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나실인들의 결례를 행하고 보호자가 되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은 결국 사도 바울을 붙들어서 죽이려고 합니다.
28-29절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 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
이는 저희가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성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저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줄로 생각함일러라”
드로비모라고 하는 헬라인을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사람이
사도 바울이라고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핑계 김에 그냥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지금 사도 바울에게 걸고 있는 이런저런 이유들은 몽땅 다 그냥 핑계일 뿐입니다.
어떤 핑계입니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사단의 핑계일 뿐입니다.
사단은 언제 어느 때든지 우리로 하여금 어쩌든지
복음 안에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음흉한 계획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영적으로 이해하거나 못하거나에 관계없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 안에서의 삶을 못살도록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계획과 생각은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교묘하고 간교하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졌다는 것이 단순히
하와가 멍청하거나 한심하거나 영적이지 못해서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런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 된다고 착각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하와는 단순하고 순진하고 바보 같아서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만큼 사단의 유혹이 강렬하고 거절할 수 없는 능력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우리도 사단의 유혹을 구분하고 퇴치할 수 있는 실력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유혹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안에 고정되어 있는
자기 습관과 자기 경험, 자기 의를 통해서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들먹이고 있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지켜온 유대인들의 관습과 습관, 경험, 유대교적인 태도입니다.
그 기준들을 들먹이면서 복음 그 자체를 방해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성전 안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뿌리 깊은 유대의식을 저들은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마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성전의 모든 의식은 다 종료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파괴해버리신 성전의 모든 의식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복음이 주는 자유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종교성이 복음 그 자체를 변질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 기준을 가지고
복음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봐야만 합니다.
복음은 세상적 기준에서의 성공이 아닙니다.
복음은 오히려 세상적으로, 육체적으로 볼 때는 더 많은 실패와 좌절입니다.
보세요.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삶이 지금 어떤 모습입니까?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살면서 감옥을 드나드는 죄인의 신세로 전락을 했습니다.
그의 삶의 대부분은 고난당하고 어려움 당하는 일 밖에 없습니다.
고후11:21-27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복음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한 위협과 고난과 죽을 일들만 있었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금방이라고 죽게 된 상황입니다.
30절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예루살렘의 온 성이 떠들썩하게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도 바울을 잡고 성 밖으로 나갑니다.
성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곧 그 어떤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죽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온 성이 떠들썩했던 것이 오히려 사도 바울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떠들썩함이 로마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천부장을 통해서 사도 바울을 살리십니다.
군중들의 위협으로부터 사도 바울을 보호하시고자
하나님은 로마 군대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불만이 있습니다.
어떤 불만입니까?
로마 군대를 동원하셔서 구원하시지 말고
차라리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아예 어려움 그 자체를 주시지 않는 것이
어려움 당하고 나서 건져주시는 것보다 훨씬 더 낫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그렇죠?
옥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입니다.
왜 굳이 사람들에게 쫓기게 하고 옥에 갇히게 하시느냐는 겁니다.
그런 과정 다 생략하고 곧 바로 복음을 전하게 하시면
훨씬 더 빠른 효과를 얻을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 아닌 불만도 바로 그런 겁니다.
굳이 이렇게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하실 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빨리빨리 응답하시고 역사하시면
우리가 좀 더 예수를 잘 믿고 살 텐데
왜 이렇게 마냥 늘어터지게 하실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러실까요?
그렇죠?
차라리 구해주시지나 말든지 왜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옥에 갇히면 또 구해주십니까?
그냥 놔둬서 빨리 천국이나 가게 할 것이지..
가만 따져 보면 스데반 집사가 제일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는 그냥 한 번 설교하고 나서 곧 바로 죽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그 어떤 고생이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사도 바울을 보세요.
질기게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모진 고난을 당합니까?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구해주시지 않는 것이 복입니다.
어렵고 힘들고 골치 아픈 세상을 그냥 빨리 벗어나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래서 누가 그랬잖습니까?
“지구야, 나는 그냥 내리고 싶다!”라고..
그런데 왜 어렵게 하십니까?
이 부분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어야만 합니다.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것이 곧 우리들이 이 세상 가운데서 보여주고 비쳐줘야만 할 착한 행실이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고 손해보고 살면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보여줘야만 할 영적인 책임과 사명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의 소망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세상에 빠져서 사는 삶이 아닌
복음을 위한 희생과 양보와 포기의 삶을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보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타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의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 예수를 동원하고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현실의 깊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쫓기고 얻어맞고 옥에 갇히는 겁니다.
때문에 어려운 현실에 사는 것이 오히려 당당하고 자랑스러워야만 합니다.
어려우면서도 세상 본받지 않고 따르지 않고
여전히 복음을 위한 사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어야만 합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더 어려워져도
행복하고 당당한 삶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복이어야만 합니다.
그 은혜를 당당하게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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