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열심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에도
각 곳에 세워진 교회들을 소소하게 챙기는 일을 다 감당합니다.
너무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또 수많은 제자들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는 소홀함이 있을 법도 하지만
전혀 그런 내색 없이 다 감당합니다.
두로에서 출발해서 바닷길을 건너서 돌레마이에 도착해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가이사랴에 도착해서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거기서 머무르게 됩니다.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한다고 하면서 부지런히 서두른 길이면서도
전혀 서두르는 기색 없이 한 곳 한 곳 다 챙기는
바울 사도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읽혀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우리들에게도 필요합니다.
끈기 있게 정성을 다해서 섬기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교회의 일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행사에 치이고 목표에 치여서 정작 품어주고 섬겨줘야만 할 사람들은 다 놓쳐 버리고
오로지 세상의 시장바닥처럼 욕심에 충만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교회의 일을 왜 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행사를 한다고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세우면 하나님 사랑은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서로 사랑해야만 할 성도들 사이에서도
서로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고,
좀 뒤처지고 느리고 답답한 성도들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찬356장 3절
주님의 십자가 나도 지고 신실한 믿음과 마음으로
형제의 사랑과 친절한 위로를 뉘게나 베풀게 하옵소서
누구에게든지 주를 섬기듯이 섬겨야만 하는데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서는 대접 받을 자가 따로 있고
무시당하는 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희한한 일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곤두박질을 하고 있고
오히려 목소리 큰 사람들의 놀자 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요즘 신앙생활, 교회생활의 현실입니다.
오늘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만나게 되는 선지자 아가보라는 사람의 이야기도
사실 그런 일 들 중에 하나입니다.
11-12절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하니”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막되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냥 말로만 막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띠를 가지고 와서 이 띠의 주인을 이방인에게 넘겨주겠다고 한다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말하면서 막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제자들의 생각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아가보 선지자의 말을 듣고는 사도 바울과 함께 다니고 있는 제자들까지
예루살렘 행을 극구 막는 것입니다.
원래 이들은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 행에 대해서 전혀 의사표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라는 사람의 이야기 한 번 듣고 나서는 그간의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요?
솔직히 혹시라도 예수 믿고 사는 삶을 꽃마차를 타고 황금 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인간적인 어리석음 때문이 아닐까요?
엄청난 능력이 있는 사도 바울을 따라 가보면 뭔가
자신들의 팔자가 고쳐질 것 같은 환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 그런 환상들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도 가득한 것은 아닌지 염려와 걱정을 해봐야만 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길은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것으로 예언되어 있었습니까?
행 9:15-16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여기서 해를 본다는 것이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쳐다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난관과 아픔과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겁니다.
꽃마차를 타고 가는 길이 아니라 엄청난 난관과 아픔과 고통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제자들과 함께 한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리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겁니다.
인간적인 정과 욕심일 뿐입니다.
당연히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을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가는 겁니다.
때문에 절대 쉽지 않은 길입니다.
요16:31-3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세상에서는 우리가 당연히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셨음을 믿고 가기 때문에 담대하게 사는 겁니다.
결코 우리의 기쁨을 뺏기지 않고 사는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오해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13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는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숭고한 결단만 보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순히 복음을 위해서 죽겠다는 결단이나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장엄하거나 비장하게 각오를 하기 때문에
우리와는 전혀 다른 수준의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울이 우리보다 훨씬 더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겁니다.
어떤 것이 더 나은 것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겁니다.
우리는 겨우 이 세상에서 사는 것에 국한하고 원하고 바라지만
바울은 더 중요한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다짐과 각오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겁니다.
때문에 이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누리겠다고 하는 겁니다.
왜 우리가 주의 뜻을 따라야만 합니까?
그것이 이 세상의 것보다 더 나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해야만 합니다.
까먹지 말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 부딪히면 자꾸만 영원한 것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세상 것에만 집중하고 사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해도 자꾸만 다툼과 시기와 질투 쪽으로 가버립니다.
지금 이 땅에서 누리고 사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남들이 잘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박수 쳐주면서 함께 가면 됩니다.
별스러운 거 하는 거 아닙니다.
그저 주의 뜻대로, 주시는 대로 감당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에 대해서는 눈 감고 주 만 바라보면서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이미 차지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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