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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11

청년 패잔병이 몰려오고 있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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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패잔병이 요새로 몰려들고 있다"(6.3.2005)

1. 전선이 무너진다 :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즐겨본다. 못 볼 때는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보곤 한다. 임진왜란 초창기에 준비 없는 조선군은 전선이 무너져서, 여기 저기 패잔병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무너진 전선으로 인해 이순신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패잔병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전라 좌수영에 군사가 늘어난 것을 단순히 이순신의 리더십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패잔병의 존재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2. 이것이 부흥인가? : 중소교회의 청년부들이 많이 어려운가 보다. 지방집회를 가보면, 지방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 심해진다. 사회구조적인 변화일수도 있고, 교회의 약화일수도 있다. 섬기는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청년들이 많은 듯하다. 이런 패잔병들이 큰 교회를 요새 삼아 모여들기도 한다. 과연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놓고, 부흥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3. 패잔병들의 특징 : 이들은 이미 한번 패배를 맛보았기 때문에 싸움을 싫어한다. 듣기 싫은 소리를 견디지 못한다. 변화를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자신이 변화되라고 하면 두려워한다. 듣고 싶은 소리만 들어서 어떻게 변화를 맛볼 수 있겠는가? 이유없이 일하지 않고 노는 백수들, 눈높이만 높아서 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는 청년들, 도피성 유학, 낭비성 유학, 노력하지 않고, 노력해서 이룬 것을 비난만 하는 사람들... 이들은 마땅히 말씀으로 질책받고,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나는 피흘리는 약자라면서 위로받기만 원한다.

4. 교회의 사명 : 이순신은 패잔병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전선으로 투입해서 승리를 이끌어 냈다. 한국 교회가 어렵다. 이때 요새에 머물면서 부흥, 태평성대를 한가하게 외칠 수는 없다. 패잔병들은 헌신이 없다. 선교도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가려고 한다.  아니 아예 선교 마인드도 없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거친 바다로 나가도 싸워 이길 수 있는 십자가의 정병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철저한 기도의 영성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이번 특별새벽기도회가 중요하다. 요새에 안주하며, 패잔병이나 위로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흩어진 청년들, 전선이 무너진 교회에 십자가의 정병을 투입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로 이끌 것인가의 전환점이다. 기도없는 십자가의 군사는 무력하다. 물론 기도없는 패잔병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다.

새벽에 와서 조는 것도 유익하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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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에 와서 조는 것도 유익하다." (5.27.2005)

1. 겟세마네에서 조는 제자 :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었다. 예수님은 3명의 제자를 데리고 가셔서 같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제자들은 다 잠들어 버렸다. 그러면 이런 잠자는 사람은 필요없는 것인가? 이때의 조는 경험도 나중에는 다 중요한 은혜의 단서가 되었다.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외친다. 조는 경험이 나중에 은혜받고 난 다음에 큰 깨우침의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자는 사람도 기도의 자리로 초대해야 한다. 어렸을 때, 부흥회에 참석했었다. 주로 강대상에서 잠만 잤다. 그래도 그때의 기억과 분위기가 나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자더라도 기도의 자리로 나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 나의 기도의 동역자 3인 : 헌신과 뜨거움을 강조하다 보면, 위로 솟는 불길만을 강조할 때가 많다. 한사람의 기도의 능력에 너무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부흥은 기도의 확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들판에 불을 지를 때에도 한군데의 강한 불길보다, 여기 저기 퍼진 작은 불길이 더 빠르게 들판을 불태운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 3명의 제자를 데리고 간 것을 잊지말라. 나의 기도의 동역자 3인을 세우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란다.

3. 구체적인 적용이 주는 인사이트 : 특새 기간에 진마다 300명이 참여하여, 매일 3,600명이 출석하는 기도회를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진마다 100명씩의 새벽지기들을 세워야 한다. 세부적인 방법을 말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 방법을 찾는 과정 가운데 얻는 유익이 크기 때문이다. 사실 명단을 파악하고, 세우는 것은 쉽다. 다운로드만 해도 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다운로드는 힘이 없다. 자신이 스스로 한명씩 파악된 100명과 다운로드로 보고된 100명은 분명 차이가 있다. 새벽지기를 세우라는 말은 100명의 일꾼과 교제하라는 말이다. 이 뜻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 큰 그릇이다.

마귀를 묵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묵상하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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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를 묵상하지 말고, 하나님을 묵상하라"(3.11.2005)

  성도 중에 지나치게 어둠과 마귀에만 관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마귀는 분명히 존재한다. 마귀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자신은 마귀의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람이 있다. 왜? 마귀와 같은 방향으로 걷기 때문이다. 마귀를 대적하면, 당장 눈 앞에 드러나게 되어있다. 그러나 마귀를 강조하는 것도 정도의 문제이다. 지나치게 마귀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마귀만을 생각하고, 마귀만을 묵상하고, 마귀에게 당한 시험을 나누고, 마귀의 역사를 분석하고, 마귀의 특징만을 연구한다. 이러니까 마귀로 충만해지는 것이다.
  성도는 마귀보다는 하나님을 더 많이 묵상해야 한다. 어둠이 아니라 빛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어둠을 이기려고 칼을 휘두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빛이 비춰지면, 어둠은 사라지게 되어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면, 마귀의 역사는 사라지게 되어있다. 과거에는 청년들의 범죄와 일탈 행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설교하곤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호기심으로 반응하고,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남녀의 아름다운 교제, 아름다운 가정에 대한 것을 묘사했다. 아름다움을 보니까, 누추함을 버리게 되었다. 어둠을 비난하기 보다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 마리아가 "본 트랩 대령"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천둥 번개가 치는 폭우 쏟아지는 밤, 아이들이 무서워서 마리아 선생님의 방으로 몰려온다. 그때 마리아가 이렇게 말한다. "무섭고 두려울 때를 이기는 법이 무엇인지 아니? 그것은 좋은 일만 생각는 것이야." "수선화, 푸른 초원, 하늘의 별, 장미 꽃잎의 빗방울, 아기 고양의 수염, 자전거와 예쁜 장갑, 잘 포장된 소포 꾸러미... 이런 좋은 것들만 생각하면, 즐거워질 수 있어." 아이들은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다. 왜? 기쁘게 사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기쁜 사람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이라는 이론이 있다. 성도는 실제로 영적 전쟁을 치루고 있다. 그런데 모든 일들을 모두 영적 전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모든 것이 다 마귀고, 다 귀신이라고 한다. 감기 걸리면 감기 귀신, 젊은이가 이성을 좋아하면, 음란귀신, 좀 졸면 '졸음귀신'이라고 윽박지른다. 이렇게 항상 귀신만 묵상하니까, 귀신이 강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모든 책임을 마귀에게만 전가하지 말라. 마귀가 하지도 않은 일을 마귀에게 돌리니, 마귀가 억울해한다.  게을러서 새벽기도 못나왔으면, 게을렀다고 하라. 불성실해서 리포트 못해 놓아 C학점 받았으면, 공부 더해야겠다고 하라. 자신의 불성실을 마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책임전가 논리일 뿐이다. 
  성령을 묵상하라. 성령이 주실 비전과 사역에 집중하라. 그러면 항상 긍정적인 열매를 맺는 빛의 자리로 나가게 될 것이다.
습기없는 인생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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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기없는 사회                                 
             
  스펄전 목사가 하루는 훌쩍 훌쩍 울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아내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오늘은 슬픈 날이야. 십자가를 생각하는데도 감동이 없어." 감동이 없는 메마른 가슴을 아파하며 울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없다. 스펄전은 가장 많이 울었기에, 19세기에 가장 강렬한 영향을 미친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우는 것은 능력이다.


  4복음서에는 모두 "씨뿌리는 비유"가 나온다. 그중 누가복음에 나오는 내용은 차별성이 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다(누가8:6)고 한다. 식물이 자라는 절대 조건은 "습기"이다. 흙이 없어도 수경재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습기의 공급이 없으면 죽는다. 살리는 것은 습기에 있다. 사람의 감정도 식물과 마찬가지로 습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울어주는 사람을 통해서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다. 사회의 많은 요소들이 말라 가는 것은 비판 부족이 아니다. 습기 부족 때문이다. 가슴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사랑의 부족 때문이다. 눈물없이 직언하면,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눈물과 함께 직언하면, 변화를 가져온다. 어머니의 질책 앞에서는 자녀들이 상처를 입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울 수 있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차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대인 의사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 수용소에서 어떻게 견디었는가를 물었다. "나는 눈물과 한숨으로 견디었습니다." 삶을 포기한 사람은 울지 않는다고 한다. 삶을 포기하면 경계심이 사라지고, 아끼던 모든 것도 낭비하더라고 한다. 그리고 죽더라는 것이다. 눈문없는 사회, 습기없는 사회는 메마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안타까워하며 우는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 지극히 약해 보이지만, 사실 그 사람들이 사회에 생명을 주는 구원자들인 것이다.

아픔을 표현할 수만 있어도 감사할 인생이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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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표현할 수만 있어도 감사할 인생이다."(2.25.2005)

1. 표현할 수 있는 아픔 :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쉽기만 한 인생은 없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아픔이 가장 큰 아픔인양 과장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은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은 최악의 아픔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경의 아픔이 있다. 그러나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외칠 수 있는 아픔이다. 앉은뱅이의 아픔도 큰 아픔이다. 그러나 나를 걷게 하소서라고 외칠 수 있는 아픔이다.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은 부족하지만, 일종의 당당함이 있는 아픔이다.

2. 표현할 수 없는 아픔 : 열 두해 혈루증 앓은 여인과 같이 자신의 병명을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아픔도 있다. 부정한 병이요, 환부를 보여주거나 말할 수도 없는 아픔이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없어서 예수님의 옷자락만을 붙들어야 하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아픔"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존경받고, 인정받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실수인지, 범죄인지 성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내에게까지 전염이 되었다. 아내의 충격은 대단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드러내 놓고 부부싸움도 할 수 없었다. 큰 아픔 속에서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야 했다.  "아플 때, 아프다, 억울할 때, 억울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감사"라고 말한다. 지금도 속이 썩어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표현할 수 없는 아픔 속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3. 예수님의 손을 붙들라 : 사실 표현할 수 있는 아픔이라고 해도 사람에게 표현해서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대개 사람에게 말한 아픔은 더 큰 아픔, 더 큰 소문으로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다. 사람에게 말한 비밀은 자신을 죽이는 칼이 되어서 돌아올 때가 많다. 우리의 아픔은 예수님께 가지고 가야 한다. 예수님께 아뢰야 한다.  예수님은 종종 우리를 빈손으로 만든다. 왜? 예수님 손만 붙들라는 뜻이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아픔과 쓰라림을 가지고 예수께 가자. 거기에 치유와 안식이 있다.

모든 환경을 누리는 즐거움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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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환경을 누리는 즐거움"(2.11.05)

1. 인생의 조건 : 모든 인생의 조건이 평등하지만은 않다. 어떤 사람은 평탄하다. 그런데 그 평탄함이 풍요의 쇠약으로 드러난다. 평탄함 때문에 썩고, 평탄함 때문에 나약해진다. 평탄함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다. 반면에 극심한 고난의 인생이 있다. 너무 고난이 심해서 심성이 상하고, 의욕을 잃고, 일생의 삶이 눌려지내는 삶이 있다. 고난으로 인해서 인생이 파괴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특징이 있다. 환경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평탄함이 있을 때는 가속을 붙여 더 빨리 전진하는 인생을 산다. 반면에 고난이 있을 때는 더 강력한 영성을 기를 기회로 삼아서 상황을 뒤집어놓고야 만다. 펑탄과 고난이 모두 인생의 여정에 강력한 힘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인생의 조건이란 유리하고 불리할 것이 없다.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2. 산악자전거의 묘미 : 자전거를 타다보면, 평탄한 한강의 자전거 전용도로가 편하다. 빠르고, 안전하고, 상쾌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자전거를 타다 보면, 이런 길이 지루하다고 느끼게 된다. 일종의 평탄의 권태라고 할 것이다. 그때는 행주 대교 쪽의 비포장도로를 가게 된다. 온통 울뚱불뚱하고, 모래 언덕이 있고, 구덩이가 있다. 그 난관을 극복하는 재미가 솔솔하다. 그래서 나는 먼지를 뒤집어써도 그 오프 로드 길을 좋아한다. 어떤 때는 높은 언덕길을 올라야 할 때가 있다. 인생의 고난의 길이다. 그런데 오직 내 다리의 힘만으로 그 높은 곳을 오른다고 생각할 때, 희열이 생긴다. 그리고 업힐 다음에는 수 킬로의 신나는 다운 힐이 기다리고 있다. 그 기분은 체험해 본 사람 이외에는 알 수 없는 통쾌함이 있다. 가장 좋은 자전거 길은 이런 포장 도로, 오프 로드, 업힐, 다운힐이 골고루 섞여 있는 곳이다. 라이더들은 이런 난관을 어려움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즐긴다. 모든 스포츠에는 바로 이런 난관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다. 즐기기 때문이다.

3. 다양한 인생의 국면을 즐기라 :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평탄함만 있는 인생은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어떤 때는 평탄함도 있다. 어떤 때는 비포장 도로도 있다. 어떤 때는 높은 산을 오르는 고난도 있다. 그러나 비탈길을 질주하는 잘 나갈 때도 있다. 지혜로운 인생은 이 모든 것을 즐길 줄 아는 인생이다. 그래서 항상 기쁨과 감사가 넘친다. 한번 스포츠를 즐겨보라. 그래야 인생의 참 맛을 알고, 신앙 생활에서도 많은 힌트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인생의 국면은 다 즐길만 하다. 모두 축복의 장면들인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버릴 것이 없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고백은 주어진 모든 상황을 즐기는 사람의 힘찬 고백이다.

뻔하다와 다르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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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하다"와 "다르다"(1.28.2005) - 기독신문 목회 칼럼 중에서

  우리 교회에는 중국 유학생 출신이 많다. 그래서 놀아도 "중국적"으로 논다. 한 번은 한자 조어를 가지고 뜻을 맞추는 퀴즈를 냈다. '우물 정'(井) 가운데 '점' 하나를 찍으면 무슨 글자냐는 질문에 '퐁당 퐁'이라고 대답하는 식의 문제이다. '입 구(口) 속에 사내 남(男), 계집 녀(女)가 들어간 글자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을 했다. 감은 오는데, 쉽게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글자가 "뻔할 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러나 잠시 후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이 있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뻔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은 세상과는 다른 존재가 아닌가? 성도의 특징은 구별됨이라고 하지 않는가? 뻔하다는 소리에 성도가 가볍게 웃을 수만 있는가?  사람들은 고난받으면, 좌절하고 원망한다. 그것이 뻔한 일이다. 그러나 행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는 달랐다. 빌립보감옥에서 울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찬송과 기도를 통해 감옥의 자리를 예배와 영광의 자리로 바꾸어 버렸다. 그들은 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 어떤 그리스도인 공무원이 좋은 자리(?)에 갔다고 한다. 그 자리에 가면, 1년에 집이 한 채 생기는 자리라고 한다. 그런데 10년이 되어도 집이 안생겼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었지만, 몇 년이 지나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뻔하지 않은 인생을 산 것이다. 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게 만만하게 보이며 사는가? 왜 뻔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는가?
  우리 교회는 젊은이들이 많다. 젊은이들은 밤문화에 강하기 때문에 새벽은 약하다고 한다. 뻔한 말이다. 그래서 그 뻔한 것과 싸웠다. 지금은 수천명의 젊은이들이 새벽을 깨운다. 뻔한 것을 깨버린 것이다. 21세기의 현대인들은 피곤해서 철야기도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뻔한 말이다. 그래서 그 뻔한 것과 싸웠다. 금요일 저녁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철야기도회를 한다. 그런데 앉을 자리가 없어서 영상으로 연결시켜 예배 드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뻔한 것을 깨버린 것이다. 주일 저녁에는 사람들이 쉬고 싶어서 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심지어 예배가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뻔한 말이다. 그래서 그 뻔한 것과 싸웠다. 지금은 2500명이 넘는 성도가 모여든다. 전체 예배 중에 저녁예배의 참여 수가 가장 많다. 뻔한 것을 깨버린 것이다. 세상이 뻔하다고 하는 것과 싸운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욕은 "뻔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12:2)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뻔하다"는 말을 듣는 존재가 아니라 "다르다"는 말을 듣는 존재이다. 뻔하게 살지 말자. 다르게 살자.

설사가 주는 영적인사이트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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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가 주는 영적 인사이트" (1.20.2005) -- 기독신문 목회칼럼 중에서 --

  통영선교를 갔다. 사역을 많이 도와주는 어떤 형제에게 회를 사 주었다. 염통이 두 개 있는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먹었다. 굴도 사주었다. 온 몸에 숨은 동굴이 있는 것처럼 정신없이 먹었다. 이게 인간인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 고통을 호소한다. 배가 아프니,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항구 한 복판 가까운 곳에 화장실이 없었다. 400미터 정도되는 은행까지 걸어가야 했다. 200미터는 인간답게 걸었다. 100미터는 공룡같이 구부린 모습으로 걸었다. 나머지 100미터는 도마뱀같이 거의 기어서 걸었다. 화장실에 들어가자 마자 '평' 소리를 내며,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밖에서 이 소리를 들으면서 깊은 깨달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경외와 감사로 가득차게 되었다. 시편 기자는 인간의 몸을 보고, 감사의 찬송을 드린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 139:14) 이 날 나는 인간 몸의 기능과 시스템에 대해서 감사를 드렸다. 우리 몸은 독이 들어오거나 나쁜 것이 들어오면,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그 독을 몸 밖으로 내 보낸다. 식도, 위장, 십이지장, 대장, 직장의 순서를 밟을 시간이 없으면, 들어온 길을 역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이것을 구토라고 한다. 그러나 구토가 안될 때는 온 몸에 수분 총 동원령을 내린다. 그리고 강한 물살로 몸의 나쁜 것을 씻겨 내린다.이것이 설사이다. 보통 때는 볼 일을 볼 때, 힘을 주어야 하지만, 이때에는 오히려 힘 조절을 해야한다. 너무 힘을 주면, 내장까지도 빨려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영적으로도 같은 원리를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원한을 품고 살아간다. 미움을 품는다. 심지어 시기, 질투를 품고 살아간다.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하는 소리를 가슴에 품고 살던 사울은 결국 시기심으로 미치게 되었다. 영적 설사가 없으면, 미치게 된다. 자신이 썩게 된다. 육체는 설사를 통해서 건강을 유지하게 만드는데, 우리의 영혼은 설사가 없어서 나쁜 것을 품다가 썩게 되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의 장점이 무엇인가? 닭이 두 번 우는 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곧장 통곡과 함께 회개한다. 그는 즉각적인 죄의 배출, 즉 영적 설사가 있는 회개의 사람이었다. 이것이 그를 살린 것이다. 용서가 왜 중요한가? 용서하지 않으면, 먼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썩는다. 독이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당한 고통과 동시에 용서하지 못해서 당하는 썩음까지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영적 건강을 위해서는 영적 설사를 배워야 한다. 말씀, 기쁨, 감사는 품고, 미움, 원한, 질투는 다 배설하자. 이것이 설사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일본에서 바라본 백범일지의 가치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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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바라본 백범일지의 가치"(1.7.05)

1. 생각보다 강한 한류 : 한국에서 생각하는 한류의 바람보다 일본에서 느끼는 한류의 바람이 더 강한 것 같다. 쇼핑 센터를 갔더니, 음반 코너 한쪽 전부, 서점에 갔더니 한 섹션이 다 한국어 교육, 드라마를 통한 한국어 학습서들로 가득차 있었다. 겨울연가의 열풍에 이어, 요즘에는 NHK에서 '대장금'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한국음악, 한국의 드라마가 들리고, 보이고 있다. 일본 교민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이 진심으로 한국인에게 마음을 열고, 좋아하는 것은 최근 역사상 처음이라고들 말한다. 가식이 아니라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았다. 특히 한국 남자의 인기는 절정이었다.

2. 백범일지의 예견 : 백범 일지 앞부분의 서문이라고 생각되는데, 김구 선생은 우리나라가 장차 세계를 완력으로 지배하는 제국주의국가가 되는 것을 소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세계를 문화를 통해서 섬기고, 하나되게 하는 것을 소원한다는 취지의 말씀이 생각난다. 김구 선생은 벌써 우리민족의 문화적인 독창성과 지혜를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 우리는 문화에 강한 민족이다. 어디에나 문화적인 요소들이 녹아있다. 각 민족마다 장점이 있다. 독일은 철저한 장인의식, 중국은 상업 기술, 미국은 합리성에 기반을 둔 모험의식.... 각 민족과 나라가 융성할 때는 그 장점을 활용해서 세계에 소개할 때이다. 우리는 문화민족이다. 이 문화가 얼마나 강하게 타 민족에게 흡수되는지는 현장에서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3. 복음증거자의 자세 : 일본에서 복음 증거할 때, 우리의 문화적인 요소들이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여러 해동안 지속된 김치 세미나를 통해서 변화받은 사람들이 이번에도 집회에 참석까지 했다. 문화는 같이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쉽게 마음을 열고, 그 결속이 무척 강하게 된다. 영화, 음악, 서적 등을 통한 문화 선교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단시간에 구호로 될 문제는 아니다. 자신의 직업 속에서 문화 속에 녹인 복음을 어떻게 증거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이 곳에 복음 증거의 넓은 길이 있다.

왜 거북이는 토끼에게 지는가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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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북이는 토끼에게 지는가?"(12.17.2004)

1.반복되는 패배 : 거북이는 토끼와 경주하면 항상 진다. 종종 토끼가 잠을 자서 이긴다고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만한 말이다. 상대의 방심이 없는 한 거북이는 토끼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몇 번의 패배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반복되는 실패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거북이에게 잠재된 신조 : 거북이는 누가 심겨 주었는지 모르지만, '산은 가치가 있는 곳이지만, 바다는 하찮은 곳이야'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산으로만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에서 항상 패배를 당하곤 하는 것이었다. 거북이는 패배할 존재가 아니다. 다만 그의 신조 가운데 산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그를 패배자로 만드는 것이다.

3. 바다로 가면 이긴다 : 거북이는 계속되는 패배 속에서 분노해야 하고, 그 분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재 분석해야 한다. 나는 산이 좋은데, 바다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토끼에게 역제안을 해야한다. 바다에서 경주해 보자!  바다에서는 토끼는 100전 100패다. 거북이가 깨달아야 할 것은 자신의 자리가 바다라는 점이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이다. 나의 자리에 서 있어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에서 경주하는 거북이는 만년 패배자다. 그러나 바다에서 경주하는 거북이는 만년 승리자다. 결국 승패의 관건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결정해 주는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당신은 실패를 선용하고 있는가? 실패를 통해서 자리 찾는 싸움을 벌이고 있는가? 미루지 말라. 즉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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