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로마를 향해서 가고 있는 사도 바울의 입장을 한 번 생각해보면
그의 로마 여행길이 그렇게 즐겁거나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죄수의 입장으로 로마를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 재미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은 이미 상당한 지휘권을 부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전 주에 다 알아본 것처럼
그는 죄수이면서도 로마로 가는 배의 모든 지휘를 책임지고 있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은혜가 뭡니까?
역시 예수님의 말씀은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28:18-20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 계시는 겁니다.
아울러 우리도 이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과 우리가 그 보내심을 받은 것에 있어서
영적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로마로 가는 배의 지휘권에 대한 문제도 그렇지만 오늘 본문 같은 내용은 더욱 그렇습니다.
본문의 내용이 뭡니까?
사도 바울 일행-이제는 아예 사도 바울 일행이라고 표현을 해도 좋을 만큼
그 주도권이 분명히 사도 바울에게 있습니다-이 멜리데 섬에 들어가서 있었던 일입니다.
크게 두 가지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사도 바울이 나무로 피운 불에다가 나뭇가지를 집어넣었는데
거기서 독사가 나와서 사도 바울을 물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이제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뱀을 털어서 불에 던져 넣어버리고 조금도 다친 곳이 없습니다.
때문에 그 섬의 토인들이 사도 바울을 가리켜 신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섬에 제일 높은-아마 추장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보블리오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열병과 이질에 걸려서 누웠는데 바울이 안수기도를 해서 낫게 해줬습니다.
사실 열병과 이질은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봐서는 그냥 아무 손도 못쓰고 죽게 되는 불치의 병입니다.
그런데 살아났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섬의 아픈 사람들이 다 바울에게서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시 배가 출발하게 되었을 때에 그 섬의 사람들이 사도 바울 일행의 먹을 것을
빠짐없이 챙겨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 배에는 아무런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모든 먹을 것을 다 내버렸기 때문입니다.
독사에게 물렸어도 살 게 된 것과
모든 병든 자를 다만 안수해서 고친 것,
이 두 가지만 생각을 하더라도 이미 우리와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우리가 만약에 독사에게 물렸다고 생각해보세요.
살아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안수해서 기도한들 병든 자들이 벌떡 벌떡 일어납니까?
우리 생각이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여전히 아픈 사람들이 있고,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은데도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전혀 응답이 없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렇게 분명하게 역사하셨는데도 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도 바울한테는 도무지 쨉도 안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사도 바울이나 우리나 동일한 것인데
어떻게 이런 차별과 구분이 있을 수 있습니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런 차이가 나타날까요?
이것이 사도 바울과 우리들 믿음의 수준차이일까요?
아니면 보이지 않는 어떤 한계가 이미 그어져 있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끊임없이 남들과 나를 비교해서
그로 인한 우월감 또는 열등감을 갖고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회학자들이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살기 좋도록 만들어져 가고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남들과의 끊임없는 경쟁의식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누군가와 경쟁을 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상대적인 우월감과 열등감이 신앙생활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 신앙생활이 다른 이들과의 경쟁을 기초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교회와 교회가 경쟁을 하고,
구역과 구역이 경쟁을 하며,
성도와 성도가 서로 경쟁을 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심지어는 오늘의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옛 성도들과 경쟁을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은 성도의 신앙을 본받고 그 삶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은근히 나도 너처럼 할 수 있다고 하는 경쟁구도 속에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어디서 그런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까?
세상은 그 때마다 세상을 움직여가는 유행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60년대의 유행이 있고, 7-80년대의 유행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의 유행도 있습니다.
그런데 유행이라는 것이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남에게 지지 않고 싶어 하는 경쟁심 때문입니다.
누가 뭘 입었다고 하면 우르르 다 그 옷을 따라 있습니다.
그것이 유행이 되는 겁니다.
남에게 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곧 유행입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뽐낸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자기만의 개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인구가 도대체 얼마입니까?
여태 살아갔던 사람들은 또 얼마입니까?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가 옛날에 다 했던 겁니다.
때문에 세상 모든 권세를 다 휘둘러보았던 솔로몬이 말년에 고백하는 말이 뭡니까?
전 1:9-11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오래 시간 전에도 이미 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경쟁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보세요.
신앙 안에서도 얼마나 많은 경쟁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누가 뭘 어떻게 해서 잘 되었다 싶으면 다들 그 쪽으로 달려 가버립니다.
지금 교회 안에, 기독교 안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독소들이 들어와 있는지 모릅니다.
때문에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어서 교회와 기독교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렇게들 주장하고 있는 근거와 내용들이 다 뭡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일어나고 나타난 이런 기적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에 나타난 훌륭한 신앙인들을 본받는다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삶을 본받는 것은 그가 나타난 기적과 이사와 표적들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이 행한 기적들이 사도 바울이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역에 속해있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단지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신 일일뿐이지 결코 사도 바울 스스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그런 일을 우리 스스로 직접 다 행하려고 합니다.
그런 기적만 쳐다보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도 사도 바울처럼 능력을 받으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다는 속담과 같은 겁니다.
아무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그런 능력들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의 이런 기적에서 우리가 쳐다보고 바라 볼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 바라볼 것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우리들에게 맡기실 때는
언제든지 죽지 않을 만큼의 은혜와 사랑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 로마를 가라고 하신만큼
로마에 갈 때까지는 어떤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도 지켜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아무리 풍랑이 오고 독사가 물고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지경까지 가더라도
하나님의 은밀히 도우시는 은혜로 인해서
사도 바울의 사역은 절대로 중단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주변의 눈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만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하고도 경쟁하질 않습니다.
경쟁하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만으로
자기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겨우 죽지 않을 만큼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전혀 불평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현실 속에서 많은 갈등을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다 뭡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죽기로 각오하고 가는데도
하나님은 전혀 나를 돕지 않으신다는 좌절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아서 가고 있는데도 한 번도 하나님께서 흔쾌하게 뭘 해주시는 적이 없다는 겁니다.
남들은 다 잘 도와주시면서 왜 나만 힘들게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힘든 것으로 말하자면 사도 바울만큼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우리처럼 결코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에게 사명을 주시고 사역을 시키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결코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서 실패하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바울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고 시작하신 분이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 내게 일을 맡기신 분의 문제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내가 오늘 금방 죽을 것 같더라도
내게 이 일을 맡기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절대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만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게 일을 맡기신 분의 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내게는 사도 바울이 행하는 것과 같은 기적이 없느냐고요?
그런 기적이 없어도 하나님은 내게 맡기신 일들을 충분히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충분히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고 원하고 바라고 있는 기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충분히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환경 속에서 남과 비교하는 나를 볼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당신의 모든 하나님의 모든 계획 속에 밀어두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독사에 물려서 낫게 되는 기적이 뭐가 좋습니까?
차라리 안 물리게 하셔야죠.
멜리데 섬의 사람들로부터 식량을 제공받는 것이 뭐가 좋습니까?
처음부터 풍랑을 안 겪게 하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에게도 언제든지 죽지 않을 만큼 역사하신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살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도록 죽지 않을 만큼 주십니다.
그 은혜의 마음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행복하고 감사하고 즐겁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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