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역시 핍박받는 사도입니다.
그냥 편하고 쉽게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 일이 없는 사도입니다.
고린도에서도 결국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갈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고린도가 속해있는 아가야 지역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이때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8-9개월 정도가 된 때입니다.
로마에서 임명해서 부임하는 총독이 새로 오게 되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는 동안 참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재판정에 끌고 와서 직접 총독에게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디서든지 반대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일체의 기득권을 다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 누구의 특권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만 드러내는 것이 복음입니다.
때문에 반드시 사람들의 반발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사람들이 동의하고 따르는 것보다는
반발하고 거부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핍박을 하는 것이 정도입니다.
당연한 수순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정확한 성격이 뭡니까?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일어나서 반발하고 거부하고 핍박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하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는
핍박을 당하는 것이 이미 축복이요, 은혜요, 영광인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어디서든지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를 했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워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힘든 것 때문에 더 감사하고 영광스러워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점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위한 핍박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그는 그런 핍박과 고통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바로 이 점이 궁금합니다.
사명감만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실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확신만으로
복음을 위한 고통과 아픔을 감수해나가는 것은 무지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힘들게 살고 어렵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그래도 편하게 사는 것이 좋고 넉넉하게 사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좀 더 나은 형편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헌금도 하고 싶을 때 팍팍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마음껏 도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형편이 안 되는 겁니까?
더 어려워지기만 하고 힘들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자주자주 넘어지기도 하고,
뒤돌아서고 싶기도 하고 한숨만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 바울은 우리보다 더 어려운 위험 속에 처하면서도
그 모든 사역을 잘 감당하는지 부럽기만 합니다.
고후 1:8-10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살 소망까지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달려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에게도 그런 원동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바로 그 원동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디에 나타납니까?
14-16절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무슨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가하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고
저희를 재판 자리에서 쫓아내니”
로마에서 온 총독 갈리오의 입술에서
바울이 사역을 계속해서 감당해 나가는 원동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갈리오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너희들 문제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원래 로마는 정복한 나라와 민족의 종교를 있는 그대로 인정을 했습니다.
종교문제까지 정복을 해버리면 더 많은 저항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고소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로마의 법을 위반한다는 것입니다.
13절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여기서 율법은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로마의 율법을 말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
곧 복음이 로마의 법을 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총독 갈리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것이 로마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단지 유대교 안에서의 문제니까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로마 총독의 입을 빌어서 기독교가 불법이 아닌 것을 선포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큰 힘이 된 것입니다.
이제 어디서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해도 불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의 총독이 불법이 아니라고 선포를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힘들게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이 큰 힘이 되고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복음을 전해야만 하는 대상자인
이방인들을 생각하면 거칠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지역이 모두 로마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 사역에 있어서 큰 걸림돌이 하나 제거된 것입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복음전파를 가장 방해하는 유대인들이
먼저 나서서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갈리오 총독에게 문제를 먼저 제가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저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를 방해하려고 했지만
결국 사도 바울의 사역을 도와 준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했을까요?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자기를 미디안의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렇게 하셨다고 요셉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총독이라고 하는 절대 권력을 이용해서
복음전파라고 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복음전파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시작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지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중간 중간 용기를 주시는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는 겁니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중간 중간 베풀어주시는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또 허리띠를 졸라매고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복음이 그냥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전하도록 해주시는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 스스로 원하고 바라서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하기 싫고 감당 못해도 하나님께서 군데군데
남겨 두시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전하는 복음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져서 갈 곳 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자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것이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손길을 통해서도 위로를 얻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의로운 핍박을 당하는 이들에게 용기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귀한 손길들을 만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의 자리를 포기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적절하신 은혜가 우리에게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물질일 수 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마음의 기쁨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 모든 것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해나가도록 하는
원동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죽지 말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의로운 삶이면 당연히 핍박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멀리에서도 있지만 우리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욥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고난은
아들들이 죽고 재산이 다 날라 간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소리를 한 것입니다.
그래도 욥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때문에 결국 넉넉한 은혜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에게 언제나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국 사도 바울이 이기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엔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누리게 하실 겁니다.
그러니 우리 함께 걸어가는 동안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걸어가는 길에
갈리오 총독과 같은 은혜를 적절하게 예비하실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 다 같이 힘차게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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