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드디어 고린도에 도착을 합니다.
아직 제 2차 전도여행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래 그가 계획했던 제 2차 전도여행의 의도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행15:36절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 가 방문하자 하니”
1차 전도여행에서 세웠던 교회들을 한 번 돌아보고,
성도들을 격려하려고 하는 계획에서 출발한 2차 전도여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2차 전도여행은 계획과는 달리 정말 연속되는 난관과 어려움뿐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방해나 의도에 따라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시니까 그렇게 따른 결과가 그랬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했더니 온통 어려움 밖에는 없는 겁니다.
도대체 순탄한 길이나 평안한 일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빌립보에서 그랬고,
데살로니가에서도 그랬습니다.
아덴에서는 별 신통한 반응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끌고 가실까를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솔직히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분명히 자기의 계획과는 확연하게 다른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고 가지만
솔직히 별로 감동될만한 일은 전혀 없고 오히려 숨고 싶고 피하고 싶은 일들만 가득한 겁니다.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께 주먹질 해보고 싶은 생각만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들을 감히 오늘 우리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전혀 판단할 수 없습니다.
판단한다고 까불다가 죽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오늘 우리들의 불평과 불만과 암담한 현실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그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순종해서 따른 일보다는
억지로 강제로 할 수 없어서 하고 보니까
나중에 그것이 잘한 일이었고, 귀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사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냥 이 말씀 앞에서 깨갱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른 할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에서 한 가지 희망을 볼 수 있는 일이 오늘 말씀 중에 있습니다.
2절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사도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바로 고린도에서 만난 것입니다.
본도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나서 로마에 살던 아굴라는
로마의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라는 명령 때문에
고린도로 이사를 온 것입니다.
물론 그의 삶이 그렇게 넉넉하거나 잘 사는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로마에서 쫓겨나서 고린도에 와서 먹고 살겠다는 도시 빈민인 셈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과 같이 장막을 만들어서 사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사도 바울의 사역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답고 귀한 평생 동역자가 되는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곳곳에서 아굴라의 가정을 축복하고 염려하고 걱정을 합니다.
고전16: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딤후 4:19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사도 바울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계획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그를 돕는 동역자를 이미 예정하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 때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해를 거듭해갈수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깨닫게 되고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은혜를 우리들에게 준비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감히 누가 아굴라를 바울의 동역자로 세우실 줄 알았습니까?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굴라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위치의 동역자까지 되는지 보세요.
롬16:3-4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사도 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 놓을 정도로 귀하게 되어 버립니다.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감사할 정도의 믿음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애초에 사도 바울의 계획에는 고린도는 방문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굴라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을 위해서 모든 교회를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귀한 일군을 만들어 가십니다.
오늘 제가 우리 나무목교회 안에 성도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옳습니까?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 형편으로,
우리 처지로 뭘 할 수 있느냐고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요하심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셔서 결국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계획을 전혀 몰랐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인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그 계획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하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들의 가난함이 결코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나눠 줄 수 있는
넉넉한 믿음을 누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가난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더 풍성하게 나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얍삽한 사람의 꾀를 부리지 않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부자가 되려는 욕심만으로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처럼 살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더 느긋해지고 여유 있어 지는 것입니다.
조바심에 떨지 않는 겁니다.
오늘의 환경과 형편에 너무 연연해서 덜덜덜 떨지 않는 것입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리는 믿음의 여유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도 바울을 보세요.
원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삯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구약의 레위인에 관한 이야기로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신약의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사는 종들에게는
이미 그 삯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0:5-10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주의 종은 주의 일을 통해서 먹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먹는 것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하기 때문에 먹는 겁니다.
저는 주의 종이 너무 가난해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먹고 살 정도면 됩니다.
먹고 살 정도는 교회에서 해줘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얻어먹고만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최소한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아굴라의 관계가 더 돈독해진 것은
바로 장막을 같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일이 같았다는 것이나
같은 일을 했다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형편을 나누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눌 줄 알아야만 합니다.
목사도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끼리도 나눌 줄 알아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과 아굴라 부부가 서로 나누고 살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바울대로, 아굴라 부부에게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아굴라 부부도 사도 바울에게서 힘과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함께 가는 겁니다.
함께 거하면서 사는 겁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의 사역이 힘이 나는 겁니다.
비록 그의 예정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고린도에서도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안식일마다 그의 외치는 복음이 고린도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고전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목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함께 하는 거룩한 동역자들이 있어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전혀 꺼림이 없었습니다.
부족한 제게도 나무목교회의 자리를 지키시는 여러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우리가 좀 어려운 것 같지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서면 반드시 됩니다.
우리도 바울과 아굴라 부부처럼 서로에게
힘껏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고,
나눔이 되고,
섬김이 되면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저에게는 여러분을,
여러분에게는 저를 보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살면서 든든하고 우직하게
이 자리를 지켜서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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