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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나무목교회

[스크랩] 서로 다른 반응 / 행17:1-9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복음을 증거하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왜 그들의 삶을 직접 책임지시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십니까?

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안 좋은 일들과 어려운 일들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도와주시지는 못할망정 방해하지는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있는 것일까요?

솔직히 그 반대로 되면 훨씬 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쉬울 것 아니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기쁨과 행복과 즐거움이

저절로 소문이 날만큼 많다면 누군들 복음을 전하지 않겠느냐 말입니다.

복음을 전해서 이만큼 잘 된 사람들이 등장을 하면

너도 나도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들어서 목사가 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왜죠?

이제 목사도 먹고 살만한 직업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저 같은 개척교회 목사 말고 웬만한 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렇습니다.

어제도 노회 시찰회 하는 교회를 갔더니만

그 곳 교회의 목사님 얼굴이 훤하더라구요.

그 정도 규모의 담임목사가 된다는 것은 육신적으로는 엄청난 일일 것 같았습니다.

이제 웬만한 교회의 담임목사라면 먹고 사는 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한 자리가 된 것입니다.

때문에 목사의 직이 인기직종이 되었습니다.

 

목사의 직업이 세상에서 그럴 듯 해졌다고 하면

복음에 대한 가치와 생각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목사는 되고 싶은데 복음은 전하고 싶지 않은

이중성이 가득한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해봐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에 따르는 반응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가장 먼저 들린 곳이

회당이라는 사실에 일단 주목을 해야만 합니다.

그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에

벌써 여러 번 옥에 갇히고 매 맞고 죽을 뻔 했습니다.

반대로 성령께서 나타나셔서 마게도냐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이미 도가 텄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끝까지 회당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회당을 찾아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백성이 어떤 백성입니까?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민족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처한 현실세계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메시야가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유대인들의 심정이 가장 집약되어 나타나는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지금 예루살렘이 아니고 데살로니가니까

성전 대신 회당을 지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이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믿음의 상징이 곧 회당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그 회당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2-3절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사도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서 전하는 내용이 다 복음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그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만만히 먹히게 됩니까?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인들이 바라는 그리스도는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만 해결해주는 그리스도를 원하고 있습니다.

먹을 것 주고,

입을 것 주고,

살 것 주는 그리스도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들 즐거움을 위한 그리스도를 찾고 원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자기 입과 즐거움과 만족만을 위해 달라고 하는 한심한 요구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그들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는 복음을 말하면

당연히 핍박과 아픔이 따라 오는 겁니다.

세상을 구원하니,

영혼 구원이니 하는 그런 소리는 듣기 싫기 때문입니다.

 

요15:18-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은 예수를 미워합니다.

그러니 예수를 전하는 우리를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좀 더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겁니다.

아니 세상이 그러진 못한다고 하면 하나님이라도 좀 나서서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은 어떤 종류의 생각입니까?

 

롬 8:3-8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요령껏, 능력껏, 수단껏 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리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서는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의 생각입니다.

 

본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야손과 그 형제들을 끌어내고 결국 행한 일이 뭡니까?

돈을 받고 야손과 그 형제들을 풀어준 것뿐입니다.

결국은 돈으로 다 해결된 겁니다.

 

그들의 생각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 있는 겁니다.

현실의 문제 앞에서만 헤매고 다니는 것입니다.

무엇을 이용하든지,

어떤 것을 생각하든지

그것이 곧 오늘 내 생활을 도와주고,

빛내주고 편하게 해준다면 다 이용하고 보자는 겁니다.

 

그것이

복음이든,

예수든,

하나님의 나라든,

하나님의 말씀이든 관계없이

오늘의 내 형편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한다고만 하면 다 좋다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과 똑같이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드러나는 반응입니다.

어디 세상 속에서만 있는 반응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조차도 있는 반응인 것입니다.

잘되려고 믿는 예수,

잘 될 거라고 다니는 교회,

잘 된다고 듣는 말씀이 우리 주위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더러 그런 보장을 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려워지고, 힘들어지고, 고통스러워질 것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데살로니가 교회에 하신 말씀 중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살전 1:6-7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많은 환난 가운데서 복음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기 힘든 현실 속에서 예수 믿고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4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이름도 빛도 없이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믿으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달려가는 겁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살면 어떤 아픔과 고통이 올 것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면서 달려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더러 이 땅에서 꽃가마와 꽃마차를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믿고 따라가는 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길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이 땅에서 어떻게 될지는 전혀 모르지만

그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 건물 1층에 안경점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장사가 전혀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사장님은 건너편에 아파트 들어설 때까지 장사를 계속 하신답니다.

 

그렇다면 우리 나무목교회는 언제까지 여기서 계속해야할까요?

저는 우리 성도들이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에 흔들려서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잘 되고 안 되고는 전혀 관심 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음에 이끌려서 사는지 못 사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쁜 길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는 훌륭한 성도들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을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좌지우지 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만 합니다.

 

복음은 하나인데 그 반응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믿음의 반응을 하는 복된 성도이기 바랍니다.

비록 현실의 고통과 아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는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성실하게 달려가는 신앙생활이기를 원합니다.

 

조바심 낼 것 없고,

안달 할 것 없고,

발버둥 칠 것도 없습니다.

 

그저 허락하시는 대로 주시는 대로

욕심내지 않고 성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큰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남들 바라보지 말고,

내 자리에서 나를 믿음 가운데 지키면서

복된 천국 길을 우리 함께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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