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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대인 이방인 / 행28:23-31 (신237쪽)

지난 2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서 오늘 드디어 사도행전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제대로 된 끝맺음 없이 

그냥 슬그머니 끝나고 마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끝맺음이 오히려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계기가 되지 않나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장했던 것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워가고자 해서 

교회를 세워가고 이끌어가는 열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들도 사도 바울의 남은 고난을 우리 삶에 가득 채워서 

교회를 든든하게 지켜가야만 하는 남은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런 끝맺음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미처 다 채우지 못한 교회에 남아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우리가 채워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마지막까지 열심을 품고 감당했던 일입니다.


23절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30-31절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로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사도 바울이 성경의 마지막까지 감당한 일은 오로지 딱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의 관심은 오로지 그 것뿐입니다. 

유대인이 안 들으면 이방인에게 가서 전했습니다. 

도무지 가리고 차별하고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전했습니다. 


때문에 그가 그의 제자인 디모데에게도 같은 맥락에서의 권면을 합니다.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분명하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전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내고 드러내고 증거 해야만 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 삶의 모습이 희생과 고난과 억울함의 연속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나타내고 증거 하는 길입니다. 

예수 믿었기 때문에 

남보다 더 약삭빠르고, 

이해타산이 분명하고, 

앞뒤가 단호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오해받고, 

억울한 일 많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 많은 

그런 삶을 기꺼이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당연한 복입니다. 


어디에서부터 그렇습니까? 

내 사는 삶의 자리에서부터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자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를 가리켜 세상이라고 합니다. 

세상은 세상의 목표만을 가집니다. 


그 목표가 뭡니까? 

지금 이 세상 살 때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런 속담까지 있습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다들 한 번씩은 들어보셨고, 또 직접 해보시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은 목표가 오로지 지금 이 세상입니다. 

오늘 여기 지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서 남들이라도 밟고 올라서야만 합니다. 

일단은 나부터 살고 봐야 하는 겁니다. 

내가 편하고 나서 남들 챙기는 것이지,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남을 돌보냐는 겁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이 세상을 제대로 살려면 여기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피도 눈물도 없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이 더 한다는 소리도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을 잘 살아가는 방법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훨씬 더 어려움과 궁핍과 고난 속에 처해질 가능성이 다분한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세상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까지도 무척 싫어하는 곳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도로서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증거는 세상에서 받는 핍박입니다.


마 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세상은 결코 우리를 환대하거나 예뻐하거나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다 그랬습니다. 

시대와 지역과 인종을 뛰어넘어서 예수 믿는 성도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남겨 놓은 사명의 나머지 부분은 

바로 우리가 핍박 가운데서, 

어려움 가운데서, 

환난과 고통과 아픔 가운데서 감당해야만 하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세상을 향하지만 이 세상을 누리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핍박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늘에서의 우리 상이 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의 혼란이 뭡니까? 

우리가 세상과 손을 잡고 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목표와 세상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잘 살고, 결국에 하늘나라도 들어가면 일거양득이지 않느냐는 겁니다. 

세상을 좀 더 편하게 살고, 하나님의 나라에도 들어가는 

이중적인 은혜를 충분히 누릴 수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너도나도 다 떠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생각 자체도 심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하늘나라도 들어간다는 주장을 교회 안에서 듣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시험인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대학 입시 실패하면 교회 다니기 싫습니다. 

대학도 졸업하고 군대도 다녀왔는데 취직을 못한 것을 

교회도 다니기 싫을 만큼의 부끄러움으로 생각합니다. 


또 이런저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판단할 때의 기준이 무척 노골적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안 주셔서 그렇다고들 해버립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뭔가 뒤처져 있으면 

내 신앙생활 자체가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강합니다. 


때문에 내 주머니가 가득한가에 따라서 신앙생활의 근본자체가 흔들려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만 보면 

오늘 사도 바울의 믿음이 가장 부족한 믿음이고, 

뭔가 상당한 문제가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솔직히 사도 바울의 모습은 도무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뭔가 하나라도 똑 부러지게 이룬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도 바울을 아무도 실패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성공한 신앙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여전히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든지 누구에게든지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복음이 뭡니까? 

이 세상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가치입니다. 

손해보고, 어려움 당하고, 억울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로마에까지 온 사연이 사실은 다 복음 전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 세상을 충분하게 누릴만한 형편과 처지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결국에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처럼 슬그머니 그가 사라지는 처지까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삶에는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것만 있었습니다. 

그 대상이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여부에 전혀 관계없이 복음을 위한 삶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인 디모데에게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딤후 1:6-12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 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기를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삶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도 안 쓴 것입니다. 

고난을 받든지, 

어려움에 처하든지, 

못 먹고 못 입어서 힘이 들든지 

전혀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하늘나라의 가치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대상에 있어서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관계없었습니다. 

셋방에 살든지, 옥에 갇혀 있든지, 전혀 신경 안 썼습니다. 

우리의 길도 사도 바울의 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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