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오늘 본문의 제목이 “두 여인”이 아니라 “두 사람”인 것을 말씀드립니다.
애니아와 다비다 두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애니아는 남자, 다비다는 여자입니다.
때문에 두 여인이 아니라 두 사람입니다.
주보를 낼 때 제가 순간 착각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중풍병자인 애니아는 낫게 해주고,
죽은 다비다는 살리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야할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성경의 모든 부분에서 동시에 언급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엇입니까?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받기 위한 절대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움직임,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 즉 응답과 축복과 기적을 받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에서 고침을 받고 다시 살아나게 된 애니아와 다비다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애니아의 경우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신앙생활을 했는지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질 않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경우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다비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녀는 여제자라고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선행도 많이 하고 구제도 많이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여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신앙의 고백이나 열심을 들어볼래야 볼 수 없는 이미 현실적 상황이 다 끝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은 고침을 받고 다시 살아남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적인 노력은 전혀 없이 오로지 은혜만 입은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로 따지자면 헌신이나 충성이나 열심의
그 어떤 신앙적 행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적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은혜는 오로지 하나님의 하실 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베드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저 하나님의 기적을 나타내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신 일입니다.
오늘 이 부분에 대한 우리들의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이 믿음을 가지려면 여태껏 해왔던 신앙생활에 대한 방향성이 달라져야만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예측가능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예측 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쉽게 예를 들자면 오늘 수요기도회를 참석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응답과 기적을 우리들에게 주실 것 같습니까?
이 부분에 대한 신앙적인 확고부동한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저를 비롯한 우리들 거의 모두는 우리의 신앙행위에 대한 어떤 대가를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는 본성 같은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적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 대한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성령의 능력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성령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한다는 아주 단순명쾌한 이유들이
교회 안에서 많이들 주장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입으면 우리가 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
특히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일에 대한 영역에 있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단순한 논리가 우리 신앙의 행위들 안에 숨어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거기에 우리의 정성까지 더해져서 엄청난 부가가치의 기대치를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의 기도회에 참석하는 정성을 받으시면
성령의 놀라우신 능력이 임하게 되어서 우리가 바라고는 있지만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우리 앞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일이 우리 앞에 이루어만 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결론은 언제나 버킹검입니다.
그런 일은 우리 앞에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열납하셔서 엄청나고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인풋(in put)이 하나님의 아웃풋(out put)을 보장하거나 장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성을 받으셔서 이렇게 저렇게 역사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원해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시면 안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정성이 담보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뭔가를 주신다면,
아니 주셔 왔다면 우리 신앙은 성경적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일은 해라, 하지 말아라’,
또는 ‘이런 일은 하면 내가 복을 주겠다, 아니면 저주를 하겠다.’ 라고
말씀하신 곳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구약에 많습니다.
구약 중에도 모세 오경 안에는 자주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정성이 하나님의 응답을 보장한다는 의미로 주어진 말씀들이 아닙니다.
그건 모두 오로지 한 가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오로지 순종밖에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시려는 의미로 주신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일체의 우리들 의견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대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저 듣고 순종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왜죠?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그렇게 순종을 잘했다는 이스라엘은
정작 예수님이 오실 때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거절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도 신앙생활을 인간의 인풋과 하나님의 아웃풋으로만 이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말씀을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으로만 이해하고
율법의 테두리 내에서의 삶에만 집착을 한 것입니다.
율법이 주는 테두리 안에서 오물딱조물딱 하는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정작 그 안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혀 없었습니다.
수천 년을 신앙생활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의 한계를 벗어나질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오늘 신앙생활도 그런 우려가 상당히 많습니다.
아니 현실적으로 이미 그렇게 하고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행한 신앙생활의 현실적인 열심에 따른 보상을 차지한 것으로
자랑하고 드러내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간증들이 다 그것입니다.
무조건 하나님께서 복 주셨다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라면
더 이상 자랑할 것도 드러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계량화 하거나 수치화 하거나 형상화를 할 수 없는
개개인의 고유한 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고쳐 주시고, 또 누구는 살려주시는 겁니다.
누구는 돈을 주시고, 누구는 고난을 주시는 겁니다.
누구는 건강을 주시고 누구는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우리들에게는 복이요, 은혜요, 사랑입니다.
각 자가 겪고 누리는 것은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힘이 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복은
각 자에게 가장 적당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고차원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은 분명 힘이 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가시적인 은혜가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 지탱하기도 힘들 때가 많으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심에 전혀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갈 3:8-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복을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아브라함의 복을 주십니다.
본문 35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42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애니아로 인해서,
다비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돌아왔고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고침을 받고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풍성한 복 받는 모습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좀 더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예수 믿고 달라지는 삶의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반드시 복을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를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주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혼자서는 참고 기다리시기 힘이 드니까
함께 기다리시는 은혜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다리는 것이 은혜를 누리는 조건은 아닙니다.
다만 은혜를 누릴 때까지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은 갖게 될 것입니다.
나만 혼자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또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 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유 1: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우리 모두 함께 모여서 은혜와 긍휼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실 때까지 굳세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무엘 상 17장에 보면 어린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앞에 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 어린 다윗이 물맷돌을 5개를 준비해갑니다.
왜 다섯 개였을까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맞을 때까지 던지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실 때까지 모여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혼자서는 힘이 드니까 같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한 번 기다려들 보시자구요.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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