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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 도착 / 행28:11-22 (신236쪽)

사도행전도 거의 다 왔습니다. 

길게 걸어온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 길의 수많은 이야기에 비하자면 

사도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고 난 다음의 이야기는 정말 허무하게 결론짓고 맙니다. 

우리식의 사고와 생각이라면 

시작이 좋았으면 결론도 좋아야만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로마를 오고 싶어 했는데 정작 와서는 그렇게 심각하게 몰입하면서

사역을 감당하지는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로마 시민권을 강조하지 않았더라면 

사도 바울이 로마까지 죄수의 몸으로 올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미 그는 풀려나서 여전히 소아시아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좀 더 소아시아 지역에 몰입을 했더라면 

지금 소아시아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소아시아는 기독교 국가가 전혀 없습니다. 

전부 다 이슬람국가로 변신해 있습니다. 

복음을 제일 먼저 받아들였던 이방 나라들이 

이제는 복음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나라들이 된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복음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나라들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배경에는 기독교의 잘못이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만 

엄청난 능력이 있는 사도 바울이 초기에 더 힘써 소아시아 지역을 돌봤더라면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이 들만큼 로마에 와서 사도 바울이 한 일은 

지극히 미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한자어에 나오는 말이 있잖습니까? 

太山鳴動後 鼠一匹이라는 말입니다.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나서 보니 겨우 쥐새끼 한 마리 소리더라는 겁니다. 

그 만큼 뒤끝이 흐리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의 일을, 그것도 가장 능력 있는 사도라는 바울이 한 일이 

이처럼 가장 약하고 어리석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끝이 나는 겁니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도 바울을 부르실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오늘의 모습과 형편은 쉽게 짐작이 가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부르셔서 사도 바울로 세우실 계획이셨으면 

로마에 도착한 지금 최소한 로마의 황제 정도는 만나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17절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규모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 바 되었으니”


로마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중에 지체 높은 사람들을 만나는 겁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이 비록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에게는 언제든지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죠? 

일단 로마에 온 이유가 사도 바울이 황제를 만나서 재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판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는 고사하고 얼굴조차도 못 보는 겁니다. 

이렇게 해놓고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까? 

뭔가 화려하게 로마에 들어오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바울이 처한 지금의 처지나마 해결이 되는 기미가 보여야 되지 않느냐는 겁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지금이 유대인들을 만날 때가 아니라는 겁니다. 

솔직히 자기 코가 지금 석 자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만나는 유대인들의 성향이 그렇게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21-22절 “저희가 가로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고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 가 듣고자 하노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우리가 앎이로다”


한마디로 지금 이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귀찮은 존재들입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 도무지 아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속한 파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심하게 받는 단체라는 것은 아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이 도대체 뭐냐고 하는 

지극히 초보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 개인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겁니다. 


결론은 뭡니까? 

사도 바울은 죽을 때까지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는 겁니다. 

단순히 그것뿐입니다. 

로마에 올 때까지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다 쓸데없는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왜 이런 결말 쪽으로 사도행전이 가고 있느냐 하는 걸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렵게, 어렵게 로마에 도착해서 

왜 다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작되고 있느냐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좀 더 폼도 나고, 

또 그럴 듯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느냐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가 좀 넓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행적을 보면서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사도 바울이 만나게 되는 모든 문제마다 다 나서서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은근히 우상숭배의 개념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처한 입장과 형편의 해결만을 목적으로 만나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럼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어떤 일의 도구와 수단으로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까? 

역시 그렇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겁니다. 

아직 인격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장과 형편과 처지의 해결을 위한 분이 아니십니다.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는 도구로만 여기시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오늘 사도 바울이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로마에 도착해서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사역을 하고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롬12:2-5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오늘 처하고 있는 환경과 형편과 처지 속에서 여전히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품고 찾고 생각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이상이든지 현실이든지 관계치 않고 오로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분별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 입장과 처지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구분하고 사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로마에 도착한 사도 바울이 찾은 것입니다. 

여전히 그는 모든 형편 위에서 하나님의 원하시고 바라시는 거룩한 뜻,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우선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는 것보다도 우선인 것입니다.


때문에 비록 이방인 로마에 가서도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니까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에게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것 말고 다른 무엇이 더 있습니까?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회용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무한 신뢰하는 동역자로서 맡기신 일인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에게 있어서 전혀 거부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갈수록 어떤 함정에 자꾸만 빠지게 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함정에 빠집니다. 

자꾸만 스스로의 덫에 빠지는 겁니다. 

이만 하면 됐고, 여태 이 정도 했으면 됐다고 스스로 만족해버리고 자위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까지인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찾을 생각도 안합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의 갈채와 환호와 박수에 목이 마릅니다. 

내가 여태 고생해왔는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하늘나라의 문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이 땅에서 미리 다 받아버리려고 합니다. 


때문에 교회생활, 신앙생활이 언제나 화려합니다. 

요란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혹시 추구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가치가 

이 땅에서 다 누리고 받고 차지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만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서 이 땅에서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이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 보좌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특별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이 땅에서 누리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늘입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언제나 하늘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환영받고, 황제에게서 인정받아서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어디서든지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로마에 도착해서 이렇고 저렇고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딤후 4:1-8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오늘 우리들의 삶이 세상적으로 비록 시시껄렁하더라도 

우리 앞에 있는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의의 면류관을 기억하면서 

성실하게 걸어가시는 우리들의 걸음이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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