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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신히 다니지만 / 행27:1-8 (신234쪽)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소원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는 작은 바람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최소한 이 정도까지는 해주셨으면 하는 겸손함이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행해주시는 일은 거기에 훨씬 더 못 미칠 뿐만 아니라 

아예 정반대로 어려움만 더 가중될 때가 훨씬 더 많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따지게 될 때도 있습니다. 


뭐 그런 갈등이 전혀 없는 채로 신앙생활을 하셨다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해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적이 없는 것이 우리들 모두입니다. 

하다못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1/5 정도만 참석하는 수요기도회를 나올 정도가 됐다면 

이 때라도 좀 남들보다는 넉넉한 은혜를 주셔도 좋으련만 

그런 일은 죽었다가 깨어나더라도 없다는 겁니다.



오늘 사도 바울을 한 번 보세요.


사도 바울이 이 정도로 산다고 하는 것은 

좋거나 싫거나 밉거나 예쁘거나 관계없이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가만 보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제대로 도와주시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겨우겨우 살아나서 간신히 다니게 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의 각오는 어느 정도입니까?


롬14:7-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 얼마나 멋진 신앙입니까? 

그러나 문제는 손뼉도 마주쳐야만 소리가 나는 것인데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이런 각오와 다짐의 신앙 앞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자는 것인데 

정작 당사자이신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하나님의 무반응이야말로 

오늘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는 것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식당 개도 삼년만 생활을 하면 라면을 끓이는 정도까지의 실력이 된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수십 년을 그것도 대를 이어서 하고 있는데도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늘 그저 답답한 듯 억울한 듯 그저 그런 듯의 무기력한 신앙생활만이 무한 반복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내 자신은 새로운 전기를 가져본다고 이런저런 변화를 주어도 보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신 겁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나가야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무관심과 무응답으로 인해서 무력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 대표적인 것은 우리 인생의 디테일한 부분에 까지 많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 인생 전체를 두고 조각을 해나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살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가만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도 바울의 걸어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곰곰 생각해나간다면 

누구라도 이건 머리가 돌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부분이나 정점에서 뭔가 되어간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일들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그 자체가 이미 고난입니다. 

뭔가 기대하고 기약을 할만 상황이 눈에 들어 온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껏 2 년여의 가이사랴에서의 감옥생활을 뒤로 하고 

이제 기대하고 기다리던 로마로 가는 길입니다. 

물론 로마로 가는 것 역시 사도 바울의 고집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런데도 로마로 가는 길이 조금도 만만하질 않습니다. 

배 한 번만 타고 건너갈 수 있게 해주시질 않습니다. 

처음에는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를 타고 가는 겁니다. 

이 배는 아마 화물선으로 생각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배로 곧장 로마의 땅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이사랴에서 떠나서 시돈에 이르고 루기아의 무라 성에 이릅니다. 

거기서 다시 로마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타게 됩니다. 

거기서 니도 맞은편으로 가서 그레데 섬의 해안을 따라서 가다가 

미항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에 나타난 로마로 가는 항해 일정입니다. 


물론 아직 로마에 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물론 당시의 교통편의 문제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의 일정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챙겨주시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하나가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일일이 다 스스로 해결해나가야만 하는 어려운 과정입니다. 

그것도 자유로운 신분도 아니고 죄인의 몸으로 구속되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은 부정적이어야만 옳습니다. 


우리하고 비교해보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순탄하지 못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가진 자세는 감사보다 원망 불평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불평하질 않습니다. 

성경에는 사도 바울이 가진 불평의 그 어떤 흔적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요?


사도 바울은 자기 인생 전체를 두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살고 있고 걷고 있는 일정 하나하나의 하나님이 아닌 

자기 인생 전체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의 형편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늘 무덤덤할 뿐입니다. 

다만 오늘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고 사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자기 살길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보다 훨씬 더 큽니다.


갈 1:11-17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사도 바울은 자기 어머니의 태로부터 자기를 택정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관념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관념적인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겁니다. 

철저하게 자기의 삶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는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실 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더 나아가서는 창세전부터 택하셨기 때문에 

내 인생 전체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겪고 있는 이런저런 사소하고 잡다한 것들에 대해서 크게 연연해하질 않습니다. 

인생 전체를 두고 보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교통수단의 문제나 풍랑의 문제에 전혀 신경 쓰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향과 목적을 갖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37:37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화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결국은 평안입니다. 


우리 길의 끝에는 언제나 평안만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은 간신히 살고 있고 억지로 다니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들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사는 겁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든지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나 혼자만 살라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같은 삶으로 살아가는 내 이웃들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에게도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누가라고 하는 의사와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가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나 혼자만 가면 어렵고 힘들겠지만 함께 같은 길을 가도록 우리가 있는 겁니다. 

때문에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 좀 더 풍성해야만 합니다. 

아무리 내 눈에 별 볼일 없이 보이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내가 그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롬 8: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착순으로 달려오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전체가 다 늦어지더라도 함께 오는 것을 원하십니다. 


신앙생활은 절대로 경쟁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겁니다. 

함께 보조를 맞추고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누구하고도 비교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히려 다 함께 껴안고 가는 겁니다. 

우리는 서로 비교하고 판단하고 은근히 경쟁을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 그러시질 않으십니다. 


사실 우리끼리 경쟁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다 똑같은 겁니다.

다만 우리 사람들끼리 공연히 쓸데없이 우열을 정하고 잘난 척을 할뿐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공연히 기 죽거나 교만할 거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가나 아리스다고가 사도 바울보다 못하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목사나 권사나 집사나 아니 그냥 청년이라도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다 같이 값진 것입니다.


겨우 목숨이나 붙어서 간신히 선교를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도 바울의 모든 형편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충분히 하십니다. 


우리 나무목교회나 성도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충분히 모든 것을 다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간신히 월세나 내고 살뿐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한 일 앞에 충분히 쓰임을 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 은혜를 기대하시면서 오늘도 자신 있게 서로를 격려하고 섬겨주면서 

믿음의 선한 걸음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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