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익히 잘 알다시피 사도 바울의 생애는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 보고 있는 본문의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도
그는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자세 이외에 다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금 자기를 위한 시간을 먼저 가지고 나서
그 다음에 복음을 위한 시간이나 삶을 드려도 될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삶의 자세는 여전히 한결 같습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고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사명적인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되겠다고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도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한다고 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이 사명 의식이 우리에게도 잠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예수 믿자고 하고 교회 나가자고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그렇습니다.
마치 그 말을 하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입에 달고 삽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전도를 조금만 했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을 하면
이제 그가 하는 전도의 방법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져 버립니다.
고구마 전도니, 진돗개 전도니, 젓가락 전도니, 이슬비 전도니 하는
별의별 전도의 방법론들이 등장을 하고 넘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전도가 삶이 아니라 기술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열심은 아주 뜨겁게 있고 전도의 결과라고 하는 있는데
그것이 몽땅 다 소개꾼의 일이요, 거간꾼의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어쨌거나 사람만 많이 모이고 구원만 많이 받으면
그것이 다 능력이요, 은혜가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오늘 한국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뭡니까?
성도의 영혼 하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히 내 교회를 채워주고 헌금을 해주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도의 삶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 영역 안에 들어온 내 노력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때문에 내 양이 어디 다른 교회나 목사에게로 눈을 돌릴까 싶어서
성도를 감시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잘 길러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귀하게 사용이 되고 쓰임이 되는 충성된 일군으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 교회의 울타리를 떠나지 않고 여기에서만 충성하는 일군으로만 키우려고 할 뿐입니다.
내 교회 공동체 안의 성도들은 절대로 다른 교회로 가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남의 교회에서 자라다가 내 교회로 오겠다고 하는 성도들은 아무 주저 없이 받아들입니다.
논리가 이율배반인 것입니다.
내 교회 교인들을 남의 교회에 보내는 것은 안 되는 것이고,
남의 교회 교인들이 내 교회에 오는 것은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들어 한국교회에 부쩍 나타나는 모습이 어떤 것입니까?
교인의 수평 이동현상입니다.
이건 좋게 말하는 것이고 양들 빼앗기 전쟁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교회만 채우면 성공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기존의 성도들은 또 어떻습니까?
자기 기분 맞춰주는 곳으로만 몰려갑니다.
심지어는 아예 그룹을 지어 다니면서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꼴통들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는 어떤 것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전도는 방법론이나 기술론이 아닙니다.
단순히 교인들의 이동이 아닙니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대위임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가장 큰 사명입니다.
그런데 잘 보시면 전도하라는 말씀 대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를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자는 어떻게 삼습니까?
가르쳐서 삼습니다.
무엇으로 가르쳐서 삼습니까?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함으로 가르쳐서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으로 증거 되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 된 삶입니다.
사랑하기에 필요한 것은 뭡니까?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이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이
곧 누구나 다 제자를 삼을 수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서의 문제는 분명하게 열심히 전도를 하는 것 같은데
그 전도를 하는 사람이 전도를 받는 사람에게 미더워 보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로 데리고 가려고는 하는 그 열심은 좋지만
스스로 교회를 따라 나가고 싶은 인격이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목사요, 기독교인인 제가 봐도 전도를 열심히 한다고 하는 분들 치고
고매한 예수의 인격을 갖고 있는 분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본질을 갖고 사는 것이 성도요, 하나님의 백성인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걸핏하면 성령의 능력을 자랑하고 목소리는 걸걸걸 한데
도무지 사랑을 해줄만한 구석이 안 보이는 것이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예수 믿는 이 엄청난 은혜와 감격을 가지고
고작 해서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구분하고 편 가르는 것에 도구가 되고 있을 뿐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구원의 은혜를 갖고도
옳고 그름을 가리고 정당한지 부당한지를 판단하고 살 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한 번 보세요.
그가 전하는 복음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겨우 듣는 소리가
‘너 미쳤구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입니다.
사실 열심히 복음을 전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사도 바울의 입에서 좀 더 강한 메시지가 나가야 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을 보세요.
여전히 목소리를 바꾸지 않은 채로 복음으로 권면을 할 뿐입니다.
행여나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에게 저주의 소리를 할까 싶어 오히려 더 조심하는 모습입니다
.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복음은 자신을 단순히 유대교를 믿는 사람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으로 바꾼 정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받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자기를 통해서
누구에게도 왜곡되지 않아야 하겠다고 하는 자기 자신의 변화가 먼저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 대해서 무식한 충성으로 가득했던 이전의 사울이 아닙니다.
온전하게 인격이 변화해서 빛과 소금으로서의 본질과 존재에 서있는 사도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나 사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온전한 신분의 변화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감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자기 자신이 속한 신분으로서의 운명입니다.
이건 그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겁니다.
예를 들기에는 좀 그렇지만
이건 마치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일본을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겁니다.
뭘 내게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그냥 싫은 겁니다.
그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뭘 더 바라고 원하고 누리고 싶어서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빛에 속해 있는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드러나는 것일 뿐입니다.
당연하게 드러나는 빛의 결과로서의 전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는 수단과 방법이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사랑의 삶이 나타나고 드러나야 하는 겁니다.
엡 5:8-9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니까 당연하게 빛의 열매가 나타나는 겁니다.
빛의 자녀가 아닌데 나타나는 열매는 빛의 열매가 아닙니다.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 행함의 모든 근거나 기본은 언제든지 사랑입니다.
사랑이 기본에 깔려 있어야만 합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사랑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결코 일의 결과나 능력으로 따지질 않습니다.
‘이건 잘못이고 어긋난 일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할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해줘야만 할 자세만 가질 뿐입니다.
사실 설교를 하는 저도 예전에는 이걸 잘 몰랐습니다.
그저 목표가 우선이고,
결과가 우선이고,
능력이나 실력을 뽐내는 것으로 우선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언제든지 사랑이 우선입니다.
사랑이 언제든지 이깁니다.
현재는 정의가 이기는 것 같고 옳은 것만이 바른 길인 것처럼 생각이 들지만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뭘 하셨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우리더러도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존재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나타내고 있는 자세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명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억울함과 원통함과 모든 고통 속에서도 그는 결코 흥분하지 않고 오히려 태연한 것입니다.
자기가 억울하고 힘들고 아프고 말지
결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결과가 어떻습니까?
이 원수들이 오히려 놀라는 겁니다.
이렇게 억울한 사람이 어찌 이렇듯 부드럽고 따스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자신이 옥에 갇힌 형편이면서도
어떻게 자기들을 위해서 이렇게 말을 해 줄 수 있느냐고
감동을 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32절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더러 일러 가로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더라면
놓을 수 있을 뻔 하였도다 하니라”
자기들이 보기에 사도 바울은 무죄라는 겁니다.
세상이 사도 바울을 인정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마음이 있는지를 돌아봐야만 합니다.
원수들한테까지도 쉽게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성도된 마음,
세상의 빛과 소금된 모습이
내게도 있기를 바라고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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