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신구약 성경 속에 나오는 많은 선지자와 설교자들 중에서
직접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런 생각을 안 해보셨어도 구원 받는 데는 크게 지장 없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들의 삶과 생활 속에서 수많은 설교자와 설교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꼭 직접 설교를 들어보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아볼로입니다.
굳이 그 이유를 물으신다면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설교를 하는데 언제나 눈물이 많았던 선지자입니다.
이 말은 설교를 듣는 백성들의 입장과 형편과 처지를 가장 잘 고려해서 설교를 한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대상인 백성들의 형편이 마치 자기의 형편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눈물로 설교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설교를 듣는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는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성도들의 입맛에 맞추는 설교가 아니라
성도들의 형편과 처지를 보고 하나님의 바른 뜻을 담대하게 설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입맛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설교를 하되
성도들의 형편과 처지를 영적으로 제대로 잘 분별해서 하는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볼로라고 말하는 이유는
아볼로는 똑똑한 설교를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쉽게도 그의 설교 내용은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정말 많은 설교를 했는데 당시의 기록 여건상
그의 설교가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설교를 했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왜죠?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에서 은근히 아볼로의 설교,
특히 입에서 바로 나오는 말솜씨에 대해서 상당히 칭찬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당시에 몇 개의 파로 나뉘었는지 아십니까?
세례를 받은 것으로는 4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고전 1:12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놀랍게도 아볼로가 게바, 즉 베드로보다 더 앞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자로 보면 두 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고전 3:4-6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여기서는 아보로가 사도 바울보다 먼저 언급이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앞서서 언급되는 이름이 더 중요하거나 더 높거나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볼로가 설교자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보다 더 먼저 언급된다는 것은
아볼로의 설교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은 말에서는 어눌하다고 했습니다.
회중들을 앞에 놓고 직접 하는 설교는 잘 못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회중들에 대한 설교 자체를 안 한 것은 아닙니다.
상당히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아볼로가 설교를 더 잘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아볼로의 설교가 저는 궁금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동하고 인정한 아볼로의 설교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성경에는 아볼로의 설교를 생각할 수 있는 설교 본문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있을 뿐입니다.
그가 어떤 배경과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까 하는 의문점이
오늘 본문에서 일부나마 해결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이집트, 애굽에 세운 도시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정치, 경제, 교육, 철학, 문화의 모든 면에서
당시의 그 어떤 도시보다 훨씬 더 앞서 있던 곳입니다.
한마디로 당시 모든 문화의 메카였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아볼로는 태어났고 그 도시에 걸맞게 많은 교육을 받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능통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24절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런 아볼로가 어쩐 일인지 - 물론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혜입니다. -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서 사역을 하고 있던 에베소에 옵니다.
마치 강은혜 목사님이 우리 나무목교회에 오신 것처럼 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알고 보면 엄청난 은혜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회중들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아볼로를 세우신 겁니다.
사실 아볼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장점은 무지 많습니다.
일단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학문이 많습니다.
가방끈이 길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성경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그 위에 하나를 더해서 말을 잘하는 겁니다.
일단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외형적인 조건을 다 갖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은근히 까다롭고 따지는 것 많고
가리는 것이 많은 민족성을 갖고 있습니다.
가문이나 전통, 학벌 등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그런 것을 아볼로는 다 만족시킵니다.
어디 하나 뒤떨어지는 면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볼로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은 열심도 있습니다.
25절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성경을 깊이 알다보니
구약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였느냐면 딱 세례 요한의 세례까지만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겠죠?
예수님과 함께 다녀보질 못했으니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열심은 있으니까 열심히 회당을 다니면서 복음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동역자, 아니 영적인 멘토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하게 배웁니다.
복음에 대한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어떻게 이런 배움이 가능했을까요?
아볼로는 사실 유대인 엘리트입니다.
아굴라 부부는 겨우 장막을 지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지체와 신분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기꺼이 아굴라 부부에게 배웁니다.
복음 안에서 높고 낮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과 신앙과 십자가 안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입니다.
가리는 것이 없고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학력도, 실력도, 재물도, 능력도 다 소용없습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배우는 것은 누구에게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서로 간에 높음이나 낮음, 또는 귀함이나 천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고 하면서
수없이 많은 차별과 구분이 필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신들의 신분이나 위치 때문에
아볼로에게 복음을 가르치지 못했더라면
아볼로라고 하는 훌륭한 설교자는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엡 1:7-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모든 삶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살아야만 합니다.
각 자에게 주어진,
그리고 맡겨진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겁니다.
때문에 각 자에게 주어진 역할이나 달란트나 은사들을 모두 존중해야만 합니다.
사람은 나를 따르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사람을 따르라가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와 은혜대로 자기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역할이 모두 성경에 근거한 것이고,
또 그 내용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지혜롭고 열심 있는 아볼로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가르침을 받는 것도
모두 전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 각 자는 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각 자의 위치와 성격, 삶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서로가 서로의 입장과 위치와 견해와 가치를
다 존중해주면서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경쟁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누가 누구를 지배하고, 또 누구는 누구에게 복종하고의 삶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인정하면서
각 자에게 맡겨진 방향과 생각대로 최선을 다하되
그 모든 것이 언제나 복음을 전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강 목사님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러나 그 다른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겁니다.
때문에 서로 각 자의 가치와 은사와 이해를 인정해주면서
함께 복음을 위해서 달려가면 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것은 인간의 법입니다.
신앙의 법과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 자의 다른 부분을 다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누군가의 힘에 의해 하나로 만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에만 하나 되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바른 섬김의 모습입니다.
아볼로는 사도 바울이 스스로 잘하지 못한다고 인정하고 있는
회중들 앞에서의 설교가 장점이었습니다.
28절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말을 이김일러라”
말씀을 잘 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성경에 남긴 말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아름답게 사용된 주의 도구입니다.
비록 지금 그의 설교를 들어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그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서의 허용된 시간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때문에 오늘 아볼로의 전도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그런 삶을 살기 바랍니다.
'추천 설교 > 나무목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나님이 행하시게 / 행19:8-20 (신220쪽) (0) | 2015.07.10 |
---|---|
[스크랩] 성령의 세례 / 행19:1-7 (신220쪽) (0) | 2015.07.10 |
[스크랩] 바울이 가진 기준 / 행18:18-23 (신219쪽) (0) | 2015.07.02 |
[스크랩] 의로운 핍박 / 행18:12-17 (신218쪽) (0) | 2015.07.02 |
[스크랩] 두 사람 / 행 9:32-43 (0) | 2015.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