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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상 눈치 / 행24:24-27 (신230쪽)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꿈을 꾸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사실 다들 오늘의 현실에서 벗어나길 꿈꾸고 원합니다.

그런 현실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인생역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 인생이 오늘의 현실에서 역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몇 차례의 인생 역전의 기회가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오늘 저녁이 여러분의 인생역전의 기회라고 하신다면 어떻게들 하시겠습니까?

 

교회의 이름을 바꿀까 싶어요.

날마다 기적을 파는 교회라고...

만약에 그렇게만 된다면 아마 문전성시를 이룰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날마다 그런 기적의 현실 앞에 서 있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그 때를 제대로 몰라서 늘 놓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총독인 벨릭스 부부에게 복음의 도를 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무지한 죄인이 복음을 들으면 뭔가의 반응이 나오는 법인데 벨릭스의 그 반응이 참으로 답답합니다.

 

25절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성경에는 우리 사람들이 자주 하는 3가지 악한 말이 있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출16:1-3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 월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

 

기껏 애굽 땅의 노예생활에서 건져 놓으니까 다시 그 자리에 가서 배불리 먹고 사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심 찬란한 한탄이 가장 악한 말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 이러지 않습니까?

구원이나 천국은 나중의 문제고

지금 당장은 목구멍에 풀칠하고 애새끼들을 남들 못지않게 키우겠다는 것이 다 그런 문제입니다.

뭐 큰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니고 월세만 면하고 살면 좋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까지도 내려놓겠다는 겁니다.

아니 아예 내려놓겠다는 것은 아니고 잠간 동안만 내려놓겠다는 겁니다.

이번만 잘 넘기고 그 때는 제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 큰 잘못이라고 오히려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다.

종교를 바꾸겠다는 건 아니니까 너무 야단하지 마시라는 겁니다.

 

또 한 가지의 악한 말이 있습니다.

 

막10:17-22절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기껏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계명을 다 지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가장 결정적인 대목은 전혀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여전히 자기 한계에 이끌려서 사는 겁니다.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뜻의 한계를 자기가 결정해서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 일은 사는 동안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묻지나 말지 묻는 의도가 도무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자기의 한계 안에서 뛰어나올 생각은 전혀 없으면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고 사는 겁니다.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기의 의가 무척이나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벨릭스 총독의 말이 베스트 3에 역시 속하는 말입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라고 하는 말입니다.

나중에 믿겠다는 겁니다.

오늘은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겁니다.

 “틈이 있으면” 이라는 이 가정을 요즘의 우리도

너무 자주 쉽게 천연덕스럽게 들어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 우리의 불신앙이 가장 강력하게 들어 있는 겁니다.

왜 그렇게 판단을 하게 됩니까?

벨릭스 총독은 결국 사도 바울을 계속해서 부르기는 합니다.

그런데 그 부르는 의도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습니다.

벨릭스가 틈을 이용하기는 했는데 그 의도는 세상적인 이유였습니다.

 

26절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 하더라”

 

사도 바울에게서 돈을 바라고 계속해서 사도 바울을 부르는 것입니다.

설마 사도에게서 무슨 돈을 바랄 것이 있나 싶지만

사도 바울에게는 그럴만한 돈이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돈이 있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아시아의 교회들이 연보한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 돈을 어떻게 받아볼까를 벨릭스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사도에게

그것도 고소를 당해서 억울하게 옥에 갇힌 사도에게 돈을 바랄까 싶지만

그게 벨릭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의 문제 아닙니까?

 

뭔가 얻어먹을 것이 있어야만 나오는 겁니다.

하다못해 말씀이 은혜롭기라도 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성경적인 요구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선포되어 지고 있고

그것에 대한 영혼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애써서 무시하고 그저 늘 내 필요와 만족과 기쁨을 위한 요구만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더 급합니다.

먼저 내 문제부터 해결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한결같은 태도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오늘을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늘 내가 주인이 될 수 없는 내일만을 핑계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내일로 다 미뤄두고 오늘은 내 원하는 대로만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씨를 먼저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텐데

씨는 뿌릴 생각도 하지 않고 열매를 거둘 때만 참석하겠다는 겁니다.

오늘은 비록 뿌리지 못하지만 내일은 오늘의 몇 배로 다 갚겠다는 큰소리만 치는 겁니다.

 

오늘 뿌리는 것과 내일 거두는 것을 완전하게 분리해서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뿌리는 것이 곧 내일 걷는 것입니다.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이 곧 내일입니다.

뿌리는 것 따로 거두는 것 따로 가 아니라 뿌리는 것이 곧 거두는 겁니다.

오늘이 없는 내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내일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곧 내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저 오늘만 주어진 것입니다.

 

눅12:17-21절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내일은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어리석은 생각은 내일은 아니더라도

그 때까지 만이라도 나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잠간만이라도 살아보겠다는 겁니다.

 

살전 5:16-18절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잘 아시다시피 이 말씀은 명령형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 존재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기뻐하는 존재이고,

기도하는 존재이며,

감사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다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런데 그 특권은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고 있는 겁니다.

잠시라도 중단하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존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중단되는 일이 없는 그런 인격체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설프게 세상의 것을 핑계하고, 내일의 것을 핑계하면서

오늘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이 곧 이 죄악된 세상에서 거룩을 유지하는 성도의 본분입니다.

 

너무 많은 성도들이 세상에서의 욕심 때문에 이 거룩을 잃어버렸습니다.

덕분에 물질은 많이 가졌고 잘 살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도다운 맛은 다 사라졌습니다.

때문에 성도로서의 특유의 포근한 맛이 없어졌습니다.

세상보다 더 심하게 발톱을 세우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교회와 이웃을 향해서 으르렁 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의 것으로 가득 채우려고 해서 여전히 세상의 눈치나 살피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만 합니다.

먹고 살 걱정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하나님의 영역인데

여전히 내가 품고 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조차 뒤로 미루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나중에 잘하겠다고 하면서

오늘은 여전히 내 욕심의 그늘 속에 숨어 지내고 계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내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세상 눈치 보면서 어리석게 소비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당당함을 가지고 내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 찾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청지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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