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귀하게 생각되는 믿음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의 계획안에 두고 이끌어 가심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삶의 곳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를 갖고 덤벼드는
수많은 고난과 난관과 역경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심을 확신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믿어지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지만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서는 오히려 어려움만 더 가중되기 때문에
그 믿음이 신실하게 유지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한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라라고 하는 대풍을 만나서 피하게 되는 그런 내용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배는 당시 애굽에서 이탈리아의 로마로 곡물을 싣고 가던 수송 화물선입니다.
이 배에 로마의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타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배의 승무원이나 승객이 아닌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됩니다.
가만 따져 보면 이 배의 모습이 바로 오늘 이 세상의 모습과도 똑같습니다.
이 배 안에 지금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타고 있을까요?
곡물을 싣고 팔아서 큰돈을 벌어 가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손가락질을 많이 받는 죄수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들을 호송하는 임무를 지닌 군사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갖가지의 생각과 현실과 꿈으로 가득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지금 다 알렉산드리아의 배에 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들 중에 누가 가장 영향력이 컸습니까?
물론 처음부터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을 로마로 호송해가는 백부장 율리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배에서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권력자입니다.
때문에 죄수인 사도 바울의 이야기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질 않습니다.
9-11절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이미 날짜가 상당히 지나버려서 바다를 항해하는 것에 어려움이 더 많은 때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냥 미항이라는 곳에서 겨울을 지내고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가진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사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은 것입니다.
사실상 선장과 선주는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하루라도 더 빨리 항해를 마치고 화물을 운반하는 것에 대한 댓가를 받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그냥 빨리 마치고 돈이나 받자는 것입니다.
목적이 오로지 돈을 버는 것에만 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은 또 어떨까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빨리 사도 바울 일행을 로마에 데려가서 자기의 임무를 마치고 휴가라도 즐기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좀 더 미항에서 머무르다 가자고 하는 말이 귀에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세상이 듣던가요?
물론 하나님의 기준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면 듣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이 요즘 많이 약해져 버렸습니다.
뭔가 예수 믿는 힘이 사라진 것 같은 안타까운 느낌이 많습니다.
때문에 전도를 해도 뭔가 약합니다.
약하다는 말은 성경적인 기준에서가 아니라 다분히 인간적인 접근을 더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전도를 하는 방법론상의 차이라고 변명은 하지만 사실은 약해진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것을 온전하게 주장하지 못하고 은근히 세상의 기준과 방법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문화적인 접근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교회의 시설을 가지고 이런저런 문화적인 장소들을 만들어 놓고
세상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배당을 가진 교회에서 칼국수 장사를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예배당 턱을 낮추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하자는 겁니다.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으자는 주장에 있어서는 상당히 맞는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칼국수 먹으러 오고,
골프 치러 오고,
체력 단련하러 오고,
꽃꽂이 하러 오고,
공부하러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의 어디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부르라고 되어 있습니까?
사람만 많이 부르면 되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부르고 보라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목적이 사람을 많이 불러 모으는 교회가 되어 버리니까 방법이나 수단도 사람의 것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불러 모으는 곳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곳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에 관계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여기 어디 다른 소리가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워낙 세상은 복음의 소리를 안 듣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의 현실과 경험을 우선해서 살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야기는 묵살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미항이 겨울을 나기에는 좁다고 해서 뵈닉스라는 곳으로 가자고 결정을 해버립니다.
그 결국이 뭡니까?
아니 솔직히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배가 순풍을 만나서 아주 잘 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내 사정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보통 심각해 진 것이 아닙니다.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13-20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처음에는 남풍이 부니까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래서 섬을 가까이 두고 연안으로 항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섬의 중간 쯤 오니까 갑자기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배를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때문에 배를 줄로 칭칭 동여매고 그저 바닷물에 흘러가는 대로 갑니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났어도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질 않습니다.
해와 별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암흑이 계속되고 모두가 다 살 소망까지 없어진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뭡니까?
알렉산드리아 배보다 더 큰 구조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다와 배와 풍랑까지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때 필요한 것은 더 큰 배라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리 같은 성도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뭡니까?
이런 어려운 때는 하나님의 말씀과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누가 하고 있느냐면
하나님께 부여받은 사명을 가지고 로마로 가고 있는 사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것은
지금 풍랑을 만난 배 속에서 사도 바울의 처지가 남들하고 다르냐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다른 선원들이나 군인들하고는 전혀 다른 입장과 형편이 되어서
위로를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하는 말을 한 번 보세요.
21-26절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 하였더면 좋을 뻔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이것이 바로 세상과 함께 흔들려 살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을 향해서 해줘야만 할 소망의 말입니다.
목사나 되어야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의 속한 바” 입니다.
소속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이면 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위로요, 소망입니다.
세상은 지금 우리더러 이런 말을 해달라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바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이 말은
우리가 만약에 예수 안에 속해있으면 당연하게 나와야할 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처지가 남달라서 그렇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세요.
가장 큰 영향력으로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영력입니다.
우리도 이미 다들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분명하게 우리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계십니까?
혹시 아니라면 그 이유가 뭘까요?
혹시 세상과 같은 욕심으로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로마를 가고자 하는 것이
이번에 장사 잘 되고 근무 잘하고 좀 더 편하게 사는 것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존재가 이미 빛과 소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영향력은 꿈도 꿀 수 없는
안타까운 지경과 처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만 합니다.
내 소속을 다시금 확인해봐야만 합니다.
충분히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내가 속해 있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품이요, 하나님의 자녀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이 어둡고 혼탁하고 어렵고 힘든 세상살이 속에 살아가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충만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 놀라운 권세와 능력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무목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이 은혜에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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