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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스도의 호의 / 행25:1-12 (신230쪽)

오늘 사도 바울은 지금 무려 2년을 별로 하는 일 없이 옥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총독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도 하지만

눈앞에서 드러나는 효과적인 일은 전혀 없는 채로 2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가지고 있는 아니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효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바울의 지금 2년은 그의 생애에서는 전혀 무가치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사도 바울에게는 2년의 공백이 필요했을까요?

차라리 재판을 빨리 받고 죄인의 삶을 끝내든지

아니면 더 뜨겁게 나서서 복음을 전하든지 하는 것이 훨씬 더 삶의 보람이 있는 일일 텐데

왜 그런 일은 없었을까요?

 

그러나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저도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그에 대해서 전혀 그 어떤 설명도 하질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가 되는 것은 뭡니까?

 

오늘 우리들의 형편과 처지에 사도 바울의 입장을 대입해보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으니까

오늘 우리들의 시간도 결국 무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은혜입니다.

아전인수격의 해석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눈물 나게 기도하는 왜 내게 아무런 응답도 하시지 않는가?’ 라든지

‘우리 나무목교회를 세우셨으면서도 도대체 왜 부흥의 가능성도 보여주시지 않는가?’ 라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의문과 생각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사도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는 그냥 그 시간을 가만히 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호흡하고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장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뭘 해야만 합니까?

충분한 자기 실력을 쌓아야만 합니다.

기본기를 다져야만 합니다.

체력훈련을 해야만 합니다.

프로 운동선수들은 운동시즌이 끝나면 절대로 그냥 놀지 않습니다.

다음 해의 운동을 위한 개인적인 준비를 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겁니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하던 그도

개인적으로 사역에 관한 준비의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당시 세계 최고의 군대인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쉬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심하고 쉬었겠습니까?

 

어떠십니까?

충분히 쉬고 계십니까?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참는 스타일의 민족입니다.

그러나 참으라고 할 때는 참고 쉬라고 할 때는 쉬어야만 합니다.

삶이 며칠 안 남은 사람처럼 너무 조바심내지 마세요.

평생을 걸쳐 가는 삶이어야하고 대를 이어가는 삶인 것입니다.

 

 

그 2년의 휴식 다음에 베스도라고 하는 새로운 총독이 등장을 합니다.

베스도는 부임하자마자 예루살렘 성을 찾아 갑니다.

아마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이 통치할 때의 협조를 부탁하려 했을 것입니다.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것입니다.

베스도의 부임을 반긴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유대교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오랜 숙원인 사도 바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사도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재판을 해달라고 베스도 총독에게 청합니다.

물론 재판은 핑계일 뿐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바울을 중간에서 암살하려는 계획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 바울의 가이사랴에서의 2년 휴식은 결코 공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베스도의 호의를 바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정 정도는 로마 총독인 베스도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권력을 가진 로마 총독 베스도가 전혀 뜻밖의 결정을 합니다.

 

 

4-5절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미구에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가로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송사하라 하니라”

 

예루살렘으로 사도 바울을 데려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을 고소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자기와 함께

바울이 지금 머무르고 있는 가이사랴로 가서 재판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을 유대인의 손에 못 내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에 대한 재판을 가이사랴에서 할 테니까 송사할 말이 있거든 거기서 하라는 겁니다.

사실 이보다 더 나은 호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베스도는 분명히 사도 바울의 편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편에 선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인들의 마음을 붙들어야만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로마 총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을 드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있다는 겁니다.

바울에게 맡기신 사역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로마 총독의 지위까지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라고 다르겠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이 충분하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의 양에 충분하게 차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일들을 해가고 계십니다.

쉽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때까지 계속해서 음으로 양으로 도우십니다.

절대로 망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오늘의 형편과 처지가 어려워진다고 하더라도 크게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죽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죽으면 천당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면 그 어떤 경우에도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의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보세요.

사실 로마 총독인 베스도는 자기가 하나님께 사용되고 있다는 의식조차도 없습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에게 대한 유대인들의 마음과 생각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유대인의 마음에 들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미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죄도 없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자기의 지위가 로마 총독이기 때문입니다.

로마 총독은 절대 권력이면서도 식민지 국민들의 원성을 사면 안 되는 겁니다.

본국 로마 정부의 추궁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무죄를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합법적인 과정을 거쳐서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려고 합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 역시 자기에게 부여된 합법적인 권리를 사용합니다.

 

그 권리가 뭡니까?

그가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은 로마의 가이사 즉 황제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로마 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자 하는 로마 총독의 호의를 통해서

사도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로마시민이라고 하는 권리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권리는 합법을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욱 합법화가 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바울의 주장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결과를 낳습니까?

그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로마를 가게 되는 것입니다.

 

12절 “베스도가 배석자들과 상의하고 가로되 네가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니 가이사에게 갈 것이니라”

 

가이사에게 가서 재판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가이사는 로마에 있으니까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게 될 것입니다.

 

로마가 어떤 곳입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싶어 하던 곳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하신 곳이기도 합니다.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곳을 드디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서 가는 겁니다.

결국 베스도가 베푼 호의가 유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끝내는 사도 바울을 위한 것이 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은혜가 뭡니까?

누가 그렇게 바꿔 주셨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겁니다.

 

때문에 우리도 현재 겪고 있는 모든 환경과 상황과 형편에 대해서 너무 비관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역전이 가능합니다.

한순간에 다 뒤바뀔 수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좋은 것이든지 나쁜 것이든지 하나님께서 정하고 사용하시기만 하면

그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변화가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형편이나 환경이나 처지 여부에 관계없이 일단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하시고자 하시면

그 어떤 장애물도 능히 다 해결하시는 하나님이신 겁니다.

 

때문에 총독 베스도의 호의 같은 현실에 주눅들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가능하신 하나님의 고집이 우리를 작품으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결코 오늘이 전혀 하는 일 없이 허송세월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넋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현실과 환경과 싸우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릴 때 이용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뭡니까?

 

엡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골 4:5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까 지혜롭게 행해서 세월을 아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차분하게 기다리면서 오늘의 시간을 내 인격과 영혼을 살찌우는 것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러면 사도 바울처럼 충분히 여유를 누리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쓰임을 받는 귀한 성도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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