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성도들 간에
오랫동안 갈등을 가져왔던 이유 중의 하나를 제공한 내용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구원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구원받은 사람이 받는 2차적인 축복이 있다는 주장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입니다.
뭐가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바로 성령을 받는 일,
곧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야만
정상적인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성령은사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당연히 따라 나오는 것이 성령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은사 중에 은사가 바로 방언이라고들 합니다.
때문에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누구나 다 방언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다못해 똥개도 방언을 한다고까지 억지주장을 합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고 주장하는 마음에서 나온 이야기일 것입니다.
때문에 그것을 옳다 그르다 할 것은 사실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해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령을 받으라는 주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3절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을 만나서 한 대화의 내용입니다.
대화의 내용에 나오는 단어가 우리의 생각을 좀 헷갈리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느냐”라든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든지
“요한의 세례로라” 하는 말들이
뭔가 다른 태도를 가져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장하게 되는 것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라든지
아니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든지
심지어는 ‘성령을 받으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때문에 일부의 부흥회나 기도원 집회에서
강사들이 ‘성령을 받으라!’는 놀라운 말씀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부 성도들이 거기에 혹해서 덩달아 그런 모습들을 흉내 내고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까지 주장하는 어리석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핵심은 성령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사실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4-5절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요한의 세례만 받은 에베소 교회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 곧 성령의 세례입니다.
우리는 성령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곧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 쪽으로 달려 가버립니다.
생각이 그 날에 나타났던 것에만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세례라고 하면
곧장 방언, 은사, 충만함 등으로 취급을 해버립니다.
그러면서 회개, 통회, 자복 등을 해야만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한계입니다.
때문에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이 언제나
지난날에 대한 회개, 반성, 각오, 다짐, 노력, 수고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때문에 늘 눈물뿐입니다.
그런데 회개라는 것을 가만 보세요.
회개는 언제나 과거 지향적입니다.
지난날에 대한 회고요 생각이요 추억일 뿐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늘 그 타령입니다.
그러니 가만 보면 지난 세월에 대한 진한 아쉬움과 후회와 회한뿐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의 핵심은
회개하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 그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회개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 없이도 천국에 갑니다.
왜죠?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한다고 하면서
늘 옛 생활에 대한 진한 그리움과 아쉬움과 추억으로 발목을 잡혀 있습니다.
때문에 언제나 아쉬움에 대한 눈물이 먼저입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오늘의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가 마음속에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제대로 잘 사는 것일까?’ 라는 염려와 걱정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본심과 본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이 없는 겁니다.
천국에 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이 없다는 것은
곧 자기의 신분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겁니다.
우리 신분이 어떤 신분입니까?
천국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인 신분입니다.
갈 4:6-7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곧 자녀들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결과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 전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옛날의 추억이나 아쉬움이나 감정으로 가서
슬퍼하고 후회하고 아파하는 쪽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쪽으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얻을 쪽으로 가야만 합니다.
천국으로 가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겁니다.
이미 그리 가는 길을 다 따놓은 겁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으로, 하나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이미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면
이미 우리는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함께 하심을 다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내 감정과 시각입니다.
아직도 부족한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고,
죄 많은 것 같은 나를 보니까
천국도 멀고 하나님 나라도 먼 것 같은 겁니다.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완성된 구원이 아니고 완성된 거룩이 아닙니다.
그러나 완성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다시 죄의 자리,
종의 자리로 쫓아내지는 못합니다.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정과 시각에 관계없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당당하게 하나님 자녀로서의 특권을 다 누리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 부족해서 내가 하나님 자녀다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녀는 아버지의 말에 절대 기죽지 않습니다.
가만 보세요.
좀 전에 그렇게 야단을 맞았더라도
금방 배고프다고 밥 달라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것이 자녀들입니다.
핸드폰사용을 많이 해서 요금이 많이 나왔다고 야단을 맞고도 돌아서면
또 핸드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자녀들입니다.
그런다고 그런 자녀들을 집에서 쫓아냅니까?
아니면 핸드폰을 뺏어 버립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또 봐주고 놔두는 겁니다.
언젠가는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노력하도록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짓을 할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이 세상 가운데서 드러낼 것입니다.
성령의 무한한 능력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여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시간동안 다 기다려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물론 우리들의 삶의 환경은 언제나 가변적입니다.
너무 많은 변수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때문에 어떨 때는 죄도 짓고 회개할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매우 만족스러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고 취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과 행동에 빠져서 안타까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이 모든 것을 다 이기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는 놀라운 미래입니다.
그리고 그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살기로 한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때문에 그 어떤 성령의 세례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사는 것으로
이미 다 완성된, 그리고 완성으로 가는 구원입니다.
그 확신과 자신이 우리 모두에게 들어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것이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허락하신
특권임을 오늘 본문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6-7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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