체 T셔츠를 입고 요란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어떤 팀은 필리핀을 자기에게 달라고 하는 문구를 써넣은 티셔츠도 입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필리핀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될 수 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세상과 우리가 가는 길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도 다르고

원하고 바라는 것도 다 다릅니다.

 

때문에 세상은 도저히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바쁜 시간에 수요일 저녁에도 교회를 간다는 것을 저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모든 것의 가치를 걸고 사는 이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문제는 정말 웃기는 소리일 뿐입니다.

 

 

오늘 베스도 총독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17-19절 “그러므로 저희가 나와 함께 여기 오매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아 명하여 그 사람을 데려 왔으나 원고들이 서서

나의 짐작하던 것 같은 악행의 사건을 하나도 제출치 아니하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

 

지금 베스도 총독이 하는 말은 사도 바울의 견해를 옳다고 판단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반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차라리 반대한다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타까운 뜻이 담긴 말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의 주장은 예수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하는 문제라는 건데

그걸 누가 믿겠냐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가 되느냐는 겁니다.

그냥 그렇게 혼자 떠들다가 죽게 놔두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뜻입니다.

자기 입장에서는 그리 큰 문제거리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로마의 법에서는 그런 걸 다룰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별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근간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고전15:12-20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삶을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부활까지 없다면

우리 삶이 정말 얼마나 불쌍한 삶입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습니다.

있어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분명하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대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어려운 삶을 참아내고 견뎌내고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부활이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릅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 세상 밖에는 모릅니다.

지금 여기서 사는 것에만 모든 관심이 다 가있습니다.

여기서만 잘 살면 그뿐입니다.

 

때문에 삶 전체를 이 땅에서 누리는 것에만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에서 잘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 삶의 원리와 철학은 철저하게 허무주의입니다.

이 세상 한 탕 잘 먹고 잘 살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의 삶은 정말 부질없는 것들뿐입니다.

권력, 명예, 재물, 건강, 권세 등 그 어떤 것도 다 그렇습니다.

다 죽을 것들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세상의 삶을 못 따라가서 정신을 못 차린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보상으로 이 세상의 것을 누리려고 하는 얄팍한 욕심에

사로잡혀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정당하기만 한 성경적인 보상은 외면하고

헛되고 허무한 이 세상의 것으로 보상을 삼으려고 할 때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예수 믿고 몇 대를 살아도 남은 것은 가난과 멸시 천대뿐이다.’

것이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소리 앞에서 우리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있고 눈물이 핑 돈다는 것이 큰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의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가 되질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사회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아서 남은 것이 없는데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공공연한 주장입니다.

 

이 땅에서도 떵떵거리고 살고

천국도 가면 더 낫다는 이야기에 우리의 마음이 벌렁벌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때문에 성도들에게 양보도 없고 인내도 없고 화평도 없습니다.

오로지 나만 잘되고 봐야지 만 있습니다.

그저 입만 열면 이 땅에서 잘 된 것뿐입니다.

눈치 빠르게 움직여서 집을 제 값 이상 받고 잘 판 이야기뿐입니다.

 

그러니 그 안에 어디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실 공간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동산 값 올리시는 데에 일조를 하셨다는 것이

오늘 한국의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귀하고 아름다운 간증인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산다면서

나는 어떻게 이렇게 부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에 할 말이 많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것입니까?

 

그런데 아주 아쉽게도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이 더 설득력이 있게 되어 버렸습니다.

많이만 모이고 크게만 되면 몽땅 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누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늘의 권세와 영광만 부리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는 하늘의 것은 다 내던져 버리고

이 땅의 것으로 영광을 삼아버린 것입니다.

 

더욱 문제는 이제는 아무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회개하지 않고 모두가 다 그 길로만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그립바 2세가 더욱 큰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장 썩어진 것들로 온통 무장을 하고 있는

그가 감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인 사도 바울을 재판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23절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크게 위의를 베풀고 와서

천부장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과 함께 신문소에 들어오고 베스도의 명으로 바울을 데려오니”

 

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하게 젖어서 사는 아그립바가

세상에서 가장 호화롭게 치장을 하고 사도 바울의 재판정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더럽고 추잡함을 하나님께서 견디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을 아그립바 왕 앞에 세우시는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아그립바는 절대로 사도 바울을 심판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삶과 사역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왕이 사도 바울을 재판한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모두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을 것 같은 아픔과 고통의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사는 우리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절대로 낙심하여 쓰러질 수 없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염려 놓으세요.

이 세상의 것으로는 쥐뿔도 없을지라도

우리에게는 부활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때문에 전혀 염려할 것이 없는 삶입니다.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아그립바 왕 앞에,

이 세상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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