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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의 구원 / 행27:27-44 (신235쪽)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참으로 다양한 길이 있고 

또 그 길속에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남의 삶에 대해서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고 충고를 하고 권면을 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간혹 의문이 드는 것은 그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러면 

과연 자기들의 삶을 자기가 남에게 충고하고 권면하는 대로 제대로 살고 있을까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신앙생활입니다. 

내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결코 실패하지 않게 하시고 

반드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믿고 사는 겁니다. 

모든 근거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나한테 근거가 없다는 것은 내 형편 처지 환경 상황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조금만 뭐가 변해도 난리가 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원래 내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닌데 

무슨 일만 나면 그새 내 실력으로 살고자 하는 자세와 태도가 튀어 나오게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한숨도 많고 눈물도 많고 사연도 많고 탈도 많은 겁니다.



그런 면에서 비교해 보자면 사도 바울의 오늘 본문에서의 모습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원래 뱃사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수 믿기 전에도 율법에 대한 공부만 했던 사람입니다. 

그 말은 현장감이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이제 배의 모든 것을 다 지휘하는 겁니다. 

백부장을 비롯해서 선장과 선주가 또 선원들과 군사들까지도 

이제 몽땅 다 사도 바울의 지휘 아래 움직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시면 알겠지만 

사도 바울이라고 해서 지금 이 배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배 전체를 지휘할만한 믿음과 실력으로 서 있게 되어 있느냐는 겁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떤 것이기에 

이토록 남들보다 훨씬 더한 믿음의 모습으로 서있게 되느냐는 겁니다. 


그와는 반대로 왜 오늘 우리들은 그렇게 되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대표적으로 인용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행16:29-32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주 예수를 믿으라” 를 믿으라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 예수를 믿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보실래요?


막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이나 예수를 믿는 것은 다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라는 측면에서의 구원은 어떤 의미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되 세상의 힘을 빌려 사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힘과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과는 가는 방향이 전혀 다르고, 사는 내용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딴 판으로 사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겁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은혜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은혜가 이 세상의 것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바로 오늘 사도 바울과 우리들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차지하고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내버렸습니다. 

이건 단순히 새 것을 가졌기 때문에 전에 사용하던 것은 내버렸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예수 알기 전에 가지고 알았던 모든 것을 다 내버려야만 하는 것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싸고 나면 다시는 찾지 않을 배설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배설물을 차지하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동원해서 들이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것에만 목숨을 걸고 사는 겁니다. 


때문에 조금만 삶이 어려워지거나 피폐해지면 세상 자체가 망한 것처럼 되어 버립니다. 

고난이니 질병이니 아픔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마음을 다 내어줍니다. 

롯의 아내처럼 세상을 향해서 뒤를 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상 속에 푸욱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렇게 표현을 하면 우리가 뭔가 큰 건수를 생각할 때나 세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빠진 게 결코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아주 사소한 건데 뭐.’라고 생각들을 합니다. 


이런 생각이 어떤 생각을 낳느냐면 

더 어려운 일 앞에서는 자기도 영적으로 해결을 잘 할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오늘 모습을 내 삶에 투영하거나 반영하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지금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큰 건수에 대해서 

믿음으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을 이런 큰 믿음의 소유자라고 아예 재껴 놓고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큰 건수에만 빠지는 것만 세상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의외로 우리가 빠지는 세상의 늪은 그렇게 크거나 아주 중대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빠져드는 시험의 대부분이 다 뭡니까? 

간단하고 사소하고 작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큰 내용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하고 기본적인 것입니다.


33-38절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을 음식 먹으라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저희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 칠십륙 인이러라 배부르게 먹고 

밀을 바다에 버려 배를 가볍게 하였더니”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불었다고 해서 엄청나게 큰 문제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저 폭풍이 치는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겁니다. 

밥 굶은 것이 이들의 가장 큰 문제인 겁니다. 


사도 바울의 입에서 구원을 이야기할 만큼 엄청난 문제는 

이 사람들이 여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의 시험이 다 이런 겁니다. 

나한테 있는 시련이나 아픔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문제인 것 같고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따지고 들면 밥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아니 그럼 밥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냐고 물으시겠지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 가지고 살기에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걸 분명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밥 먹고 사는 문제에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고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밥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을 다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자기를 어설프게 죽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의 차이는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먹고 사는 것에 더 강한 집착과 욕심을 내지만 

사도 바울은 사명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결코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 크게 영향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 있어서 크게 영향 받지 않는 삶을 가리켜 

믿음의 삶이라고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건 뭐 새삼스러운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굳이 말씀을 읽어드려야 할까요? 

같이 한 번 읽어보실래요?


마 6:25-34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여기에서 핵심이 뭡니까?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필요한 것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데 

어찌 우리가 먼저 걱정하고 염려하고 나서서 해결을 하려고 하느냐는 겁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14일 간의 고통을 누린 것입니다. 

염려했더라면 14일 동안 굶었겠습니까? 

전혀 그럴 수 없지요. 

아무리 폭풍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차려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풍랑의 고통을 즐긴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미 빠진 고통입니다. 

스스로 해결을 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차라리 푸욱 빠져서 즐기는 것이 훨씬 더 귀한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즐기는 누리는 감사하는 시간만 남아 있습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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