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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변명 3 / 행26:1-23 (신232쪽)

오늘 본문의 제목이 바울의 변명 3탄이지만 실제로는 다섯 번 째 변명에 해당하는 겁니다. 

법정에서 공식적으로 변명을 하는 것은 세 번째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이렇게 변명을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전혀 쓸데없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도 바울은 로마의 황제에게 자기 문제를 청원했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 황제 앞에 가야만 근본적으로 해결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변명의 기회를 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삶의 모든 시간과 처한 모든 공간을 말씀을 전하는 

기회로 삼고 사는 것이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열매를 맺을 것인지 아닌지는 생각할 필요도 여지도 없습니다. 

지금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복음만을 전한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얼마나 감동적이겠습니까? 


지금 바울이 해야만 할 것은 뭡니까? 

자기 살려 달라고 해야만 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나를 이렇게 가둬놓을 것이 아니고 

빨리 풀어줘야만 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말씀을 가만 읽어보시면 그런 의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6-7절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간절히 바라고 사는 것 때문에 

자신은 송사를 받고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변명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복음을 전하는 자세와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복음 전파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용가리 통뼈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 중에 자주 듣는 사람들의 말 중에 하나가 성격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급한 사람은 급한 대로, 

느긋한 사람은 느긋한 대로 믿음생활을 한다고들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주장과 가치와 견해, 바람, 비전 들을 가지고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이 잃어버린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실종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들 자기 뜻과 생각대로만 믿고 살기 때문에 

도무지 하나님의 은혜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성의 자유함을 주장하는 인본주의 시대가 되고 보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것인지, 

내 것인지가 분명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데도 

하는 모양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다움이 전혀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도무지 내가 무엇을 위해서 이 일을 하는지가 불분명해져버렸습니다. 


때문에 상당수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을 잃어버리고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도 즐겁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성격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이 변명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포인트를 다시금 회복해야만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자기에 대한 이야기가 

단순히 이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이제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이 되었다고 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전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으로 살았는데 

이젠 그 열심히 예수를 증거 하는 사도로 살고 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는 예수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전의 사울을 한 번 보세요.


9-12절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한마디로 이전의 사울은 자기의 생각과 의견과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뜻을 바꾸지 않고 저돌적으로 행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의 오해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후의 사도 바울 역시 그런 성격과 스타일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 밀어부쳤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오늘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이나 베스도 총독 앞에서 이렇듯 변명하고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거칠게 사납게 나가야 옳지 이렇게 얌전한 고양이처럼 말할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아무 것도 못 하고 

가이사랴의 옥에 갇혀 있는지가 벌써 2년입니다. 

이방인을 위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가진 사도 바울의 성격으로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복음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습니다. 

오늘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앞에서도 

전혀 사도 바울의 눈에 불꽃이 튀거나 입에서 강한 메시지가 나가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도 바울은 왜 이렇게 태도가 변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16절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 말씀 중에 특별히 “네가 나를 본 일” 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회심하기 전까지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였으나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나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 그분은 메시아이시다.’는 

것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때문에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든지 관계없이 

이제는 복음과 교회와 하나님만을 위한 열심을 내고 사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회심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심각하게 축소하거나 심하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생각과 이해로 인해서 

오늘날 신앙 안에서의 삶이 도무지 막무가내인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는 자의 삶이라면서 

그 사랑과 은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막가파식의 행동만 가득한 삶이 너무 많습니다.


“네가 나를 본 일” 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건 사도 바울이 다른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입니다.


12-16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네가 나를 본 일” 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울과 같은 자를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떤 자라고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살던 자였습니다. 

그런 자기를 만나주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지금 복음을 전하는 이 사역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먼저가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만나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먼저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른 그 누구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 안에서 다 받아들입니다.


오늘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같은 사람은 얼마나 악한 사람입니까? 

복음 안에서 보자면 이들은 마귀의 추종자들 정도 되는 악당들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서 

전혀 낯빛을 바꾸거나 

목소리를 높이거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칠지 않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불러 세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심판과 적개심을 다 내버리는 이 모습이 

곧 주님을 뵙고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삶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핵심이라는 겁니다. 


이 믿음의 본을 우리가 보여야만 하는 겁니다. 

물론 말씀을 전하는 저도 여전히 이 부분이 매끄럽지 못합니다. 

아직도 여전히 다른 이들에 대하여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교회 안에서 경계하고 조심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온유함이 있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인정을 해주고, 

못하더라도 전혀 인상을 바꾸지 않는 신앙이라야 하는 겁니다.


나는 만 명의 교회에서는 큰소리를 못하는 형편이니까 

개척교회에 와서 큰소리를 해야 되겠다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으로 전혀 소리 내지 못하는 신앙이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하의 죄인인 내게 은혜를 주셔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사니까 아무 말 못하는 거지, 

형편이 조금만 펴봐 나도 가만히 있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렇게 만들어 간다고 하는 분명한 증거를 보일 수 있는 

인격적인 삶이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교회에 오면 나 보다 더 악한 사람인 아그립바도 있고, 베스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사도 바울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신앙입니다. 

언제든지 이것을 점검하고 사는 것이 

수요일 저녁까지 예배당에 나오는 우리들이 가져야만 할 귀한 가치입니다.

‘누구는 안 나왔네.라고 생각하는 기도회가 아니라 

안 나온 이들의 모든 몫까지 넉넉하게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하게 임하기를 바라는 

진실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좀 더 넉넉하고 품격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엡4:30-32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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