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수리아, 겐그레아를 거쳐 에베소에 와서 가이사랴로 갔다가 예루살렘을 갑니다.
다시 안디옥으로 내려와서 얼마간 지내다가 다시 제 3차 전도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23절의 내용은 제 3차 전도여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좀처럼 쉬는 법이 없이 계속해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움직이는 전도자였습니다.
그만큼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확신과 감동이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음 전파에 대한 인간적인 고집도 강한 사도라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복음전파를 위해서 다닌 길이 오늘날에도 엄청난 거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든 불편을 다 감수하고
온갖 시련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결코 굽히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보입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것 같은 사도 바울의 자세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물론 그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뭡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복된 인생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차이가 나는 겁니까?
사도 바울한테는 산삼 같은 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는 도라지 같은 은혜를 주신 걸까요?
원래 하나님은 전혀 차별이나 구분이나 편애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럼 어디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겁니까?
저는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사역의 기준에서 그 차이를 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뭡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기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우리 다 같이 한 번 읽겠습니다.
18절 “바울은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 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여기서 가슴이 덜컹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서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반드시 지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서원입니다.
한 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이 서원을 잘 지키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간주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우려먹는(?) 경우도 있다고들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빚지고는 절대 못산다는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분들도 상당수입니다.
그런 의식의 영향으로 인해서 우리들의 서원이 좀 더 개폼(?) 나는 것으로 달려 가버렸습니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데
기왕에 하는 서원이면 남들보다 나은 것으로 하는 외식적인 경향으로 흘러 버렸습니다.
때문에 주의 종이 되겠다거나 만들겠다는 것,
또는 건축헌금을 감당하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액수로 작정을 해버립니다.
그 서원 안에 어떤 생각들이 있습니까?
솔직히 우리 힘으로는 절대 못 지킨다는 생각이 박혀 있는 겁니다.
전세도 아니고 월세 보증금 천오백인데 2억을 건축헌금 한다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 액수에 손도 대지 못하고 갚지도 않은 채 결국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럴듯하게 폼은 잡았지만 먹고 사는 생활조차 감당이 안 되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2억을 건축헌금으로 냅니까?
우리 나무목교회에서는 그런 거 안 합니다.
절대 안 합니다.
차라리 교회 문을 닫고 말지 그렇게는 못합니다.
왜 하나님을 성도들의 피를 빠는 흡혈귀로 만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다 우리의 교만입니다.
보세요.
사도 바울 같은 능력의 종도 겨우 머리 깎는 것을 서원하고 또 그것을 지킵니다.
할 수 있는 것을 서원하고 또 서원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준이 그것입니다.
절대로 허영과 사치스럽게 서원하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잘났다고 하는 우월감에서 서원하질 않습니다.
육적인 생각과 기준으로 남들과 비교해서 나를 쳐다보지 않아야 합니다.
잠 4:23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무슨 마음을 지키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일편단심입니다.
같은 의미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갈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진짜로 자기들의 눈을 빼서 바울에게 달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 정도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마음을 주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주었던 것이 복이었는데 그 마음이 지금 다 어디 갔느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단순히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자기의 마음부터 하나님께 딱 고정해서 드리고 살았습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께 마음부터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야 그 다음에 행동이 따라가는 겁니다.
마음 문을 닫아버리면
아무리 올바른 일이고
당연한 일이고
해야만 할 일이라도 몸이 움직여주질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드리면 몸은 저절로 따라 가는 겁니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은 사람의 요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20-21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은 에베소의 유대인들이 그 말씀을 더 듣고자 하여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더 머물러 있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머물지 않았습니다.
작별하고 인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이야기만 합니다.
그동안의 사도 바울이 행한 사역을 생각해보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더 듣겠다는데 왜 굳이 에베소를 떠나야 했을까요?
복음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증거 해서 성과를 내고 효과를 얻어야만 할텐데 왜 굳이 떠납니까?
그건 이미 하나님께 약속하고 떠난 기한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2차 복음전도 여행을 하려고 했던 모든 지경을 다 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인간적으로 감동을 받아서
자꾸만 이런저런 요구와 요청들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꾸 흔들리게 됩니다.
최초에 계획했던 것들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대로 따르고 움직이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을 먼저 따라 다니다보면 줏대를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또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모릅니다.
그 때 그 때 다 다릅니다.
자기 입장과 형편 따라 다릅니다.
사람의 기준은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고 언제나 주관적입니다.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사람을 따라 다니다 보면 가랑이가 찢어지기 딱 좋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교인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해서도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반대를 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그 뜻대로 다 되는 겁니다.
사람들의 동의를 따르거나 또는 반대를 두려워하는 것 모두 같습니다.
너무 사람의 뜻대로 하려해서는 안 됩니다.
갈 1:10-12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자들은,
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은
결코 사람들의 이야기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또 두려워하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뜻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언제든지 수그러집니다.
사람들의 계획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바벨탑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반대했던 바로가 그랬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약 4:15-17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선입니다.
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죄요, 악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언제든지 주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니까 사람들의 반대와 싫어하는 점도 많았지만
결국 그는 신약시대 최고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가진 신앙생활의 기준을 우리도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마음부터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비록 지금 물질이 없고 건강이 없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먼저 마음부터 지키시면 됩니다.
마음을 지키면 방법은 다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언제든지 주의 뜻을 우선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주의 뜻을 먼저 구하면 다 해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기준에 충실했습니다.
우리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기도해야만 하는 겁니다.
마음도 지키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다 도우셔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을 붙들도록 도와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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